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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모봉·바위산 ·봉화산 3곳 지명 따 ‘삼산면’

바다 위에 누운섬 와도, 나비섬 상두섬 대구섬 보리섬 토끼섬 상비사도 등 무인도 가장 많아
김화홍본지논설위원 기자 / kn-kosung@newsn.com입력 : 2008년 04월 11일
ⓒ 고성신문

장백마을 뒷산 해발 200m 장치산성서 왜군 물리친 역사의 흔적 남아…상리면 지나 ‘수리재’



9.
척정리(尺亭里)


척정리는 본래 고성군 대둔면(大屯面)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을 통폐합할 때 척곡·관동·화암·행정·가산과 구석마을을 병합해 자실(尺谷)의 척()자와 행정(杏亭)의 정()자를 따서 척정리라 하여 대가면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행정리로 화암(禾岩)과 척곡(尺谷), 관동(冠洞)마을이 있다.


 


▣ 화암(禾岩)


화암마을은 지금부터 약 350여 년 전 마을이 형성되면서 마을 이름을 ‘용암’이라 칭해 오다가 그 뒤 마을의 시냇물이 맑고 바위가 많아 경치가 좋다하여 ‘수암’으로 개칭했다가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하여 ‘화암(禾岩)’으로 변경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을의 형성


마을이 형성된 연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약 350여 년 전(1530년경)에 칠원제씨와 함안이씨 등 10여 호가 마을에 입주해 정착하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지금은 김해김씨, 전주최씨, 창원황씨, 진양정씨 등 여러 성씨가 살고 있다.


 


▣ 척곡(尺谷)


척곡마을은 원래 ‘자실’이라 불렀는데 한자의 자 척()자를 따서 척곡이라 이름해 척정리의 행정마을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을의 형성


마을이 형성된 연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조선조 초기인 서기 1,500년경에 칠원제씨가 입주하여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지금은 칠원제씨 외 김해허씨, 진양정씨 등 제씨가 마을을 형성해 살고 있다.


 


◎ 지명 일화


◇ 규와등 : 척곡 동쪽에 있는 지명으로 수천 마리의 개구리가 서식한 곳이라 한다.


◇ 서재동(書齋洞) : 성지산 산록에 서재가 있었던 곳이다.


◇ 선암(船岩) : 장전령에서 서쪽 300m 지점에 있는 바위로 바위가 배와 같이 생겼다고 ‘배바위’라고 부르고 있으며 임진왜란 때 이 바위를 진지로 하여 북쪽은 아군이 남쪽은 적군이 주둔해 총격전이 벌어져 많은 군사가 살상당한 애한의 전설이 서린 바위다.


◇ 막당곡(幕堂谷) : 백운산 동쪽에 있는 골로 임진왜란 때 의병들이 소나무 숲을 의지해 군사를 훈련시켜 불당암 국지와 함께 의거한 곳이다.


◇ 삼전곡(三傳谷) : 신촌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임진왜란 때 의병들이 모여 3회 걸쳐 조직하고 모의해 왜군을 물리친 전승지이다.


◇ 은전곡(銀傳谷) : 신촌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임진왜란 때 의병들이 매복하여 적군을 공격한 곳이다.


◎ 정자나무와 지명일화


◇ 정자나무(포구나무) : 마을 중앙에 있는 나무로 수령은 약 400년으로 추정되며 여름철 주민들의 휴식처로 보호하고 있다.


◇ 원바위() : 가동 마을로 가는 도로변에 있는 바위로 이 바위에서 옛날 선비생원들이 냇물을 바라보며 시를 읊었다고 하여 ‘원바위’라고 부르고 있다.


◇ 고조산(顧祖山) : 고조산은 조상을 돌본다는 뜻으로 지어진 이름으로 전하여 지고 있는 산이다.


◇ 식상봉(食床峯) : 마을 남촌에 있은 산봉우리로 임진왜란 때 의병들이 모여 밥을 지어 먹은 곳이다.


◇ 가장곡(假裝谷) : 척곡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임진왜란 때 전사한 병사들을 가매장한 곳이다.


 


▣ 관동(冠洞)


관동마을은 행정(杏亭)과 박달(博達)·가산(佳山)으로 형성된 마을로 일제강점기 때에는 척정2구라 칭하였는데 광복 후 고성군의 리동명칭 및 행정구역 확정시 관동으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을의 형성


마을이 형성된 연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약 350여 년 전에 진양정씨가 입촌해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됐다고 전하고 있다. 지금은 진양정씨 외 칠원제씨, 함안이씨 등 제씨가 거주하고 있다.


 


5. 삼산면(三山面)


삼산면은 소가야 때에는 어례향(魚禮鄕), 박달부곡(博達部曲), 번계현(樊溪縣)에 속하였으며 고려현종 9(1018)에 고성현으로 개칭되면서 상서면과 상남면으로 나누어져 남쪽의 상남면은 장박(長朴)·화리치(禾里峙)·삼봉포(三峯浦)·미곡(米谷)·용호(龍湖)·두모치(豆毛峙)·포교(布橋)·장지(長支) 8개 동리를 관할하였다.


 


서쪽의 상서면은 이동(梨洞)·우곡(愚谷) 당동(堂洞)·독곡(篤谷)·대안(大安)·불암(佛岩)·판운지(板雲池)·운곡(雲谷)·병산(屛山) 9개 동리를 관찰했다. 서기 1914 3 1일자 조선총독부 경상남도령 제2 호로 면을 병합할 때 상남면과 상서면을 병합하여 이 지역의 ‘갈모봉’, ‘매바위산’, ‘봉화산’의 세 산을 상징하여 삼산면으로 개칭하였다.


 


1983 2 15일자 대통령령 제11027호로 이당리와 대독리를 고성읍에 편입시켰으며 1984 8 22일자 고성군 조례 제858호로 병산리(屛山里)·두포리(豆布里)· 미룡리(米龍里)·삼봉리(三峯里)·장치리(長峙里)·판곡리(板谷里) 6개리를 형성하고 면사무소 소재지는 1990 3 22일자로 병산리에서 미룡리로 옮겼다.


 


6개 법정리에 14개 행정리 33개 반으로 군 소재지에서 12.3㎞ 서쪽에 위치하여 동쪽은 고성읍과 접하고 남쪽은 고성만과 자란만에 면하여 한려수도를 끼고 있으며 서쪽은 하일면, 북쪽은 고성읍과 상리면에 접해 있다.


 


면사무소는 미룡리 265번지에 위치하고 총면적은 34.85㎢이며 총가구는 915호에 인구는 2,345명이다. 경지면적은 600ha에 해안선은 45.3km로 바다는 양식어장이 많다. 그리고 국도와 지방도가 면내를 관통하고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농가호수는 697호에 비농가가 42호이며 어가는 118호에 1,440명의 어민이 있다. 면내의 교육기관은 초등학교 1개교, 중학교 분교 1개교가 있다. 인구밀도는 126/㎢으로 취락은 주로 자란만 및 고성만 일대의 해안과 하천변 등 경사지에 발달해 있으며 도서(島嶼)는 삼산면 두포리의 와도(유인도)와 무인도인 나비섬, 문래섬, 팥섬, 상두섬, 보리섬, 윗대구섬, 아래대구섬, 상비사도, 하비사도, 목섬, 괴암섬, 토끼섬, 밤섬 등 14개 섬이 있다. 면내의 문화재 등 사적 현황으로는 두포리 봉수지와 장치리 성지가 있다.


 


1. 장치리(長峙里)


장치리는 본래 고려현종 9(1018)에 고성현으로 개칭될 때 상남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장박(長朴)과 화리치(禾里峙)를 병합해 장치리로 하여 삼산면에 편입돼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행정리로 중촌과 장백(長栢)마을이 있다.


 


▣ 중촌(中村)


중촌마을은 1914 3 1일자 조선총독부 경상남도령 제2호로 상남·상서면이 병합돼 삼산면으로 개칭될 당시 장치리의 행정구역에 속하여 있다가 1918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장치리를 행정동리로 분동하면서 능골·달막·뒷골·중땀·들땀·솟도골의 자연마을을 묶어서 상촌과 하촌 중간에 있다하여 중촌으로 이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중촌마을을 일명 ‘수리치()’라고 하는데 마을 뒤(북쪽) 산세가 마치 수리가 날아가는 모양과 같다하여 ‘수리치’라 불렀으며 도로가 개설되기 전에는 상리면 자은리로 통하는 고개()가 수리치 고개로서 ‘수리재’라고 지금은 부르고 있다.


 


◎ 마을의 형성


중촌마을은 능골·달막·뒷골·중땀·들땀·솟도골로 구성돼 있으며 마을이 형성된 연대는 기록이 없어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본 마을에 입촌하여 오래된 문중의 선산을 참고로 하여 추정해 보면 약200여 년 전(서기 1,800년경)에 창원정씨, 현풍곽씨, 여양진씨, 함안이씨가 맨 먼저 입촌하여 살았다고 하며 현재 거주민의 성시는 전주이씨, 진양정씨 등 10여 성씨가 거주하고 있다.


 


◎ 마을의 지세


중촌마을은 뒤로 무동산과 천황산이 둘러있고 남쪽은 몽둥산이 앞을 막아 그 사이로 길게 뻗친 마을로서 마을이 길다하여 장치리라 하였다고 한다. 마을 앞은 비교적 넓은 들판이 형성돼 경지 정리가 되어 있으며 마을 윗쪽에 삼봉저수지가 1986년도에 설치되어 수원이 양호하며 마을 앞의 지방도(고성 ~ 삼천포항)와 군도(장치리 ~ 상리 부포)가 통과하고 있어 교통이 편리한 마을이다.


 


▣ 장백(長栢)


장백마을은 장치리에 속한 행정리로서 1918년 행정구역 개편시 분동돼 장백마을로 오늘에 이르고 있으나 옛날에는 이 마을에 맨 먼저 장씨가 입촌하고 그 다음에 박씨와 이씨가 입촌해 살았다고 ‘장박이’로 다고 하나 지금은 ‘장백이’로 부르고 있다.


◎ 마을의 형성


장백마을이 형성된 연대는 기록이 없어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고려 현종 9(1018)에 고성이 고성현으로 개칭될 당시 상남면의 ‘장박(長朴)’으로 존치하였던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동명의 유래를 살펴보면 장씨, 박씨, 이씨가 먼저 입촌하였고 현재 전주이씨가 집단으로 거주하게 된 것은 조선시대 이태조의 9대 손인 이경록(李慶祿)이 이 곳에 피난하여 살게되면서 후손이 번성해 지금은 약20여 호가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 마을의 지세


장백마을은 산성산(山城山) 밑에 자리잡은 마을로 산성산 정상에 옛날 왜적과 싸운 성터(장치성지 : 문화재 자료)가 지금도 남아 있으며 삼산면의 서쪽 끝에 위치해 하일면(용태리)과 경계를 하고 있다. 남쪽은 자란만의 해안을 끼고 마을 앞바다의 ‘목섬(項島)’은 만조시는 섬이 되고 간조시에는 육지와 연결되므로 ‘목섬’이라 부르고 있다. 마을의 농경지는 비옥한 편이나 수원이 없어 한 해를 입는 경우가 있어 수원확보가 마을의 숙원사업으로 되어 있다.


 


◎ 재실과 산성


◇ 재실 : 전주이씨 재실로 장백재(長栢齋)와 추모재가 각각 마을에 있다.


◇ 장치산성(長峙山城) : 장백마을의 뒷산인 산성산 해발 약 200m 정상에 옛날 왜적과 싸운 성터(장치성지 : 문화재 자료)가 지금도 남아 있다.


이 성터에서 앞바다로 멀리는 사량도와 가까이는 자란도(紫蘭島)가 바로 눈 아래 보이는 곳으로 바다로부터 침입하는 왜적을 물리친 성지로 알려져 있다.


 

김화홍본지논설위원 기자 / kn-kosung@newsn.com입력 : 2008년 04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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