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 논설위원으로 선임되고 나서 첫 글이다. 먼저 본지 논설위원으로 선임된 소회를 밝히는 것으 시작해볼까 한다.
나는 문예창작과에 재직하다 보니, 글쓰기를 가르치고 글쓰기를 하는 것이 나의 일상이어서 이 글쓰기도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이제까지 신문·잡지 등 여러 지면에 글을 써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내가 고성신문 논설위원으로 선임되어 본지에 글을 정기적으로 쓰게 된 것이 특별하게 가슴 설레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아마, 본 지면을 통해서 고성과 내가 한 몸이 되어 꾸는 꿈을 피력해 보고 싶은 벅찬 마음 때문이 아닌가 한다.
고성은 내가 태어난 곳이고, 지금도 마암면 장산에는 내가 자라고 나를 너무 끔찍이 사랑해주던 어머니의 마음의 자취가 남아 있는 집이 있다.
내가 철성고등학교 교사 노릇을 그만 두고 시간강사를 몇 년 하다가 마산 창신대학에 부임하고 나서도 내 마음은 늘 고성에 머물러 있었다.
어머니가 편찮을 때 내가 고향집에서 출·퇴근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고성장에 가서 매화, 무화과, 앵두 등의 묘목을 사서 고향집 마당에 심었다. 어머니가 한창 활동할 때에는 실상, 마당에 한가하게 과실나무를 심을 형편이 못 됐다.
어머니는 집안 곳곳에 외양간을 지어서 소를 키우고 마당에 닭을 기르며 언제나 부지런히 일만 했기 때문에 집안에 관상수 개념의 과실나무를 심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국면이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건강이 나빠지고 이전처럼 활동을 못 할 즈음에 내 자의로 마당에 과실나무도 심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기 전 약 2년 동안 어머니와 함께 고향집에 거주하며 마당에 묘목을 심으며 여유를 가지고 출·퇴근하던 그때가 내게는 참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지금 시골집 매화나무에는 꽃이 활짝 피었다. 그 꽃을 볼 때마다 어머니 생각이 간절해진다.
나는 시골집에서 진돗개도 한 마리 키웠다. 퇴근하고 나서는 진돗개를 데리고 시골집 주변을 산책하고 산행도 하고 그랬다. 맑은 공기를 마시며 시골생활을 만끽하였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나는 매우 생기 있고 의욕도 넘쳤던 것 같다.
그 시절 나는 마산으로 출·퇴근하면서 즐거운 구상을 했다. 이른바 ‘디카詩’라는 화두를 붙잡게 된 것이다. 시라는 것이 언어예술로서 항상 문자로만 표현된다고 생각해왔지만, 이런 생각을 넘어서는 새로운 사유를 했다.
시는 언어예술이면서도 언어를 넘어선다는 명제를 붙잡게 되었다. 내가 출·퇴근하면서 혹은 고향집 주변을 산책하면서 자연이나 사물에서 시적 형상을 포착한 것이다. 내가 창조한 시보다 더 시적인 자연이나 사물을 간혹 만날 때, 그것이 바로 시라는 확고한 인식을 굳혔던 것이다.
나는 시적 형상을 디카로 포착하여 그대로 문자로 옮겨서 디카사진과 문자를 결합한 디카시라는 새로운 시 장르로 명명하고, 2004년 9월에 국내 최초의 디카시집 <<고성 가도(固城 街道)>>를 출간하면서 디카시를 공론화하고, 나아가 디카시전, 디카시 잡지, 언론방송 인터뷰 등 다양한 디카시 운동을 전개했다. 처음은 혼자 미미하게 시작했지만 이제는 우리 문단이나 언론에 많은 조명을 받는 하나의 사건이 됐다.
내가 최근에 또 하나 꿈꾸는 것은 고성을 디카시의 메카로 만드는 것이다.
디카시는 고성이 고향인 내가 고성을 주된 테마로 해서 선보이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고성군과 예총의 협조를 얻어 올해 가을부터 가칭 ‘고성 디카시 페스티발’을 기획하고자 한다.
이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전국 고교생 디카시 백일장이 될 것이다. 전국의 고등학생들이 고성에 와서 디카가 내장된 휴대폰으로 고성 풍경을 찍고 곧바로 문자로 재현하여 메일로 전송하면 그날 당일 바로 시상식을 할 수 있게 된다. 이 시상식은 디카시 마니아들이 참여하는 디카시전 오프닝 행사장(고성군내)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이때 많은 문인, 독자들이 참여하여 고성은 문학 축제마당이 되면서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문화콘텐츠를 가지게 되는 행복을 누릴 것이다. 부디, 이 꿈이 꼭 실현되어 고성이 명실상부한 디카시의 메카가 되기를 간절히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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