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은 백 선생, 이 선생이고, 이 사람은 조 선생, 원장님···.”
김칠례(88) 할머니는 노인요양원 선생들의 모습을 그린 그림을 차근근 손가락으로 짚어가시며 자랑을 하신다. 그런 할머니의 모습과 그림을 보고 있노라니 형용할 수 없는 감동으로 마음이 두근거린다. 80평생 김 할머니가 지내신 세월 이야기는 기자의 마음을 먹먹하게 했다.
- 부유했던 시절
“일곱 자매 중 막내로 태어나 집안 형편이 어려워 부모님께서 나를 딸이 없는 집에 양녀로 입양시켰어. 그땐 정말 좋았지. 좋은 옷에 배부를 만큼의 양식에 학교도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해줬으니까.
그러다 양 오빠의 주선으로 한국 사람과 결혼해 한국에 오게 됐어. 그게 내 인생의 전환점이 돼버렸지. 시집에 와보니 쌀이 웬걸? 소금조차 없을 정도로 가난한 집안이었던 거야. 남편이 지게쟁이로 생활비를 충당해도 부족해서 할 수 없이 옆집, 앞집 다니면서 어눌한 한국말을 쓰며 쌀이며 소금을 동냥하고 다녔어.
그렇게 어머니와 아버님 그리고 남편에게 밥을 해먹이고 나면 정작 나는 소금으로 끼니를 때울 때도 많았어. 거기다 제사도 얼마나 많은지 1년에 10번이 넘을 거야”라며 그때의 기억을 이야기하다 어느새 김칠례 할머니는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 한국으로 ‘시집 온’ 일본인 부인
“낮에는 밭 매고 밤에는 바느질하면서 하루하루를 지냈어. 남편이 무척 게을러서 지게일도 거의 없을 때면 방에서 뒹굴 뒹굴 구르기만 하니 내가 일을 찾아다일 수밖에 없었어. 또 그 당시는 일제강점기여서 마을에서는 한국으로 시집 온 일본인 부인의 존재에 대해 반응이 좋지 않았어.
한번은 어머니가 어디라도 다녀오면 인사말이라도 배우고 싶어 동네주민에게 가르쳐 달라고 말했더니 글쎄 ‘문디 할망구 인제 오나?’라는 말을 가르쳐 준거야. 그것만 종일 외워서 어머니한테 자신 있게 말했는데….
그날 저녁 하루 종일 욕만 먹었어. 그리고 하루는 어머니께서 멸치를 사오라고 하는 거야. 멸치가 뭔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사야 하는지 몰라 동네 사람들에게 물었지 그런데 가르쳐준 게 ‘멸치 팔러 왔나?’야. 상인들은 어이가 없어 하지. ‘사러 왔다’고 해야 하는데 ‘팔러 왔나?’라고 말했으니…”
- 요양원에서 소문난 손재주
“이후 가족들과 헤어지게 되고 남의 집 식모로 들어가 온갖 모진 일은 다 했지. 한국말도 익숙지 않아 많이 힘들었지만 그래도 나쁜 사람만 있는 게 아니더라고. 고마운 분들도 참 많았어. 그 중에 故 김성순씨가 은인이자 친구였어.
그분 댁에서 20년간 식모일을 하면서 친자매 이상으로 나를 아껴주고 심지어 불편했던 다리도 수술해줬어. 그 분에게 집안 사정이 생겨서 이렇게 요양원으로 오게 됐지. 63년 전에 헤어져 소식이 두절된 아들에 대한 그리움을 잊고 생계를 유지하려고 바느질과 뜨개질을 틈틈이 하고 직원들과 여기 할머니들 옷을 수선해주기도 해.”
그러자 같은 방 할머니께서 “이 할멈 손재주가 비상해. 90 먹은 노인이 바늘에 실도 잘 꿴다니까”며 한 마디 거드신다.
“또 틈틈이 그림 그리는 연습을 했는데 노인사생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줘 깜짝 놀랐어. 나 같은 늙은이에게도 상을 주니 하나님께 감사하고 가르쳐주신 선생님들과 좋은 시설에서 늘 가족같이 대해 주시는 원장님과 봉사자님들에게 너무 고마워. 이제 망구를 바라보는 시점에서 남은 여 생은 더 아픈 고통 없이 건강하게 살다 행복한 마음으로 가고 싶어.”라며 평생 잊지 못할 미소를 환하게 지으신다.<440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