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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개인 오후다.
묵은 나팔꽃 씨를 매만지며 창가에 앉았다. 해마다 베란다 화분에 꽃씨를 가을에 거두어 봄에 심는다.
시골정서에 길들여진 탓인지 나는 잘 다듬어진 화분보다는 정원에 아무렇게나 뒤엉켜있는 꽃들이 보기 좋다. 물만 흠뻑 주어도 잘 자라는 나팔꽃은 주위의 잡초들과도 어울리기를 무척 좋아한다.
마른 나뭇가지를 꽂아두면 거기에 줄기를 뻗어 앙상한 가지에 푸른 잎과 청초한 꽃을 피운다. 터질듯 한 꽃송이 속에 눈을 맞추다보면 엄마를 알아보며 방긋거리는 갓난아이의 얼굴을 보는 듯하다.
옛날 중국에 아름다운 아내를 가진 화공이 있었는데, 마음씨 나쁜 원님이 아내를 탐냈으나 말을 듣지 않아 아내를 감옥에 가두었다. 아내를 그리워하던 화공은 그림을 한 장 그려서 아내가 갇힌 감옥에 파묻고는 죽고 말았다.
그날부터 아내의 꿈에 매일 남편이 나타나 이상하게 생각하여 창밖을 내다보니 나팔꽃이 피어 있더란다. 죽은 남편의 혼이 나팔꽃이 되었다는 전설이다. 남자의 혼이 꽃이 되었다고 하여 향기가 없다지만 보면 볼수록 풋풋한 내음이 콧속으로 스며드는 것 같다.
나는 보라색을 좋아한다. 유독 이 색깔만을 좋아한다는 것이 편견일 수도 있지만, 식물에게는 그런 편견이 문제가 되지 않아 좋다. 주는 대로 받아들이며 눈에 비치는 만큼 베푼다. 애써 속내를 읽을 필요가 없다. 강렬한 태양이 눈이 부신지, 정오가 지나면 나팔꽃은 잎을 닫아 버린다. 단 하루를 살지도 못하고 속절없이 가버린다.
가슴아파할 겨를도 없이 아침이 되면 앞 다투어 다른 봉오리들이 얼굴을 내민다. 쉴 새 없이 피고 지기를 찬바람이 들 때까지 계속한다. 추운 겨울날에도 싹이 돋아나 지켜보면, 줄기도 제대로 뻗어보지 못한 채 빼꼼히 얼굴을 내민다.
햇살 가득한 창가에서 지내다 보니 계절을 잊고 착각을 한 모양이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금방 왔다 가는 폼새가 꼭 한겨울 날 여름옷을 입고 나오는, 철모르는 아이와도 같다는 생각이 들어 한참을 들여다보고 웃었던 적이 있다.
나는 시골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진학을 위해 도시에 있는 시집간 언니네로 왔다. 꽃을 좋아했던 아버지는 시골집에 있는 꽃가지를 뽑아다가 언니집 화단에 심어주고 가셨다. 그때 나팔꽃 종자도 시집을 왔다.
부모의 울을 떠나 홀로 서기를 배우면서부터 나팔꽃과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소녀시절 개나리를 좋아했던 것과는 달리 철이 나면서 담벼락의 나팔꽃은 내게 생에 대한 강한 애착으로 다가왔다.
젊은 날 미래에 대한 막연함 때문에, 채워지지 않는 가슴속을 달래느라 무던히도 애를 태웠다. 할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다 하고 싶었다. 스스로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어 차라리 빨리 늙어버렸으면 하기도 했다.
다시 태어날 수만 있다면 정말 제대로 된 멋진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다가 덜컥 병이 났다. ‘B형급성간염’이었다. 갓 스물을 넘긴 앳된 나이에 나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이왕 병이 났으니 엄살이라도 떨어보자는 심산이었는지도 모른다. 알고 보니 한 달만 지나면 회복된다고 했다. 핑계거리가 없으니 또다시 악착스런 생활로 돌아가야 했지만 맥이 풀려 사는 것이 별 재미가 없었다.
나팔꽃은 어제의 그 꽃이 아닌 날마다 새로운 꽃을 피워냈다. 태어난 곳을 탓하지 않고 어디에서든 야무지게 줄을 타는 것을 보면서 나는 다시 꿈을 꾸었다. 나팔꽃은 덩굴식물이라 혼자서는 높이 솟아오를 수가 없다. 받쳐주는 버팀목을 타고 올라야만 넓은 세상을 관망할 수 있다. 신체적 결함을 가진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사회에서도 요구되는 일이다.
그러나 튼실한 줄이나 든든한 빽이 없어도 좌절하지 않고 땅을 벗 삼아 꽃을 피우는 모습도 우리 인생살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지는 모습에도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다. 비록 그 생명이 몇 시간 밖에 안 되지만 입을 꼭 다문 채 떨어진다. 그래서 꽃말을 속절없는 사랑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단 하루를 넘기지도 못한다고.
살다보면 가끔씩 지난 날 열병처럼 찾아왔던 사랑이 그리울 때가 있다. 그럴 땐 나팔꽃처럼 하루를 살지언정 다시 한 번 속절없는 사랑을 해 보고 싶다는 꿈을 꾼다. 덤덤해져 버린 남편은 어느 시인의 시 구절처럼 “아내는 제 남편이 고고하기를 바라는 눈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모가지가 짧다”라고 답할지도 모른다.
꽃씨를 심으면서 풋풋했던 젊은 날의 나를 떠올리며 당장이라도 꽃이 필 것 같은 기분 좋은 상상에 젖어본다.<44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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