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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읍성과 고성왜성의 고찰 <2편>고성총쇄록에 고성왜성 죽도 동쪽 성터 철옹성 기록 남아

세종실록지리지 기록, 성 둘레 285보 1천710척
하기호고성문화원향토사연구소장 기자 / kn-kosung@newsn.com입력 : 2008년 05월 09일
ⓒ 고성신문

고성왜성 1597년 정유재란 때 쌓은 8개 왜성 중 하나












3. 고성읍성(固城邑城)의 축성(築城)


우리나라는 외세(外勢)의 침략(侵略)이 역사(歷史)있은 이후 9백여 회가 된다고 하는데 고려 말(高麗末), 조선 초(朝鮮初)에는 왜적(倭敵)의 침입이 빈번하였다.


 


특히 충정왕(忠定王) 2년으로부터 공양왕(恭讓王)4년 까지 약 40여 년 동안 침범(侵犯)이 없는 해가 없었으며 특히 공민왕 (恭愍王)과 우왕(禑王) 때에 왜구(倭寇)의 침화(侵禍)가 가장 심했으며 지역적으로는 경상(慶尙), 전라(全羅), 양광도(揚廣道)가 특히 심하였다.


 


그리하여 공민왕(恭愍王)대에는 연해읍성(沿海邑城)의 축조에 구체적으로 거론하였고, 우왕(禑王)대에는 산성(山城)수축을 촉구하고 있다.


 


고려시대 후기에 축조된 연해읍성(沿海邑城)이 심정보(沈正輔) <한국읍성(韓國邑城)의 연구(硏究)>에 의하면 29개소에 달하고 있는데 고성읍성(固城邑城)은 아직 그 명단에는 없다.


 


조선 초 세종 24 7월에 왕은 영의정(領議政) 황희(黃喜) 등 대신들을 불러 모아놓고 국경경비대책(國境警備對策)을 의논하는데, 「경상도(慶尙道)의 사천(泗川), 고성(固城), 영해(寧海)는 가장 바다에 가까운 곳으로 방어대책이 긴급(緊急)한데 읍성을 축조(築造)하지 않았으니 마땅히 급()히 축조하여야 한다」고 하였다.(世宗實錄 券97, 24년 七月 戊寅條)


 


이 때까지는 고성(固城)에 읍성(邑城)의 축조(築造)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그 후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志)> 에서 읍성 무진석축(邑城 戊辰 石築)이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읍성이 완성된 것은 무진년(戊辰年)인 세종 30 (1448)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고문헌(古文獻)의 기록에 의하면 『문종실록(文宗實錄)(1450)에는 원년(元年) 9월 초에 고성현 읍성(固城縣邑城) 둘레() 3,011()이며,『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에는 둘레() 3,524() 이라고 했으며 그 이후 지리지나 읍지의 모든 기록에서는 성의 둘레가 3,524() 으로 되어 있다.


 


, 문종(文宗) 때에 3,011() 의 성()이 중종 때에는 3,524() 으로 확장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1454)에서는 성의 둘레가 285()로 약 1,710()으로 기록 되어 있으나 자세한 것은 밝혀진 것이 없다.


1914년에 작성된 성내동지적도(城內洞地籍圖)에 의하면 고성읍성(固城邑城)의 성터가 있었던 지적(地籍)의 도면이 그대로 그려져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3,524()의 성 둘레는 포백척(布帛尺) 46.73 cm로 환산하면 약 1,646m가 된다.


고성읍성(固城邑城)의 지적도(地籍圖)를 계측기(計測器)로 계측한 성 둘레는 1,644m로 나타남으로서 실제의 성 둘레의 길이는 문헌에서 나타난 성 둘레와 거의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지금 현재 성 둘레가 3,524()의 고성읍성은 많이 훼손 되었으나 아직도 몇 곳에 그 잔존 부분이 남아 있다.


『문종실록(文宗實錄)』에 의하면 고성읍성(固城邑城)은 둘레() 3,011()이고 높이() 12()이며 여장(女墻) 2()이고, 적대(敵臺) 12개소이고 성내 우물이 4개가 있다(城內井四)고 기록 되어 있다.


 


여장(女墻)은 치첩(雉堞)이라고도 하며 고어로 ‘성가퀴’라고도 하는데 성체의 상부에 설치하는 적()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고 총구를 통해 적()을 공격하기 위한 구조물로서 575개가 설치되었다고 한다.


 


적대(敵臺)는 성문(城門) 좌우(左右)에 설치한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시설물로서 성체(城體)에서 방형(方形)으로 돌출된 성()의 시설물을 치()라고 하는데 이 치()의 일종에 속하며 성문 좌우와 성()의 요소에 치()를 설치하여 모두 12개 정도가 설치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1914년의 고성읍성 지적도에서 타원형인 읍성에서 밖으로 네모나게 돌출된 부분이 12개가 있는 것과 거의 일치한다.


 


『문종실록(文宗實錄)』에서 문삼유옹성(門三有甕城)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3개의 문 앞에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시설인 옹성(甕城)으로서 대개 성문 앞에 반원형(半圓形)으로 설치한 2중 성벽(二重城壁)으로 문마다 설치되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성문에는 문루(門樓)를 설치하고 고성읍성(固城邑城)의 남문루(南門樓)를 안청루(晏樓)라 하고 그 후 제남루(濟南樓)라고도 하였다. 안청루(晏樓)에 관한 김수온(金守溫)의 시()가 전해 오고 있다.


 


4. 고성의 왜성(倭城)


고성읍 수남리(水南里)에 수외(水外)마을과 남외(南外)마을 사이에 약간 높은 구릉(丘陵)이 있는데 이 구릉(丘陵)을 중심으로 고성읍성(固城邑城)의 남쪽 성벽에 붙여서 남쪽으로 좁고 길게 석축성(石築城)을 쌓았으며 지금도 그 잔존 성벽이 상당 부분 남아 있다.


 


이 왜성(倭城)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났을 때 명()나라의 지원병이 참전하게 된 이후 다소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고 있을 때 1592년부터 일본군은 울산에서부터 남해안을 거쳐 전남 순천(順天)까지에 걸쳐 한반도에서 일본이 장기주둔을 목적으로 바다 가까이에 임진역(壬辰役)이라 하여 18개의 왜성(倭城)을 축조(築造)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시에도 정유역(丁酉役)이라 하여 신축(新築) 8()과 보수한 3()을 합하여 11개 성()을 축조한 바 있으며, 모두 29개의 왜성(倭城)이 축조된 셈이다.


고성(固城)의 왜성(倭城)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쌓은 8()중의 하나이다.


 


이형석(李泂錫) 저「壬辰戰亂史」에 의하면 고성왜성(固城倭城)을 ‘고성성(固城城)’이라 하였고 일본 부장(部將) 킷카와 히로이에(吉川廣家) 등에 의해 고성군 고성읍 남쪽 고지(高地)에 축조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육군 제6128부대에서 1984년에 간행된 『향토수호사』 경상남도편에 의하면 고성왜성(固城倭城) 소재지는 고성읍 수남동이며 축성자는 킷카와 히로이에(吉川廣家), 토오도오 타카도라(堂高虎)로 되어 있다.


 


부산대학교 한일문화연구소(韓日文化硏究所)(196112)에서 간행한 「경남의 왜성지(慶南의 倭城址)」에 관한 논문(論文)에서 “고성성(固城城)은 고성읍의 남방에 두출(斗出)한 소고지(小高地)에 축조한 성()으로 한편은 한국성(韓國城)의 위벽(圍壁)에 접하였다”고 되어 있다.


 


오횡묵(吳宖默) 부사(府使)의 「고성총쇄록(固城叢鎖錄)에 의하면 죽도(竹島)의 동쪽에 옛 성터(城堞)일부가 있는데 곧 이른바 철옹성(鐵甕城)이다.


 


여러 사람들에게 물어보아도 역시 어느 시대에 축성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고 하였으며 읍성(邑城)과 철옹성(鐵甕城)은 분리 된 성이며 여기에서 철옹성은 곧 고성왜성(固城倭城)을 말하고 있다.

하기호고성문화원향토사연구소장 기자 / kn-kosung@newsn.com입력 : 2008년 05월 0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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