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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앞 숲에서 황새들이 떼를 지어 집을 짓고 살았던 봉림마을은 지금도 여름이면 황새가 집을 짓고 살기 하지만 극소수에 불과하다.
현재 쌀과 보리·한우·양계·상황버섯·시금치 등을 재배해 풍요로운 삶을 영위하고 있는 봉림마을의 화기애애한 이야기를 전하고자 한다.
# 유쾌한 봉림댁 할머니들
맑은 날씨로 온통 마을은 초록빛으로 더없이 쾌청해 보인다.
기자의 레이더에 봉림마을 노인회관을 발견하고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가 ‘안녕하세요~ 할머니들’ 먼저 인사를 하자 부엌이 달린 좁은 방에 10여 명의 할머니들이 반갑게 미소를 지으신다.
“우리 마을 소개 하러 왔는교?”, “사진도 찍는가? 집에서 좀 치장하고 와야 하는디”라며 초반부터 시작된 웃음은 끊이지 않았다.
김봉녀(67) 할머니는 “오늘 요기서 비빔밥을 해먹었는디 집에서 해먹는 것보다 여기서 먹고 수다 떠는 게 정말 좋아, 농촌에서 이 재미로 사는 게 낙이지”하며 수줍게 미소를 지으신다.
최봉화 할머니는 “20년 전 우리 마을에 자식도 없이 살다 돌아가신 황성래 할머니라고 계셨어. 자식이 있어도 제대로 장례를 못 치러 마을 부녀회가 했어. 또 마을주민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할머니 제사를 마을회관에서 성대하게 치러주고 있을 정도니 우리 마을은 형제·자매나 다름없지”라는 말씀에 기자의 마음이 절로 훈훈해진다.
마침 김금순(82) 할머니가 몸이 편찮으셔서 잠시 자리를 누우시자 모인 할머니들 중 최연소인 김숙자(70) 할머니가 인간문화재급 재롱을 떨기도 했다. 김금순 할머니는 그 모습이 기특했던지 벌떡 일어나 미소로 회답하는 모습에 다른 할머니들 또한 얼굴에 미소가 자연스레 번졌다.
# 인물의 고장 봉림마을
마을 뒤편에 우뚝 솟은 거류산이 우람하게 기상을 뽐내며 마을의 역사를 간직하듯 그 정기를 뿌리 내려 이조시대에는 장원급제 진사의 인물이 태어나기도 했다.
또 근세기에는 천석 이상 하는 대부자와 면장 2명, 부장판사 1명, 박사 4명, 서기관 이상 공직자가 10여 명이 배출되기도 한 봉림마을은 인물의 고장이기도 하다.
이러한 인물의 고장 이외에도 김해용 할아버지는 “1960년대에는 재건국민운동 청년회가 조직되어 저축 장려 시범 청년회로 저축중앙회(그 당시)로부터 표창을 받기도 했어. 70년대엔 새마을에서 우수 마을로 선정돼 대통령 하사금을 받아 공동 작업장 공동 육묘장을 설치해서 마을 소득을 증대했지”라며 자랑하신다.
또 1990년대에는 경상남도 지정 우수마을로 선정되어 자금지원을 받아 고소득 작물 개발에 박차를 가하기도 했다. 그리고 현재 생명환경농업 실천마을로 선정된 봉림마을은 새로 개발된 점파식 이식과 무농약 우렁이 농법을 실천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
# 옛 선조들의 혼과 자취
마을 곳곳에는 조선 초·중엽 전주이씨(全州李氏), 창원황씨(昌原黃氏), 안동김씨(安東金氏), 인동장씨(仁同張氏), 영암김씨(靈巖金氏) 등의 공적을 기리는 비가 세워져 있다.
세월의 길이만큼 겉모습은 퇴색했지만 비석에 새겨진 옛 선조들의 혼과 자취는 후손들의 가슴에 선명하다.
특히 이날 묘비에 대해 하나하나 자세히 설명해 주시는 최명화(74)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빠르게 변하는 지금에도 역사와 조화의 맥을 이으려는 봉림마을의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