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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한국생활에 부푼 꿈을 안고 일본에서 왔다.
당시 남편은 회사에 다니지 않고 부모와 함께 농사를 짓고 있어서 살림은 따로 했지만 매일 버스를 타고 시댁으로 가 농사를 도왔다.
주로 벼농사, 밭, 하우스 등과 소 13마리를 기르고 있었다. 시아버지는 “너는 대화를 할 수 없기 때문에 농사일을 하면서 말을 배워라”라고 말씀하셨지만 말이 통하지 않는 가운데 서투른 농사일을 하는 것은 정말로 힘들었다.
남편은 농사일만으로는 수입이 적기 때문에 가끔 일용노동자로 일을 하고 있었지만 적은 수입으로 아이를 키우고 생활해 나갈 수 있을지 불안한 생각이 많이 들었다.
그런 어느 날 새벽에 갑자기 ‘응- ’하는 신음소리가 들려 일어나 보니 남편이 경련과 발작을 일으키고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초등학교 6학년 때 교통사고로 머리를 크게 다친 휴유증이란다.
그런 질병이 있는 것을 누구도 이야기해 주지 않아 처음으로 알게 됐을 때는 큰 충격으로 며칠 동안 잠을 잘 수 없었다. 얼마 지나 남편이 정신지체장애 3급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언어와 환경도 다른 한국에서 아이를 기르면서 장애자의 남편과 어떻게 살아 가야 할지 눈앞이 깜깜하고 매일 울기도 했다.
그러나 생활을 해야 하기 때문에 사전을 들고 한국어를 공부했고 발음이 좋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알아 듣지 못하기 때문에 텔레비전을 보면서 입의 형태를 연구했다. 그러자 점점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됐다.
둘째 딸이 태어나 5개월 되었을 때 일본어강사를 하고 있던 아는 사람이 일본으로 이사하게 돼 대신 일본어를 가르치게 되었다. 한국의 ‘아이가 태어날 때 자기가 자라기 위한 밥상을 가지고 온다’라는 그 말대로 수입을 얻는 길이 생겼다.
그것뿐만 아니라 일본어교실에서 만난 사람들은 밝고 예의 바르고 일본어 공부를 즐기고 있어 큰 기쁨을 얻을 수 있었다. 일년 정도 일본어를 가르쳤는데 시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져 일주일에 한 번씩 수발을 들게 돼 중단했다. 일을 하면서 어린 아이를 기르는 것이 힘이 들었다.
남편은 장애인이기 때문에 감정조절이 쉽지 않아 의논할 일이 있으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위가 아프고 호흡이 힘들며 식욕이 없고 밤에 잠을 잘 자지 못해 병원에 가보니 우울증이었다.
나는 언제 죽어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살아오던 어느 날, 길에서 근처 찻집 사장님을 만났다. 밝은 미소로 “차 한 잔 마시고 가요” 라던 그 말이 마치 나에게 한줄기 빛을 준 것 같았다. 차를 마시면서 2시간 동안 현재의 상황을 이야기했다.
그분은 이야기를 들은 후 웃으면서 “당신은 큰 희망 속에 있어요. 행복은 고생의 반대 측에 있는 것이다. 지금부터 어떤 복을 만날는지 기대된다. 당신은 지금까지 고생했기 때문에 지금부터 큰 복을 만나요”라고 말했다. 나는 깜짝 놀랬다.
또 남편은 건강하고 성실하다, 나에게는 한국어 일본어를 말을 할 수 있다 등 모두 희망의 말을 하셨다. 그후 남편에 대한 생각이 바뀌어 불안도 점점 줄어 들고 희망을 가지고 생활할 수 있게 되었다.
병이 회복했을 무렵 전에 일본어공부를 했던 사람들이 한일교류회를 시작하게 되어 통역을 돕게 되었다. 벌써 4년째 인데 한국 사람에게는 일본 것을, 일본 사람에게 한국의 것을 소개하는 보람 있는 일을 맡고 있다. 그리고 주민자치센터에서 일본어를 가르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모국어인 일본어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주어 너무 기쁘다.
이렇게 일을 하다 보니 부족한 부분이 느껴져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것을 계기로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 입학했다. 모르는 단어가 많아 책을 읽는 것이 어렵지만 친구도 만나고 함께 공부하는 학우들이 열심히 하는 모습에 좋은 영향을 받기도 한다. 공부를 열심히 해 남편이 장애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 아이들의 교육에 도움이 되고 싶다. 외국인이라도 한국 사람과 같이할 수 있는 것을 알아줬으면 한다.
나는 한국생활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웠다. 살면서 고생도 많았지만 부딪히고 가다보면 거기에 희망찬 보람과 행복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앞으로도 더 한국어, 한국문화를 배워 글로벌사회에 일원으로서 활동해 나가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