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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암굴 중바위 유명 도둑굴에 서령장군 살았다는 전설 전해져… 모레실과 사곡 통합 사곡마을 지명 불러
2. 덕호리(德湖里)
덕호리는 고종 32년(1895년)에 이운면이 하이운면(下二運面)으로 개칭될 당시 군호와 신덕리로 존치하였다가 1914년 3월 1일자로 고성군의 면을 병합할 때 하일운면의 입암리 일부와 사천군의 궁지동 일부를 병합하여 신덕과 군호의 이름을 따서 덕호리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행정리로 두수(杜樹), 신덕(新德), 부평(富平), 군호(君湖)의 4개 마을이 있다.
▣ 두수
두수마을의 동명은 옛날에 마을 앞의 풍치림이 줄을 지어 우거져 있었으므로 동명을 ‘두수’라고 지어 부르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 마을의 형성
마을의 동편 골을 ‘작은 두수골’이라 부르고 있으며 이 곳 산록에 많은 무연고 분묘가 있는데 구전에 의하면 이씨의 분묘라고 하며, 1750년경에 고성박씨 부인이 고성읍에서 살다가 부군을 사별하고 친정인 이곳에 와서 살았는데 친정 성씨가 밀양박씨로 고성박씨와 밀양박씨가 맨 먼저 입촌하여 거주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는 고성박씨, 김해김씨, 경주최씨 등 10여 성씨가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 지명 일화
◇ 사당산(射堂山) : 마을 뒤에 있는 사당산(해발 200m)에는 약 6,600㎡ 정도의 평지가 있으며 남쪽은 석탑으로 성벽을 쌓은 흔적이 있으나 허물어져 알 수 없고 돌담 사이에 꿀껍질과 기와조각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임진왜란 때의 성지로 추정되고 있다. 또 산정 좌측능선 중턱에 괴암(蛙岩)이 있는데 형상이 개구리 같으며 10여 명이 앉아 놀 수 있는 정도의 큰바위다.
▣ 신덕
신덕마을은 고종 32년(1895년)에 이운면이 하이운면으로 개칭될 당시까지 신덕리로 존치하다 1914년 3월 1일자로 고성군이 면을 병합할 때 군호리와 병합해 덕호리로 했다. 광복 후 분동되면서 내촌과 평촌을 합쳐 신덕으로 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을의 형성
신덕마을의 형성 연대는 기록이 없어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현재 마을에 살고 있는 씨족의 입촌 연대를 살펴보면 고성박씨가 1760년대에, 그리고 밀양박씨가 입촌한 것으로 되어 있어 마을이 형성된 것은 훨씬 그 이전부터 사람이 거주하면서부터 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부평
부평마을의 동명은 옛날에 강씨 성을 갖고 주민이 모여서 산다고 해서 ‘강상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마을이 너무 가난해서 약 100여 년 전에 마을명을 부평으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을의 형성
부평마을의 형성 연대는 약 250여 년~300년 전에 진양강씨가 맨 먼저 입촌해 정착하게 되면서 마을이 만들어졌다. 지금은 남평문씨, 남양홍씨, 김해김씨, 경주최씨, 전주이씨, 분성배씨, 밀양박씨 등 여새로 러 성씨가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 군호
오늘의 군호마을은 옛날 군지개(軍池浦)라 했는데 ‘안 군지개’와 ‘바깥 군지개’로 형성돼 1개 동이 되었다. 바깥 군지개는 지금의 신덕마을에 편입되었으며 ‘안 군지개’는 ‘갈목개’와 ‘점땀(店忖)’으로 3개 마을을 합쳐 군호마을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당초 ‘군지개’라 부르게 된 것은 군인들의 요새지가 될 것은 1914년도에 고성군이 면을 통·폐합 조정할 때 동명을 군호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마을의 형성
마을 형성은 임진왜란 때 갈목개에 주씨가 살고 있었는데 골목에 아이들이 놀러 나갔다가 집을 찾지 못할 정도였다고 전하고 있으나 지금은 한 집도 살고 있지 않다.
그 뒤에 정씨가 많이 살았다고 하나 역시 지금은 한 집도 살지 않고 양 성씨의 선조들의 묵은 묘만 마을 뒷산에 남아 있다. 그 후로 김해김씨와 밀양박씨가 약 300년 전에 입주해 살게 되었으며 현재는 인동장씨, 삭녕최씨, 경주이씨, 전주이씨, 진양강씨 등 여러 성씨가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 마을의 지세
군호마을은 군 소재지로로부터 약 38㎞ 떨어진 고성군의 최 서남단(북위 34도 53분)에 위치해 마을 뒷산의 산록에 자리잡은 마을로 앞은 한려수도의 바다를 건너 통영시 사량면을 바라보는 마을로 이 곳에 삼천포화력본부(발전소)가 1978년 10월 25일에 건설돼 현재 4호기까지 준공(1994년 6월 준공)되어 발전하고 있으며 삼천포가 생활권으로 되어 있다.
◎ 군호의 팽나무(일명 포구나무) : 군호 마을에 있는 천연기념물 제308호로 지정된 팽나무는 수령 약 500여 년으로 나무둘레가 9.6m, 높이가 약 20m의 노거수로 매년 풍년을 기원하고 전염병 등 큰 재앙을 예방하기 위해 음력 정월 보름에 동제를 지내고 있다. 녹음이 일찍 짙어지면 풍년이 든다고 하고, 나무 밑에는 모기가 없어 여름철 밤에 노인네들이 모여 놀기도 하며 옛날에는 고기잡이 나간 남편을 기다리는 아낙네들의 기다림의 장소로 정해져 있었다고 한다.
◎ 승암굴(僧岩窟:鴉浦)
◇ 중 바위 : ‘중 바위’는 옛날 도승이 갈목개의 중 바위로 부터 약 1㎞정도 떨어진 현 사천시(삼천포) 모례마을에 있는 ‘소코 바위’까지 다리를 놓기 위해 상좌를 데리고 물 위를 걸어다니면서 돌을 운반하고 있었다.
그 때 바지락을 캐러온 두 여인이 “저것봐 저기 사람이 물위를 걸어다니면서 다리를 놓고 간다”고 하니까 지각있는 한 여인이 “그런 것을 봐도 못 본 체 하지 않고 무슨 방정맞은 소리냐”고 꾸짖었는데 이를 들은 도승은 하던 일을 멈추고 “요망스런 계집”이라 하며 그 자리에서 상좌와 같이 즉사하여 바다 밑의 기암절벽에 붙었다고 구전되어 오고 있는데 물 속이 맑을 때에는 그 흔적이 보인다고 한다.
또한 한파로 가뭄이 들 때는 도승의 머리에 꼬깔을 씌우고 제를 지내면 효험을 본다고 하여 제를 지내기도 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 도둑굴 : ‘도둑굴’은 마을 앞 바닷가에 있었던 굴로 100여 명이 놀 수 있는 두 개로 이루어진 넓은 굴로 길이가 200m 정도이고 큰 굴은 길이가 얼마나 되는지 끝까지 들어가 본 사람은 없다고 한다. 이 굴에 얽힌 전설로는 ‘서령’장군이 이 굴에 살았는데 나라의 조세를 싣고 왕래하는 배를 불러 들여 그 재물을 불쌍한 백성에게 나누어 주면서 한 달 선 보름은 육지에서, 후 보름은 물 밑에서 살았다고 한다. 여기서 10여 리가 떨어진 사량면 우수도까지 물 위로 걸어 다녔다고 한다. 그리고 세상을 하직할 때에는 우수도에서 별세하였다고 하여 사람들이 그 곳에 사당을 짓고 지금도 매년 제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도둑굴은 발전소 건설로 지금은 없어졌다.
3. 사곡리(沙谷里)
▣ 사곡
사곡리는 본래 하이면의 지역으로서 모래가 많았다 하여 ‘모래실’ 또는 ‘사곡’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사곡리로 하여 현재 단일 법정리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을의 형성
마을은 전하는 바에 의하면 남평문씨와 김해김씨가 오래 전부터 살았다고 전하나 지금은 살지 않으며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전주최씨의 집성촌으로 형성되어 있다.
◎ 사적 및 기타
◇ 사곡리 성지 : 하이면 사곡리 산 41번지에 있는 사곡리 성지는 삼천포만을 방어하기 위하여 임진왜란 때 구축한 석축성의 일종인 봉수대의 축성으로서 주의 약 400m이다. 지금은 대부분의 봉이 멸실되고 남아 있는 부분은 길이 약 40m, 높이 약 1m의 흔적만 남아 있다.
◇ 황산수정(皇山樹亭) : 하이면 사곡리에 있으며 반석이 층대를 이루어 수십 명이 놀 수가 있고 남나무 8~9주가 둘러있어 그 둘레가 수십발이 되나 연대는 알 수가 없다. 남호 최익 선생이 시를 읊던 곳으로 전하고 있으며 지금도 보호되고 있다.
◇ 사당산(射堂山) : 사곡리 뒤쪽에 위치한 해발 약 400m의 산으로 산 정상에는 약 1,000여 평의 연병장 같은 평지가 있으며 지금도 그 주위에는 움집과 같은 흔적이 남아 있다. 이 사당산 맞은 편에 천황산이 있는데 이 두 산에 얽힌 우리 선조의 투철한 호국 정신이 지금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조선 선조 때(1592년)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남해안을 먼저 침략했을 때 이 곳 사곡리에서도 동네 청년들이 사당산에 모여 활쏘는 훈련을 하면서 일본의 침략에 대비했다. 임진왜란 때 사당산 맞은 편의 천황산(天皇山:일본 천황을 표적으로 삼았다하여 붙여진 산 이름임)에 표적판을 세워두고 활을 쏘기 시작했다고 하여 이 때부터 이 산을 사당산이라 불렀으며 맞은편 산을 천황산으로 부르면서 우리 선조들의 영웅담이 전해지고 있다.
◇ 사곡산 전설 : 지금의 사곡산은 먼 옛날 와룡산과 연결되어 있었는데 세상이 천지개벽을 할 때 산이 조금씩 떨어지면서 서서히 갈라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때 사곡리에 살던 한 여인이 빨래하러 나왔다가 이 광경을 보고는 “산이 갈라지네” 하고 소리를 지르니 산이 그만 우뚝 섰다고 한다.
이 일이 있은 후 동네에는 잘 살고 있던 남평문씨와 김해김씨 문중이 서서히 몰락하기 시작했고 사곡리에는 전주최씨가 새로 입촌해 번성하면서 지금도 이 마을에는 전설을 뒷받침하듯 전주최씨 문중의 집성촌으로 문씨와 김씨는 살지 않는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