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중간이 두동강난 것 같은 형세로 길게 동남으로 뻗어 베를 깔아 놓은 것 같아 포교라 불러
5. 두포리(豆布里)
두포리는 본래 고려 현종 9년(1018년)에 고성현으로 개창될 때 상남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두모치, 포교, 장지동, 용호동 일부를 병합해 두모치(豆毛峙)와 포교(布橋)마을의 이름을 따서 두포리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행정리로 장지, 두모, 포교, 와도, 덕산의 5개 마을이 있다.
▣ 장지(長支)
◎ 동명의 유래
장지마을의 동명은 임진왜란 창의공신으로 군령포(軍令浦) 앞바다에 침입한 왜적을 농군을 동원하여 무수히 섬멸하고 충무공 이순신 장군 진중에 참전하여 전공을 세워 원종삼등(原從三等)에 녹훈된 이덕상(李德祥) (쇠스랑장군)의 이름을 딴 덕산개와 논 아래에 있다 하여 논왈리, 군인이 주둔한 군령포의 3개 자연마을을 근래 행정구역 개편시 병합하여 장지마을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을의 형성
마을의 생긴 연대는 오래된 문중의 선산을 참고하여 추정하면 약 400여 년 전에 고성이씨와 진양정씨가 입촌해 살기 시작하여 지금은 밀양박씨, 진양강씨 등 10여 성씨가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 사적 및 기타
◇ 두포리 봉수지(豆布里 烽燧址) : 두포리 장지마을 뒷산 해발 254.7m의 봉화산에 주위 100여 m의 정상부에 위치한 봉수지로서 통영 도산면의 봉수대와 연결되고 있었다.(지금은 대부분 훼손되고 흔적만 남아 있다)
◇ 군령포(軍令浦) : 임진왜란 당시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아군의 함대가 이곳에 정박하고 군사기지로 이용되었다 하여 군령포로 오늘날까지 전하여 지고 있다.
◇ 영송재(迎送峙) : 장지마을에서 병산리로 넘어가는 재(峙)로서 옛날 장군이나 영급(令級)이 다른 곳으로 전출돼 갈 때 이 고개에서 가족이나 군인들이 환송하였다 하여 영송재라 부르다가 지금은 영선재라 부르고 있다.
▣ 두모(豆毛)
두모마을의 동명은 두포리 중심지에 위치한 마을 입구의 작은 고개를 ‘두모치(豆毛峙)’라 하고, 해변에 위치한 아랫땀의 포구를 ‘콩갯마을(豆逋)’이라 부르고 있어 동명을 두모치 또는 두모라 하였다고 한다.
◎ 마을의 형성
마을이 형성된 연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고려 현종 9년(1018년)에 상남면의 두모치(豆毛峙) 마을로 존치한 바 있어 이 때부터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현재 거주민의 성씨는 김해김씨, 진양정씨, 평택임씨, 고성박씨, 경주이씨, 나주정씨, 능주구씨, 창원황씨, 성산김씨, 진양강씨, 전주이씨 등 10여 성씨가 살고 있다.
◎ 지명일화
◇ 신선골(神仙谷) : 윗땀 안골에 있는 뒷 산골을 ‘신선골’이라 하는데 옛날 임진왜란 때 이곳에서 피난한 사람은 모두 살아남았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으며, 6·25사변 때도 이 곳에서 많은 피난민들이 피신하였으나 한 사람도 피해를 입은 사람은 없다고 한다.
◇ 마을 안산의 ‘농우(農牛)형상’ : 마을 앞의 안산은 천우(天牛)가 물을 마시려고 내려와 멍에를 앞에 벗어놓고 물을 마시다가 천지개벽으로 그대로 산으로 굳어 버렸다는 전설로 이 천우가 두모마을의 쌀 농사를 해마다 풍작으로 보장해 준다고 하고 있다.
▣ 포교(布橋)
◎ 동명의 유래
포교마을의 동명은 마을 중간이 두동강난 것 같은 형세로 길게 동남으로 뻗어 베를 깔아 놓은 형상과 같다하여 베 포(布) 자와 다리 교(橋) 자를 따서 포교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버드래, 눅개, 모래치, 맷땀, 박골, 와도(누운섬)의 6개 자연마을로 형성되어 있었으나 1962년 9월 1일자로 눅개, 모래치, 박골, 맷땀의 4개 자연마을이 덕산(德山)의 행정마을로 분동되었고 1988년 1월 1일자로 와도(臥島)가 분동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을의 형성
포교마을의 형성 연대는 경주이씨가 맨 먼저 정착하고 이어 진양강씨가 입촌해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다. 고려 현종 9년(1018년)에 고성현으로 개칭되면서 상남면에 속하였다가 1914년 3월 1일자(조선총독부 경상남도령 제2호)로 상서·상남면이 삼산면으로 병합되어 삼산면 두포리 포교마을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을의 지세
포교마을은 고성읍에서 서남쪽으로 16㎞ 떨어진 삼면이 바다(자란만)로 둘러싸인 해안마을로 마을 중간이 두동강난 것 같은 베틀 형상을 하고 있으며 동남쪽 해상에 있는 팥섬은 베짜는 ‘북’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남서쪽의 ‘도투마리’ 여는 베를 감는 ‘도투마리’ 같으며 그 옆에 있는 여는 ‘철기신’과 같다하여 ‘밭줄여’라 부르고 있다.
북서쪽에 있는 ‘물래도’는 베짜는 실을 감는 ‘물래’와 같다하여 ‘물래섬’이라 부르고 있다. 농경지는 경사지에 밭이 조금 있을 정도이고 마을 주민 전체가 어업에 종사하는 전형적인 어촌마을이다.
◎ 마을의 전설
옛날 포교마을에 어느 지관이 지나면서 선녀가 베를 짜는 형상으로 이곳에 묘를 쓰면 자손이 번창하고 가문이 융성해지는 명당이라 하여 경주이씨가 조상의 묘를 썼다. 그 후 일제 강점기 때 용호마을(에랑개)에 거주하는 ‘김하여’라는 자가 경주이씨 묘 위에 관권(官權)을 이용하여 반대를 무릅쓰고 묘를 이장하자 한 달만에 김하여의 아들이 나병에 걸려 오랫동안 고생을 하다 죽었다. 그 후 김하여는 밤중에 몰래 조상의 묘를 이장해 가고 통영 지방으로 이사해갔다는 명당에 대한 전설이 있다.
▣ 와도(臥島)
와도(누운섬)마을은 1987년 12월 24일자 고성군 조례 제1002호로 두포리(豆布里) 포교마을에서 분동으로 독립된 행정마을로 전설에 의하면 지구가 생성될 때 암소 한 마리가 누워 잠을 자다가 깨어나지 못하고 섬이 되었다고 하여 누운섬(臥島)으로 불리어 졌다고 하며 인접에 있는 대호도(大虎島)(윗대호도, 아랫대호도)도 그 때 한쌍의 호랑이가 살았다 하여 대호도로 불리워지고 있다고 전한다.
◎ 마을의 형성(形成)
1856년 영양천씨의 2호가 맨 먼저 입주해 정착하였으며 1915년경에는 일본인(日本人· 三本伊三郞)이 입주해 인근 대호도와 소치섬 문래섬 등지에서 장어와 잡어를 어획가공하여(오뎅) 일본으로 가져갔다. 해방 후에는 각 처에서 모여든 인구가 30여 세대에 80여 명이나 거주하다 지금은 삼산초등학교 와도분교도 폐교되고 몇 세대만이 마을을 지키고 있다.
◎ 마을의 지세
와도마을은 고성읍 남포항에서 7해리, 포교마을에서 1해리 떨어진 자란만의 청정해역에 있는 하나의 섬으로된 지형으로써 섬 전체의 면적은 17㏊(전:4.7, 임야:12, 대지:0.3㏊)로 남서쪽에 한려수도를 끼고 있는 수려한 섬마을이다.
▣ 덕산(德山)
덕산마을은 1938년 10월 1일 고성군의 행정구역 확정시 두포리 포교마을에 속하여 있었으나 1962년 7월 1일자로 눅개, 모래치, 박골, 맷땀을 합하여 덕산마을(행정리)로 하여 분동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을의 형성
덕산마을의 생긴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약400년 전 임진왜란 후에 파평윤씨(尹氏)가 처음 입주하다. 그 후에 진양강씨, 능주구씨, 경주이씨가 입주 정착하여 원시적인 농경생활과 어획으로 마을을 형성하였다. 일제강점기 때에는 동광의 채광(대덕광산)과 수산소득으로 생계를 유지하여 오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을의 지세
고성읍에서 15㎞ 떨어진 해안에 위치한 4개의 자연마을(눅개, 모래치, 박골, 맷땀)로 마을 위에는 든바위산이 둘러싸여 있고 앞은 자란만의 넓은 바다가 펼쳐져 있는 전형적인 어촌마을로 기후가 온화하여 살기 좋은 마을이다.
◎지명 일화
◇ 눅개마을 : 먼 옛날 육지의 심한 가뭄으로 흉년이 계속되어 도저히 생계를 유지할 수 없게 된 마을주민이 바닷가로 가면 고기라도 잡아 먹을 수 있다는 막연한 희망을 가지고 이 곳을 찾아오던 중 새벽에 고개를 넘어오니 눈 앞에 바다가 보이고 고개 바로 밑에 엄청나게 큰 개가 누워있는 것을 보고는 무서워서 꼼짝도 못하고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차츰 날이 밝아 자세히 살펴보니 산의 형상이 마치 커다란 개가 누워 있는 것처럼 보인 것이다.
그래서 의논을 하였는데 몇 사람은 저렇게 큰개가 누워있는 곳이라 무서워서 살 수 없으니 다른 곳으로 가보자하고 또 다른 사람은 고생을 하고 이곳까지 찾아온 곳이니 정착하여 살자고 했다.
이렇게 결정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일행 중 제일 나이가 많은 노인 한 분이 개의 형상을 한 산이 우리를 지켜줄 것이니 이 곳에 정착하자고 설득을 하여 살게 되었다고 하여 ‘누운개’라 하였는데 어음이 차츰 변하여 ‘눅개’라고 지금 부르고 있다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