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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달 같은 형상을 한 월촌마을 금산리 세동에서 분리돼, 피부병에 특효 금정산 약수정 남아
5. 신전리(新田里)
신전리는 단일 법정리로 형성된 마을로서 본래 대둔면(大屯面)의 지역으로 마을 주변에 숲이 많이 있다 하여 ‘섭밭’이라 불려 오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신전리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을의 형성
마을이 형성된 연대는 약 350여 년 전부터 마을에 주민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현재 거주민은 칠원제씨, 밀양박씨, 김해김씨, 평택임씨, 청주한씨 등 10여 성씨가 마을을 형성해 살고 있다.
◎ 대둔사지(大屯寺址)
신전리 산 57번지에 있었으나 경작지로 변하고 초석의 일부가 남아 있을 뿐이며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옥천사의 암자터로 추정하고 있다.
◎ 지명일화와 전설
◇ 거설매(땀) : 거설매땀은 거제현에 속해 있을 때 인가가 100여 호 살면서 번창하여 오다가 100여 년 만에 마을에 재앙이 들어 폐허가 되었다가 수십년 만에 다시 사람이 모여 들어 100여 호가 살아오면서 차츰 한 가구씩 떠나고 지금은 10여 가구가 살고 있는 취락이다.
◇ 조씨부인 전설 : 신전리에 약 250년 전에 함안조씨 부인이 젊은 나이에 남편(수원백씨)을 여의고 제법 넉넉한 살림살이를 하면서 살았다. 슬하에 자녀가 없었으나 마음이 청조하고 결백하여 뭇 남자들이 아내를 삼겠다고 꾀었으나 끝내 거절하고 살다가 나이가 들어 재산처분에 고심을 하다가 결국 갈천서원에 전 재산을 헌납하고 자기 기제일에 밥 한 술 떠놓아 달라는 유언을 하게 돼 지금도 서원 향사시에 유림들이 망인에게 헌작은 하고 있다. 그리고 큰땀 옆에 있는 조씨 부인 무덤에 제물을 정성껏 차려 소원성취를 기원하면 신통하게도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여 지금도 무덤을 찾아 소원을 비는 제를 올리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6. 유흥리(柳興里)
▣ 유흥
유흥마을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신흥(유흥리 중심마을)과 유동마을의 이름을 따서 유흥리로 하여 법정리가 되었고 유흥리를 행정리로 분동하면서 유흥이라 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취락을 날가지·참새미골·소두머리·절골·용머리·갈곡·갈망골·중담 등이 있다.
◎ 마을의 형성
마을이 생긴 연대는 양씨(楊氏)가 맨 먼저 신흥에 입촌하여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돼 1960년대에는 140여 호가 거주하는 큰 마을이었으나 점점 가구가 줄어들어 지금은 70여호 만이 살고 있는 마을이다.
▣ 삼계(三溪)
삼계마을은 대가면 사무소의 소재지 마을로 옛날에는 ‘각계(覺溪)’라 쓰고 주로 ‘객기’라 불러오다 두 개울 주변으로 세 땀(고대골땀, 본땀, 새땀)으로 마을이 형성됐다 하여 ‘삼계’라 개칭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풍수지리설에 마을 위치가 ‘게설’이라 하여 항상 게가 잘 드나들 수 있게 막히지 않아야 마을과 가정이 번창한다고 전하고 있어, 지금도 대문을 설치하지 않는 마을로 알려져 있다.
◎ 마을의 형성
마을이 생긴 연대(年代)는 전하는 바에 의하면 약 500년 이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효자 이평(李平) 선생의 선대인 경주이씨가 맨 먼저 마을에 정주하면서부터 그 뒤로 성주배씨, 경주김씨(정주연수 약 400년), 전주최씨 순으로 여러 성씨가 입주해 마을이 형성되었으나 경주이씨, 성주배씨 두 성씨는 오래 전에 마을을 떠나고 없다.
◎ 전설과 일화
◇ 당산나무 : 현 마을 뒤에 있는 금포구나무로 수령은 약 500년으로 추정되며, 삼계 백운산(큰갓)자락에 마을이 생길 때 마을 앞 정자나무로 심겨진 것으로 알려진다. 언제 나무가 넘어졌는지 알 수 없으나 몸체는 썩어 없어지고 한 가지만 남은 현재의 모양이 흡사 사람의 형상을 닮았으며 옛날에는 나무가지 사이에서 시각을 알리는 수액이 나왔으나 짓궂은 나무꾼이 구멍을 헤집은 후로는 수액이 흐르지 않고 있다.
◇ 마을숲 : 마을 앞에 있는 숲으로 수령이 2~3백년 이상된 느티나무, 포구나무, 서나무 등 30여 그루의 고목이 마을 남쪽을 감싸고 있어 방풍림 역할을 하고 있어 여름철 주민 휴식처로 이용된다. 고대골과 너북등, 살얍터(살안터)등 몇 곳으로 흩어져 있던 마을이 현 위치로 모여질 때 심겨진 것으로 전한다.
◇ 삼계우물 : 마을 중앙에 위치한 우물로 옛부터 장군수라 불러 왔다. 이 샘물을 마신 주민들은 힘센 장사가 많고 건강하고 장수한다고 알려져 있다. 여인들이 바가지로 물을 펴 담을 수 있은 얕은 샘이지만 심한 가뭄에도 마르는 일 없이 겨울에는 아주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하여 물맛이 좋기로 유명하다.
◇ 칠성바위(七星) : 마을의 앞과 뒤로 일곱 곳에 있는 바위들로 소가야시대 어느 도인(道人)이 성을 쌓기 위해 회초리로 돌을 옮겨 가던 중 회초리 밑으로 빠진 돌이란 전설을 지녔는데, 대개 옛 선사시대의 ‘고인돌’로 추측하고 있다.
◇ 효자와 호랑이 : 약 200년 전 이평(李平)이란 효자가 부모 상을 당하여 지극한 정성으로 시묘살이를 하는데, 그 효심에 감복한 호랑이가 효자를 도와 묘역의 석축을 쌓게 하였다. 어느날 호랑이가 깊은 함정에 빠져 효자의 꿈에 선몽하여 그 호랑이를 구해냈다는 일화가 전한다. 효행비는 마을 동쪽 200여 m 거리의 지방도 옆에 세워져 있다.
7. 암전리(岩田里)
암전리는 단일 법정리로 형성된 마을로서 본래 가동면 지역으로 태봉산 밑에 자리하여 골이 깊고 물이 맑다 하여 암곡(岩谷)이라 불러오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암곡과 마전(摩田)을 병합해 암전리(岩田里)로 하여 대가면에 편입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을의 형성
이 마을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약 400년 전부터 주민이 살기 시작하였다고 하며 지금은 전주최씨, 김해허씨, 김해김씨, 전주이씨, 함안이씨, 성산이씨 등 10여 성씨가 마을을 형성해 살고 있다.
◎ 암전리 지석묘(支石墓)
대가면 암전리 일대에 지석묘로 4개가 분포되어 있으며 선사시대의 유적으로 추정하고 있다.
8. 금산리(琴山里)
▣ 월촌(月村)
월촌마을은 마을의 형상이 반월과 같다 하여 마을명을 월촌으로 하여 1984년 고성군의 리동 명칭 및 행정구역 확정시 금산리 세동에서 분동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을의 형성
마을이 생긴 연대는 약 340여 년 전에 김해김씨가 입촌하여 정착하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으며 지금도 김씨(金氏)가 대성을 이루고 있다.
▣ 세동(細洞)
세동마을의 동명은 원래 관월동(觀月洞), 일명 ‘가는골’로 불리어 왔는데 한자 훈을 따서 행정상 세동으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또 한 마을내의 들 이름이 화월(禾月)들, 사월(士月)들, 사동(沙洞)들 등으로 돼 있어 관월 동명과 일맥 상통하는 바가 있다.
◎마을의 지세
세동마을은 금정산(琴井山:해발 349m) 자락에 자리잡은 마을로 동쪽의 낮은 달(月)과 같이 생긴 들판은 비옥하나 수원이 넉넉하지 못하며 안산 매봉 너머로 고성읍과 마암면을 경계하고 있는 마을이다.
◇ 금산리 선사유지(琴山里 先史遺址) : 대가면 금산리에 있는 선사유적지로서 1971년 8월 15일에 마제석검 1점이 출토되어 동아대학교 박물관에 보존돼 있으며 출토한 유물 상태는 잘 알 수 없으나 이 일대가 선사시대의 유적지임을 입증해 주고 있다.
▣ 신화(新化)
신화마을은 약 600년 전에 이 곳에 큰 저수지가 있었는데 어느 해에 저수지둑이 터져 이 곳에 사람이 살게 되면서 새로 화(化)한 동리라 하여 신화동(新化洞)이라 칭하게 되었으며 1984년 리동 명칭 및 행정구역 확정시 금산리의 행정마을 ‘신화’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가동(可洞)
가동마을은 본래 고성군 가동면의 내가동마을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대가면에 편입되어 대가면 금산리 가동마을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을의 형성
마을이 형성된 연대는 조선조 초기에 안씨가 입주해 살면서 안부동(安富東)이라는 현령을 배출했다고 전하고 있다. 임진왜란 전에 칠원제씨인 제말장군(諸沫將軍)이 입주해 터전을 마련하고 살던 중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많은 의병을 모집해 의병장이 되어 영남 각지에 침략하는 왜적을 섬멸하여 살신구국의 대공을 세웠다. 그 뒤에 함안조씨, 함안이씨가 입주하고 일제 때에 진양하씨를 비롯해 여러 성씨가 입주해 지금은 9성이 살고 있다.
◎ 마을의 지세
가동마을은 금정산(琴井山:해발 349m)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산고 수려한 지세로 금정산 정상에는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는 기우제터가 있으며 산중봉에는 피부병에 특효하다는 약수정(藥水井)이 있다. 농경지는 비옥하고 경지정리가 되어 있으나 수원이 넉넉하지 못하다.
◎ 지명 일화
◇ 금정산 약수정 : 금정산 중봉에 있는 약수정으로 피부병에 특효하다 하여 매년 칠월 칠석날에 많은 사람들이 약수을 이용했다. 특히 매일 조수의 간만에 맞춰 물이 났다가 없어졌다 하였다. 이 신기한 소문이 널리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게 돼 약수정 확장공사를 마을 사람들이 시작하고 난 후에는 조수의 간만 현상이 없어졌다는 전설이 있으며 지금은 약수정만 남아 유지되고 있다.
◇ 매화산(梅花山) 북바위 : 마을 북쪽을 막고 있는 매화산에 있는 큰 바위로 북쪽에 있다 하여 북(北)바위라 부르고 있으며 바위 주위에 매화 낙지(落地)가 있다 하여 명사(名士)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 인통바위(印筒) : 약수정에서 약 300m 거리에 있는 기묘한 바위로 조선조 인조 때 고성 현령이 약수 마시러 이 곳에 왔다가 이 바위을 보고 어인(御印)과 같이 생겼다 하여 ‘인통바위’라 이름하여 지금도 그렇게 불려 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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