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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일면 소가야 때 어례향의 일부, 좌이산 봉수지·학림리 최씨고가·오방리 고분 등 유적지 많아
6. 판곡리(板谷里)
판곡리는 본래 상서면(上西面) 지역으로서 1914년 3월 1일자로 상남면과 상서면이 병합되어 삼산면으로 개칭되면서 판운지(板雲池)와 운곡(雲谷)을 합하여 판곡리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세가 하늘에 구름이 넓게 펼쳐있는 형상과 같다 하여 ‘너른지’라 지금도 부르고 있다. 그리고 판곡리로 동명이 된 것은 판운지와 운곡이 병합되면서 판운지의 판(板) 자와 운곡의 곡(谷) 자를 따서 판곡리로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마을의 형성
판곡마을은 ‘윗땀’, ‘아래땀’, ‘갈망개(渴馬浦)’, ‘마리개(馬里浦)’, ‘노리목(鹿項)’의 자연 마을로 이루어진 법정리로서 마을이 형성된 것은 고려 현종 9년(1018년)에 고성이 고성현으로 개칭될 당시 상서면의 판운지와 운곡마을로 존치하였으므로 그 이전에 주민이 거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은 순흥안씨, 청주한씨, 김해김씨 등 10여 성씨가 마을을 형성하여 거주하고 있다.
◎ 재실(齋室)과 지명일화
◇ 망사재(望思齋) : 망사재는 운정(雲汀) 박애상(朴愛祥)(고성인·임진란 창의공신) 공을 향사하는 재실로서 고성읍에서 판곡리로 들어오는 입구(송낙골)에 있다.
1599년(선조 32년) 3월에 왜적이 남해노량 해전에서 패하여 도망쳐 온 일부가 고성만의 유자섬 앞바다에 숨어 들어와 육지에서 온갖 못된 노략질을 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운정 박애상 공은 의병을 이끌고 현령 조의도와 함께 출전하여 왜적을 무수히 참획하고 해상에서 순절하였다.
그 후 남편의 순절한 소식을 들은 부인 어씨(漁氏)도 남편 뒤를 따라 그 바다에 뛰어들어 순절하였다. 후에 공은 고성현의 남쪽 천마봉에 초혼장(招魂葬)을 하였으며 부인 어씨는 시체를 건져 그 아래에 같이 모셨으니 자손은 멀리서 바라본다고 망(望)자를, 동리 마을 사람들은 공을 거듭 사모하여 생각하게 된다고 사(思)자를 붙여서 그 산을 망사정(亭)이라 하였고 재실을 지어 ‘망사재’라 이름하여 오늘날까지 후손들이 향사를 지내고 있다.
◇ 허씨문중 재실 : 마을 중땀 건너 속칭 ‘허산’ 중턱에 김해허씨 문중의 재실이 있다.
◇ 마리개와 갈망개 : 옛날에 대인이 말을 타고 이곳을 지나다가 말이 목이 말라 가지를 못하고 섰다고 하여 ‘마리개(馬里浦)’라 지금도 부르고 있으며 목을 넘어온 마을 입구에 조그만한 샘이 있었는데 그 샘에서 대인과 말이 같이 목마름을 면하였다 하여 갈망개(갈마개)라 부르고 있다.
6. 하일면(下一面)
하일면은 소가야 때에는 어례향(魚禮鄕)의 일부로서 고려현종 9년(1018)에 고성현으로 개칭되면서 하일운면(下一運面)이라 하여 입암(立岩), 장춘(長春), 신기(新基), 오방(梧芳), 고연(古延), 학동(鶴洞), 평촌(平村), 송천(松川), 동화(東禾), 가룡(加龍), 상화대(上禾大), 하화대(下禾大), 삼태(三台), 산탈(山脫)의 15개 동리를 관할하였다.
서기 1914년 3월 1일자 조선총독부 경상남도령 제2호로 고성군의 면을 병합할 때 하일운면을 하일면(下一面)이라 개칭하고 관할에 춘암(春岩), 오방, 학림(鶴林), 송천(松川), 동화, 용태(龍台), 수양(洙陽)의 7개리를 두었다.
하일면은 1915년에 면이 설치되어 1984년 8월 22일자 고성군 조례 제858호로 행정구역을 조정할 때 종전 그대로 7개 법정리로 정하여 15개 행정리에 39개 반으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하일면은 고성읍에서 25.5㎞ 서쪽에 위치하여 동쪽은 삼산면 남쪽은 바다 건너 통영시 사량면, 서쪽은 하이면 북쪽은 상리면에 접하여 바다쪽은 한려수도를 끼고 자란만에 임하고 있다.
면 사무소는 학림리 739-8번지에 소재하며, 면의 총면적은 36.2㎦, 가구는 1005가구에 인구 3,530명(남자:1,746, 여자:1,784명)으로 고성군 총가구와 인구의 5.6%가 거주하며 경지면적은 657㏊, 임야가 2,209㏊이고 특용작물 재배면적은 35㏊에 17.2M/T을 생산하며 해안선은 33.1㎞에 달하고, 농가수는 688호에 비농가가 125호이며 어가수는 170호로 인구밀도는 170인/㎢이다.
면내의 문화재 현황으로는 성지(城址)가 번계(樊溪)성지, 소을비포(所乙非浦) 성지가 동화리에 있으며 송천리 좌이산봉수지(佐耳山峰遂址), 오방리고분, 송천리 석관묘(石棺墓), 학림리 지석묘, 오방리 지석묘, 학림리 최씨고가, 가룡포 사책지(射柵址 :L 용태리 가룡개), 굴암(窟岩 : 학림리 굴등바위) 등이 있다.
면내의 교육기관은 초등학교 3개 교와 중학교 1개 교가 있으며 취락은 학림리 일대와 자란만의 해안선을 따라 발달해 있고 도서는 유인도인 자란도와 무인도로 늑도(勒島), 송도(松島), 만호도(灣戶島), 마안도(馬雁島) 등이 있다.
1. 수양리(洙陽里)
수양리는 1개의 법정리로 형성된 마을로서 1914년 행정구역을 통폐합 조정할 때 상화대(上禾大)와 산탈(山脫)리를 병합해 수태산 남쪽에 위치하므로 수양리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자연마을로 산만(山晩)·효대(孝大)·간곡(間谷)·점촌(店村)·사곡(寺谷)마을 등이 있다.
◎ 마을의 형성
수양리는 수태산(해발 570m) 남쪽에 위치한 마을로서 수태산을 경계로 북쪽은 상리면, 동쪽은 삼산면에 접하여 있고 마을앞의 수양천 주변에 형성된 들판은 경지정리가 된 비옥한 토질로 수양천 상류에 수양저수지가 있어 수원은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 수양리 지석묘(洙陽里 支石墓) : 수양리에 있었던 지석묘로 지금은 훼손되어 흔적만 남아 있다.
◎ 솔대백(率臺栢) 일화 : 현 효대마을의 옛날 마을 이름으로, 수양리 점촌마을에 전주최씨 한전(瀚全)이라는 선비가 조선조 경종 때(서기 1720년경)에 무과에 급제하여 가리포첨사(加里浦僉使)로 부임하면서 본가에 들리 때 군졸이 수행하여 영기(令旗)를 세운곳이라 해서 ‘솔대백’이라고 불렀는데 그후 행정구역의 명칭변경에 따라 효대마을로 변경되었다는 것이다.
2. 용태리(龍台里)
용태리는 1018년에 고성이 고성현으로 개칭될 당시 하일운면의 가룡(駕龍)·삼태(三台)·하화대(下禾大)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을 통·폐합 조정하면서 하일면의 가룡과 삼태를 병합하여 가룡의 용(龍)자와 삼태의 태(台)자를 따서 용태리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행정리로 용태·가룡의 2개 마을이 있다.
▣ 용태(龍台)
용태마을은 용태리의 중심마을로 옛날 하일운면 당시 가룡과 삼태마을을 합하여 용태리라 하였으며 1986년 6월 30일 행정구역 조정시 가룡을 분동하면서 본마을을 용태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자연마을로 삼태(三台)·중촌·하중촌 마을이 있다.
◎ 마을의 형성
마을이 생긴 연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고려현종 때(1080년) 하일운면의 가룡과 삼태로 존치한 것으로 보아 주민이 거주하게 된 것은 그 이전으로 추정되며 현재 거주민의 성씨는 전주최씨, 김녕김씨, 김해김씨, 고성이씨, 밀양박씨, 파평윤씨 등 18여 성씨가 살고 있다.
◎ 마을의 지세
마을 남쪽은 자란만에 임하고 있으며 마을 동쪽의 산성산(해발 150m)은 임진왜란때 축조한 것으로 전하는 산성(山城:둘레 약 500m)의 성지가 있는 산으로 삼산면(장치리)과 경계를 하고 있으며 산봉우리에 임진왜란 때에 기를 꽂았다는 ‘깃대먼당’이 있다.
마을 내에는 수양천이 가룡마을과 경계를 지어 흐르고 있으며 수양천변의 농경지는 경지정리가 되어 있고 지방도(고성-삼천포항)가 마을을 통과하고 있어 교통이 편리한 마을이다.
▣가룡(加龍)
가룡마을은 고려현종 9년에 고성이 고성현으로 개칭될 당시 하일운면(현 하일면)의 가룡으로 존치한 마을로 마을명을 한자로 가룡(駕龍·伽龍·加龍)으로 썼으나 지금은 가룡(加龍)으로 통일하여 쓰고 있다. 그뒤 본마을은 1986년 6월 30일자(고성군 조례 제961호)로 용태리에서 분동된 마을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을의 형성
구전에 의하면 진주지역에서 피난하여 현 상리면 ‘모종골’로 온 주민이 씨족 싸움에 밀리어 이 곳에서 산능선을 타고 남으로 내려와 지금의 용태리 가룡마을에 정착하여 살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으며 현재 거주민의 성씨는 함안조씨, 경주이씨, 분성배씨, 성주배씨, 능주구씨, 남원양씨 등 10여 성씨가 마을을 형성해 거주하고 있다.
◎ 마을의 지세
마을 북쪽은 수태산을 뒤로 하여 사방으로 둘러싸인 산세가 ‘소멍에’ 같다 하여 멍에 ‘가’(伽)자를 써서 가룡이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전하고 있으며 마을 앞은 자란도를 향하여 자란만에 면하고 있어 기후가 온화하며 수양천 주변에 현성된 농경지는 경지정리가 된 비옥한 토질로 수원은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 사책지(射柵地)
가룡포 사책지(駕龍浦 射柵地)는 용태리 가룡개에 있는 사책지로 임진왜란 때 고성현이 자란도로 옮겼다가 갑오년 봄에 다시 가룡포로 옮겼는데 이곳에 그 흔적이 사책지로 남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