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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위한 승병들의 혼이 서린 ‘하이면 운흥사’

하일면 송천리 좌이산 봉수지 우산·진주 각산·사량진 봉수대, 소을비포 진영에 봉화 보내는 망대 역할
고성신문 기자 / kn-kosung@newsn.com입력 : 2008년 06월 21일
ⓒ 고성신문

하이면 와룡리 용이 누워 있는 형세, 영산제 임란 때 왜적과 싸운 호국영령 넋 기려 숙종 때부터 이어져


7. 송천리(松川里)


송천리는 1914년 3월 1자로 고성군이 면을 통폐합 조정할 때 회룡·목개·평촌·고울개·모래치를 병합하여 송천리(松川里)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행정리로 송천1, 자란, 송천1, 자란, 송천2구의 3개 마을이 있다.


 


▣ 송천1


송천1구 마을은 송천리가 분동되어 송천1, 2구로 나누어졌는데 송천리의 마을명은 마을 앞에 솔섬이 있어 숲이 우거지고 마을에 큰내가 흐르고 있어 송내라 하고 있으며 한문자로 송천으로 명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을의 형성


마을이 생긴 연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지금부터 약 360년 전에 전주최씨의 문성공 자손이 이 곳에 정착해 살게 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하고 있으며 그 뒤에 분성배씨가 옆 마을에 입촌해 집성촌 을 이루고 있는 마을이다.


 


◎ 사적 및 기타


◇ 좌이산 봉수지 : 송천리 산 52-1번지 좌이산(佐耳山) 상봉 정상에 있는 봉수지로서 우산봉수대(현 통영시 도산면 봉화산)에서 보내는 봉화를 받아 진주각산으로 보내는 동시 주봉인 사량진 봉수대로 보내는 한편 소을비포 진영에도 보내는 망대 역할을 한 봉수지로 지금은 주위 약 20m의 석축된 흔적만 남아 있다.


 


◇ 송천리 석관묘 : 송천리 189번지(솔섬)에 있는 선사시대의 석관묘로 지표상에 아무런 표적이 없고 지하에 얇게 묻혀 있어 발견되기도 어려웠으나 사태로 표토가 유실되어 1974 12월에 동아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했으며 출토된 유물은 무문토기 2, 회청색 토기 1, 세형철검 1점과 각종 석기류 10점 등 모두 14점이 발굴 된 바 있다.


 


◇ 송천숲과 노거수 : 송내마을 입구에 있는 150년의 수령을 자랑하는 숲으로 숲 중간에 해안도로가 개설돼 지금은 30여 그루만 남아 있다. 또한 마을 앞에 있는 수령 420년생의 포구나무 노거수는 여름철 마을 주민의 피서지로 보호하고 있다.


 


▣ 자란(紫蘭)


자란도는 붉은 난초가 섬에 많이 자생했다 하여 자란도(紫蘭島:붉은 난초섬), 또는 섬의 생긴 형세가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과 같다 하여 자란도(自卵島)라 하였다고 전하고 있으며 지금은 자란도로 쓰고 있다.


 


◎ 마을의 형성


자란도에 사람이 살게 된 시기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당시 소가야국이 자란도에 일시 피난한 것이 최초로 사람이 거주하게 된 것이라 전하고 있으며 본래 송천리에 속해 있었으나 1987년 12월 24자로 고성군 조례 제1002호로 송천리에서 분동돼 행정리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을의 지세


자란도는 하일면 사무소에서 서남쪽으로 6㎞ 떨어진 지점에 위치해 섬 전체의 면적은 0.367㎢이고 해안선은 3.31㎞로 섬에는 읍포(邑浦)와 사포(沙浦)의 두개 자연 취락이 있다. 읍포마을은 옛날 고을 원님이 살았다고 하여 읍포라 이름하였다고 전하며, 사포는 모래사장이 있었다 하여 사포라 하였다고 한다. 섬 정상에는 성이 있었다고 하며 이 성에서 말달리기도 하고 또 말을 사육했다고 전하고 있다.


 


▣ 송천2


송천2구는 1984년 8월 22자에 고성군의 리동 명칭 및 행정구역 확정시 지포(池浦)와 평촌(坪村)마을을 병합해 송천2구로 분동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을의 형성


마을이 형성된 연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지포마을은 내지포와 외지포로 연못과 같은 포구로 형성된 마을로 아득한 옛날 태풍과 해일 등으로 사석과 진흙으로 자연 매립된 포구로 내지포가 형성되어 그 후 지금부터 약 200년 전(을축년)에 ‘왜바람’이란 태풍이 불어서 내지포에는 가옥이 들어설 수 있는 대지가 조성되고 외지포와 평촌마을 사이에는 농경지가 형성되어 이 때부터 주민이 정착하여 살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으며 현재 거주민은 김해김씨, 전주이씨, 고성이씨 등 20여 성씨가 마을을 형성해 살고 있다.


 


◎ 마을의 지세


마을 남쪽에는 옛날 성이 있었다는 산성산이 인접해 있으며 북쪽에는 정박산(渟泊山:배가 닻을 내리고 쉬고 있는 형상과 같음)이 있고 마을 뒤에는 삼각형의 좌이산이 병풍처럼 솟아 있어 이를 일명 필봉산이라고도 하며 좌이산 봉수지가 있다. 마을 앞은 청정해역인 자란만에 임하고 있으며 만아섬과 멀리 삼산면의 와도가 있다. 마을의 농경지는 경지정리가 된 비옥한 토질이나 수원은 넉넉치 못한 편이다.


 


◎ 지명 일화


◇ 약샘 : 평촌 마을 앞 언덕 바닷가에 있는 샘으로 날이 가물거나 비가 많이 와도 수량이 일정량으로 나고 있어 가물 때는 인근 주민이나 도서지방 주민의 식수로 사용되어 왔으며 옛날 나병환자가 이 샘물을 마시고 병이 나았다고 하여 약샘으로 알려져 있다.


 


7. 하이면(下二面)


1. 와룡리(臥龍里)


▣ 와룡


와룡 마을의 동명은 옛날에는 ‘서리띠’라 불러오다가 신라 35대 경덕왕(景德王) 때부터 당나무 문화를 본격적으로 받아 들일 때 우리말을 한자화하면서 ‘상치동’으로 하였으며 그 후 마을 뒷산의 산세모양이 흡사 용이 누워있는 형세와 같다 하여 산 이름을 와룡산이라 하였고, 또한 와룡산 밑에 와룡사라는 큰 절이 있었던 연유로 마을 이름을 ‘와룡골’이라 부르고 있다.


 


  ◎ 마을의 형성


와룡 마을이 형성된 약 250여 년 전인 서기 1700년경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마을에 맨 먼저 입촌한 성씨는 진양강씨라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와룡산 운흥사(雲興寺)가 신라 문무왕 16(서기 676), 즉 지금부터 약 1300년전에 창건된 사찰로 절이 들어서면서 마을도 서서히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마을의 지세


와룡 마을은 와룡산의 상봉인 향로봉(香爐峰: 해발 578.5m), 일명 상소바위를 중심으로 좌우로 둘러싸여 있는 마을로 남쪽은 천마산, 남서쪽은 남산이 가로막아 있는 전형적인 산골마을이다. 마을의 동북쪽에서 남서로 잔등이라는 큰 능선이 뻗어 있어 흡사 용이 누워있는 형세로 마을은 안땀과 바깥땀으로 두개의 동네로 형성되어 있다.


 


◎ 와룡산 운흥사


소백산맥의 최남단에 위치한 삼룡의 하나인 고성 와룡산 중턱에 자리잡은 운흥사는 기록에 의하면 통도사의 말사(末寺)였으나 현재는 대한불교 조계종(13교구) 쌍계사의 말사이다.


 


운흥사는 서기 676년 신라 문무왕 16(지금부터 1300여 년 전)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사찰로 동 사찰에 부속된 천진암과 낙서암은 조선 숙종 8(서기 1692)에 응화선사가 창건한 암자로 전하고 있다.


 


운흥사는 임진왜란 때 이 지역 승병의 본거지로 사명대사가 지휘하던 승병 6천명이 왜적에 대항하여 싸운 곳으로 유명하며,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수륙양면 작전을 꾀하기 위해 의논차 세 번이나 이 곳에 왔다고 전하고 있다.


 


절의 규모는 옛날에 부속된 암자가 9개나 있었던 절터와 맷돌이 있으며 절아래에 있는 부도를 미루어 보아 그 규모를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에는 불화의 화원 도장으로 유명하며 조선 영조 때에는 불화의 대가인 김의겸 스님 등을 배출한 사찰이기도 하다. 소장 문화재로는 대웅전과 괘불, 경판 등이 보존되어 있다.


 


◇ 대웅전 :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82호인 대웅전은 목조와가의 팔작지붕으로 정면 5, 측면 3칸의 맛베다포 집으로 신라 문무왕 16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했으나 임진왜란 때 병화로 소실된 것을 조선 영조 7(1731)에 중건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괘불(掛佛)과 영산제(靈山祭) : 보물 제 1317호로 괘불은 가로 27, 세로 42척이 되는 보통사람 키의 10배가 넘은 크기로 앞면은 삼베로 겹겹이 발라 7색의 물감으로 석가여래상을 중심으로 6좌의 부처님을 그렸고 뒷면은 선지 딱종이로 되어 있으며 서산대사와 사명대사의 친필로 된 진언과 영조대왕의 어언이 새겨져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제일 역사가 오래 되었다.


 


영산제는 임진왜란 때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왜적과 싸우다가 숨져간 호국영령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제로서 조선 숙종 때부터 시작해 매년 음력 2 8일에 괘불을 걸어놓고 제를 지내고 있다.


 


◇ 경판(經板) :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184호의 경판은 불경을 새긴 목판으로 173매가 보존되어 있다.


 


◎ 전설(천마산)


천마산을 일명 ‘부엉이 산’이라고도 하는데 마을 서남쪽으로 기울어져 있어 상제가 말을 타고 하늘로 달리는 형상과 같다하여 부쳐진 이름이다. 말죽통이 지금의 와룡저수지 위쪽의 하천 복판에 있어 이 뜸벙(웅덩이)을 ‘구시뜸벙’이라 하고 있으며 큰 홍수가 나도 메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이것을 풍수지리상 수구를 지키는 마을의 수호신으로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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