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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읍성과 고성왜성의 고찰 <1편>

소가야 왕국 터 고성읍성 안에 위치했다는 전설 전해져
하기호고성문화원향토사연구소장 기자 / kn-kosung@newsn.com입력 : 2008년 05월 02일
ⓒ 고성신문

고성읍성 1곳 나머지 16개 산성 외성 1곳으로 축조돼 져


어시정 창거리정 은성정 옥천정 등 4개 우물 식수원 사용 



1.
머리말












우리 고성지방에 성곽(城郭)은 현재까지 조사된 바에 의하면 17개의 성곽(城郭)이 조사되고 있으며 (그중 읍성(邑城) 1개소이고 나머지는 산성(山城)이다) 왜성(倭城)까지 합하면 18개의 성()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이 성곽(城郭)에 대한 조사가 미력하기 때문에 정확한 실태를 파악하기가 어렵고, 체계화 되지도 못하고 있다. 한편 현재 있는 성곽(城郭)에 대한 잘못된 견해도 있어서 이를 바르게 밝혀서 정립할 필요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가야시대 (또는 삼국시대)의 성곽(城郭)으로 파악되고 있는 것은 4개 정도로 알려지고 있으나 2004년도에 경남고고학연구소에서 거류산성(巨流山城)을 시굴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가야시대의 성곽이 아니고 신라말(新羅末)또는 고려초(高麗初)의 성곽으로 밝혀진 바 있다.


 


각 연구기관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소가야(小伽耶)시대의 성곽으로는 만림산(萬臨山 또는 萬年山)토성과 남산토성(南山土城)정도로 밝혀지고 있다.


 


고성읍성(固城邑城)이 있는 고성읍의 중심지에는 소가야(小伽耶)시대의 성곽(城郭)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으나 각 연구기관에서 발굴 또는 지표조사를 실시한 결과 소가야 (小伽耶)시대의 성곽은 아직까지는 발견되지 아니 하였다.


 


지금 남아있는 고성 읍 중심부에 위치한 성곽(城郭)은 고성읍성(固城邑城)으로 세종30(1448)에 축조(築造)된 성이며, 고성왜성(固城矮城)은 정유재란(丁酉再亂)때 일본(日本)에 의해 축조(築造)된 왜성(倭城)이다.


 


한편 「고성성(固城城)」이라는 말은 일본(日本)이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에 고성왜성(固城倭城)을 축조하고 그 이름을 「고성성(固城城)이라 하였다.


 


이 고성성(固城城)과 고성읍성(固城邑城)을 혼동해 사용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본 논문에서는 고성읍성(固城邑城)에 대한 개요(槪要)를 먼저 기술하고, 고성읍성(固城邑城)의 축성(築城)경위와 고성왜성(固城倭城)에 대하여 연구기관에서 조사한 내용을 살펴보고 마지막으로 「고성성(固城城)이라는 이름에 대한 내용과 고성읍성(固城邑城)을 구분하여 기술하고자 한다.


 


2. 고성읍성(固城邑城)의 개요(槪要)













고성읍성(固城邑城)은 평지에 축조된 타원형의 석축성(石築城)이다.


 


읍성(邑城)의 안쪽은 성내리(城內里)라하고 읍성(邑城)의 바깥은 동쪽이 동외리(東外里)이고 서쪽과 북쪽이 서외리(西外里)이고 남쪽이 수남리(水南里)로 읍성을 경계로 리, 동이 서로 인접해 있다.


 


고성읍성(固城邑城)은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 89(1983 12 10)로 지정되어 있으며, 고성읍성(固城邑城)은 그 지리적 조건이 남쪽으로는 고성만에 연접해 있고 북동쪽으로는 당항만에, 동쪽으로는 당동만에 연접해서 옛날부터 해상교통이 편리했던 곳이다.


 


읍성의 서쪽은 지금의 서외리 5거리에 서문(西門)이 있었던 곳으로 서문(西門)밖을 옛사람들은 “서음 밖”이라 하였는데 지금 법정 리 동 명이 서외리(西外里)이다. 읍성의 동쪽은 지금의 읍사무소 도로변에 동문(東門)이 있었던 곳으로 동문 밖을 옛사람들은 “동음 밖”이라 말을 하여 왔었는데 지금의 법정 리 동명이 동외리(東外里)이다. 읍성의 남쪽은 남문(南門)이 있었던 곳으로 남문 밖을 옛사람들은 “나음 밖”이라고 발음하여 왔다. 지금은 수남리(水南里) 남외(南外)마을이 있다. 이 남외(南外)마을은 지금의 군청 뒤에서 수남리 낮은 곳의 마을에 해당한다.


 


남쪽의 남문에서 약간 동쪽으로 떨어진 곳인 지금 수협에서 어시장 서쪽 길을 따라 구암 마을(옛 읍전포) 로 내려가는 경사진 곳에 수문(水門)이 있었다고 하며 이 수문(水門)밖을 옛 사람들은 “수음 밖”이라 불러 왔으며 지금의 수남리(水南里) 수외(水外)마을이 있다.


 


고성읍성(固城邑城)의 남쪽 성벽을 접하여 다소 좁은 남쪽 구릉(丘陵)지대에는 남쪽으로 돌출한 좁다랗게 왜성(倭城)이 조성되어 있고 지금도 그 왜성(倭城)의 성벽이 많이 남아있다.


 


읍성(邑城)이 축조되었던 이곳은 소가야국(小伽耶國)의 치소(治所)가 있었던 고성읍의 중심지로 전설에 의하면 소가야국의 왕궁 터가 이 성내에 위치하였다고 전하며 소가야(小伽耶)의 성터(城址)가 있었다고 전하여 오고 있다.


 


그러나 각 연구기관에서 시굴 및 발굴 조사한 과정이나 결과에서 소가야(小伽耶)시대의 성터(城址)는 아직도 밝혀진 바가 없다. 현재 읍성(邑城)은 분명히 조선시대(朝鮮時代)에 축조되었고, 남쪽의 왜성은 정유재란 시에 축조되었다.


 


읍성(邑城)안의 지금 군청이 있는 자리는 조선시대 관청인 아사(衙舍)가 있었고, 군청 본건물이 있는 자리는 남쪽을 바라보는 (子坐라고 함) 지방관의 수령(守令)의 집무실이 있었던 동헌(東軒)건물이 있었던 곳이다.


 


주변에는 많은 관청건물과 부속건물들이 있었다. 성안의 동쪽에서 동헌(東軒)이나 아사(衙舍)로 들어가려면 입구에 내삼문(內三門)으로 들어가야 한다.


 


동헌(東軒)의 북동쪽으로는 객사(客舍)가 있었다. 객사(客舍)는 궐패(闕牌)를 모시어두고, 임금의 명을 받들고 내려오는 벼슬아치를 대접하고 묵게 하는 집이며, 또한 일반관리들도 객사에서 묵게 했던 곳으로 고을마다 두고 있었다.


 


객사(客舍)북쪽에는 연못이 있었고 1900년 경자(庚子)년에 객사(客舍)에 불(火災)이 났었고 당시 조유승(曹有丞)군수는 객사 화재로 일시 해직 당하였고 그 후로 얼마 지나지 않아 일제(日帝)의 강점(强占)하에 들어감으로써 객사(客舍)건물은 다시는 재건하지 못하였고 객사(客舍)뒤에 있었던 못()도 메워져서 그 곳 넓은 터에 시장(市場) (5日場)이 형성되었다.


 


고성읍성(固城邑城)은 조선 중종(中宗)때 간행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에 의하면 그 둘레가 3,524()이며 높이가 15(), 읍성 안에 4개의 우물과 1개의 못()이 있다고 되어있다. 그러나 가뭄 때에는 용수가 귀하기 때문에 영조 때에 와서 다시 못을 하나 더 판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그 위치는 지금 군청 뒷마당 또는 그 뒤쪽으로 추정하고 있다.


 


우물은 4개 처가 있는데 지금 천주교회 앞 학우사 (學友社)옆에 창거리정 (倉巨里井)이 있다. 읍성 서북쪽 편에는 창고(倉庫)가 있었는데 이 창고(司倉, 西庫, 東庫)로 통하는 골목길이 지금 학우사 뒤로 통하는 길로서 옛 사람들은 이 골목길을“창거리”라고 하였다.


 


이 창거리에 있는 우물 이름이 “창거리 새미(倉巨里井)”이다. 고성읍사무소 서편으로 고성교회 동편으로 골목길이 있는데 중간에 우물이 하나 있다. 이 우물은 은성정(隱城井)이라고 하는데 옛 사람들은 “숨은 새미”라고 하였다. 또 하나의 우물은 읍성의 서남쪽 끝에 옛날 옥골이라는 마을로 지금은 신기 - 남포간 새 도로가 개설 되어 남서쪽 성벽 가까이에 “옥천정(玉泉井)”이라는 우물이 하나 있다.


 


또 하나는 어시장(魚市場)안에 우물이 하나있는데 “어시정(魚市井)”이라 부른다. 이렇게 4개의 우물이 읍성(邑城)안에 있었다.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志)> 에 의하면 읍성 안에 우물이 4개가 있는데 3개의 우물은 동절기에 잘 마르나 하나는 겨울과 여름에도 잘 마르지 않는다 (井泉四內三冬節渴 有軍倉 一冬夏不渴)고 기록 되어 있다.


 


 성문(城門)의 이름은 남문(南門)은 철성남문(鐵城南門)이라 하고 서문(西門)은 고자서문(古自西門)이라하며, 동문(東門)은 진동문(鎭東門)이라 하였다. 북문(北門)은 다른 여러 고지도(古地圖)에는 없으나 1872년의 <조선후기지방지도(朝鮮後期地方地圖)> 의 경상도 지도 중「고성부지도(固城府地圖)」는 북문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오횡묵(吳宖默)부사의 <고성총쇄록(固城叢錄)>에 의하면 북문(北門)은 유허(遺墟)만 있은 지 이미 오래 되었다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19세기 말에 설치되었다가 곧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고성읍 안에 시설물에 관한 내용은 「고성읍성의 조사연구(固城邑城의 調査硏究)」「고성향토사연구회(固城鄕土使硏究會)(2000)」의 연구물을 참고 바란다.


 


현재 고성읍성의 외관상 실태는 읍성내부와 체성 상부에는 모두 민가나 관공서가 자리 하면서 원상을 많이 훼손시켜 육안으로 읍성을 식별하기란 매우 어렵다. 그러나 1914년도에 작성한 고성읍성의 지적도(地籍圖)를 참고로 하여 민가 사이로 조사하면 부분적인 성벽이 아직도 남아있는 곳이 있다.


 


동문(東門)이 있었던 읍사무소의 동쪽 담벽과 서외리 옥골 주변의 동아대학교박물관에서 발굴 조사한 새 도로가 개설된 근방과 수남리 왜성과 연결되는 지점 등에 성벽이 남아있다.


 


그러나 발굴 조사를 한다면 대부분 지하에 기단석(基壇石)이나 관계유구가 확인될 것으로 추측된다.


자료제공=하기호 고성문화원 향토사연구소

하기호고성문화원향토사연구소장 기자 / kn-kosung@newsn.com입력 : 2008년 05월 0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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