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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이 알을 품는 명당자리라‘하일면 학동마을’

전주최씨 고가 전통 가옥양식 역사 가치 높아… 국가등록문화재 258호 돌담길 수백년 전 타임머신 속으로
고성신문 기자 / kn-kosung@newsn.com입력 : 2008년 06월 07일
ⓒ 고성신문

학림리 지석묘,  돌다리 등 문화유적 많아, 3대 민의원 지낸 최갑환·최재구씨 배출한 인물의 고장


3. 학림리(鶴林里)


학림리는 고려현종 9년에 고성이 고성현으로 개칭될 당시 하일운면의 고연·학동·도동(道洞) 지역이었으며 1914년 3월 1 경상남도령 제2호로 고성군으로 면을 병합할 때 하일면으로 개칭되면서 고연·학동·임포·도동을 병합해 학동과 임포의 이름을 따서 학림리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행정리로 임포·도동·학동·금단의 4개 마을이 있다. 학동의 돌담길(100m)은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 임포(林浦)


임포마을은 학림리의 남쪽 바닷가에 위치한 마을로 수백년 전부터 풍치림이 조성되어 있어 마을명을 수풀 임()자와 개 포()자를 따서 임포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자연마을로 임포와 평촌의 2개 마을이 있다.


 


◎ 마을의 형성


마을의 형성은 약 300년 전에 버려진 황무지의 잡종지였으나 문명이 발달되면서 청정해역인 자란만의 중심에 위치한 지역적 여건으로 농·수산물의 집산지로 변화되면서 주민이 거주하게 됐다.


 


일제 때는 임포시장(개시일 매월 3일· 8)이 개설되고 이곳에 공공기관(하일파출소·면농업협동조합·하일우체국·수협어판장 등)이 설치되면서 마을이 형성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도동(道洞)


도동마을은 옛날 하일운면 당시 도동으로 존치하였다가 1915년에 하일면이 설치되면서 학림리에 속했으며 행정리로 임포와 한 마을이 되어 도림으로 됐다가 1987년 12월 24자로 임포가 분동되면서 도동으로 마을명을 고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을명을 도동이라 한 것은 옛날 성지산 깊은 골짜기 바위틈에 옹달샘이 있었는데 이 샘에서 도승이 등잔불을 켜놓고 도를 닦았다 하여 그 샘을 ‘등잔샘’이라 하며 도를 닦았던 골이라 하여 도곡(道谷) 또는 독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 마을의 형성(形成)


마을이 생긴 연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고려현종 때(하일운면 당시) 도동(道洞)으로 존치한 것으로 보아 주민이 거주하게 된 것은 그 이전으로 추정되며 맨 먼저 입촌한 성씨는 의령남씨(南氏)라 전하고 있다.


 


현재 거주민의 성씨는 분성배씨, 밀양박씨, 의령남씨, 김해김씨, 진양정씨, 인동장씨 등 10여 성씨가 마을을 형성하여 살고 있다.


 


▣ 학동(鶴洞)


구전에 의하면 전주최씨 선조의 꿈에 하늘에서 학이 내려와 이 곳 9(학동마을)에 앉아 알를 품고 있는 현몽을 하고는 날이 밝아 그 곳을 찾아 가보니 과연 산수수려하고 학이 알을 품고 있는 형곡(形谷)이 필연적으로 세장지지(世庄之地)로 판단이 들어서 천년대계할 명지라 믿고 이곳을 학동이라 지명을 지었다고 전하고 있다.


 


◎ 마을의 형성


학동마을은 서기 1670년경에 전주최씨의 선조가 맨 먼저 입촌해 지금까지 약 320여 년간 마을을 형성해 거주하고 있으며 현재 거주민의 성씨는 전주최씨(全州崔氏) 16여 성씨가 살고 있다.


 


◎ 사적 및 문화유적


◇ 서비정(西扉亭)과 순의비(殉義碑) :서비정은 서비 최우순공(西扉 崔于淳公)의 항일 우국충의를 숭상하기 위해 1924년에 종친들과 유림들이 서비계()를 모아 학림리 도곡산록에 건립한 서비정사(西扉精舍)로 해방 후 정부에서 국고보조로 여러 차례 보수했다.


 


1960 3월에는 공의 순의비를 학림리 입구에 건립하였고 1990 10월에 정부로부텨 공의 애국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우당 최갑환 선생 행적비(雨堂 崔甲煥 先生 行蹟碑) : 일제 때에는 항일독립운동을 하였고 해방 후에는 제3대 민의원으로 당선돼 국정에 많은 공헌을 한 선생의 행적비를 1990 4월에 향리인 학림리 학동에 세웠다.


 


육영재(育英齋) : 학림리 학동에 있는 서재로 전주최씨 문중에서 자손들의 공부하는 곳으로 세웠다.


 


◇ 굴암(窟巖) : 하일면 학림리에 있는 ‘굴등바위’로 육영재(育英齋) 뒤에 있다. 길이가 100발이나 되고 높이가 8.9척이나 된다. 모양이 마치 성문과 같으며 입구는 낮으나 안으로 들어가면 설 수가 있고 깊이 들어가면 굴이 높으며 굴의 끝까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 최씨고가(崔氏古家) : 1,800년대에 건립된 전통주택으로 우리나라의 남부지역에 널리 분포된 부농의 주거형태로 각 건물의 평면 형태는 일자형으로 안채, 익랑채, 곳간채, 대문간으로 구성되어 있는 고가로 경상남도문화재 자료 제179호로 지정되어 있다.


 


◇ 재실(齋室) : 학동마을에 청우(靑牛) 최재구(崔載九) 전 의원의 생가로 학림재(鶴林齋)가 있다. 이는 1810년에 건립된 건물로 현재 5대째가 거주하고 있다.


 


▣ 금단(琴丹)


금단마을의 동명은 마을 뒤 ‘금은고설’이라 하여 금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으며 하일면의 중앙에 위치한 마을로 학림리 ‘육영재’의 서당이 있어 옛날부터 많은 선비를 배출한 마을이다.


 


◎ 마을의 형성


마을의 생긴 연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서기 1,152년경 임진란 전후에 주민이 이곳에 정착하여 거주하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으며 지금은 김해김씨, 전주최씨, 동래정씨 등 12여 성씨가 거주하고 있다.


 


◎ 사적 및 기타


◇ 학림리 지석묘 : 경남도 기념물 제37호로 지정된 학림리 지석묘는 마을 앞의 학림리 들판에 있는 7기의 지석묘로 해안지대까지 일렬로 분포되어 있는 청동기 시대의 무덤으로 일명 ‘칠성바위’라고도 부르고 있다. 비교적 규모가 큰 기반식 지석묘로 1977년 12월 30자로 지방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 석교(石橋) 돌다리 : 마을 어귀에 있는 ‘돌다리’로 길이가 7m, 높이가 3.5m로 부근의 지석묘를 보아 총동기 시대에 가설된 것으로 추정된다. 구전에 의하면 처음에는 돌 한짝으로 다리를 놓았는데 동민들의 꿈에 “나막신도 짝이 있고 돌 매도 짝이 있는데 왜 돌 다리는 짝이 없나”고 현몽을 하여 다시 돌 한짝을 놓아 두짝으로 된 다리로 그로부터 동민들의 꿈에 현몽하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으며 이 다리에서 실족하여 떨어져도 다친 적이 없다고 한다.


 


◇ 백암산(白岩山) 흰뒤미 : 백암산 장등에 있는 길이가 약 70m나 되는 큰 굴()로서 임진왜란 때 이 곳에서 백성들이 피난을 하였다고 전하고 있으며 굴밑에 ‘한샘’이 있는데 물이 좋아 정월보름에 기우제와 용신제를 지내고 있다.


또한 이곳에 ‘등잔거’가 있는데 옛날에 선녀가 내려와서 ‘한샘’에 목욕하고 등불을 켜놓고 놀았다는 곳으로 전하고 있다.


 


◇ 고목과 동신제(洞神祭) : 마을 어귀에 있는 군나무로 지정된 나무로 수령은 약 450년으로 추정되며 수고가 60m, 나무둘레가 4m나 되며 매년 정월 초하루 자()시에 동신제를 지내고 있다.


 


4. 오방리(梧芳里)


오방리는 하나의 법정리로 형성된 마을로서 전설에 의하면 ‘머귀방’을 오방(梧芳)이라 하였다고 하며 오방사(梧芳寺)가 있었다 하여 오방사지라고도 했다 한다.


 


1914 3 1에 행정구역을 통폐합 조정할 때 오방리(梧芳里)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자연 취락으로 본동과 됨미·가리미·장전걸 등 4개의 마을이 있다.


 


◎ 마을의 형성


마을이 형성된 연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앞산 독메기슭에서 석일(石鎰)과 석족(石鏃) 등이 출토되었고 마을주변 논·밭에서 선사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지석묘가 있다.


 


또 마을 대지 등에서 깨어진 기와쪽이 출토되고 있어 마을이 형성된 연대는 선사시대로 추정되며 현재 거주민은 집단으로 전주이씨, 고성박씨, 함안이씨, 청송심씨와 그 외 20여 성씨가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 마을의 지세


오방리는 와룡산의 좌이(左耳)라고 하는 좌이산 기슭에 자리잡은 마을로 하이면과 경계를 하고 있으며 북쪽은 ‘옥대산’의 거산이 있어 시루같이 생겼다 하여 유명한 ‘시루바위’가 있다.


 


북서쪽에 있는 ‘큰골산’은 ‘국시바위’와 탕근같이 생긴 ‘탕근바위’가 있으며 처녀, 총각이 놀던 샘이 있는데 이 샘에서 바가지를 띄우면 자란만에 간다는 전설도 있다.


 


그리고 거산에는 만리성지(萬里城址)가 있다. 마을 앞의 농경지는 경지정리가 되어 있으며 골이 깊어 수원도 좋은 편이다.


 


◎ 사적과 재실


◇ 오방리 지석묘 : 오방리 마을 주변의 논·밭에 분포되어 있는 8기의 지석묘로 5기는 점판암으로 상석을 놓고 있으며 3기는 화강암의 자연석으로 된 지석을 받친 기반식 지석묘로 묘의 크기는 너비150, 길이 250, 높이 80㎝정도로 1977년 12월 30자로 지방 기념물 제36호로 지정되어 있다.


 


◇ 오방리 고분 : 오방리에 있는 소가야시대 고분군으로 오방리 지석묘군과 인접하고 있으며 1971년 동아대학교 박물관에서 1기의 석관묘를 발굴조사해 단지 1점과 주변에서 고배편이 다수 채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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