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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에 피로감이 역력한 손학규 대통합민주신당 대표는 눈물을 글썽이면서 인사말을 시작했다.
“제가 요즘 너무나 힘듭니다. 보수의 결이 큰 파도처럼 밀려오는 대세 속에서 제대로 된 진보개혁정당을 다시 일으켜 세워보려고 죽을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정말 제정구 동지가 그립습니다. 뼈저리게 그립습니다.”
지난 1일 오후 5시 국회 헌정기념관 2층 대강당에서 열린 고 제정구 선생 9주기 추모행사장, 영하 5~6도의 추위 속에서도 300여 명의 추모객이 좌석을 가득 메웠다.
“제정구 동지는 죽어서도 계속 훨훨 불타오르고 있습니다. 이건 정말 놀라운 사실입니다. 제정구 동지도 끊임없는 몸부림을 계속 했습니다. 꼬마민주당·국민통합추진위원회·한겨레민주당 등 희망의 정치를 위하여 끝까지 몸부림쳤습니다. 가난한 자들과의 연대·공동체정신·생명사랑, 제정구 사상은 바로 진보의 핵심이요, 민주화운동의 요체입니다. 저는 아무리 어려워도 제정구 동지가 개척한 그 길을 흔들림 없이 따라가겠습니다.”
이에 앞서 개회인사에 나선 김학준 제정구기념사업회 이사장(동아일보 사장)은 “제정구 선생은 유명한 철학자 레비스트로스에 필적하는 큰 사상가입니다.
10대 경제대국이라는 화려한 깃발 아래 가려져 있는 우리 가난한 사람들을 주목하고 사랑하고 연구하며 일생을 바친 뛰어난 사상가였습니다. 레비스트로스도 ‘보이지 않는 곳을 주목하라. 보이지 않는 것이 세계를 지배한다’고 설파했습니다”라고 말했다.
박석무 한국고전번역원장도 추모사를 통해 “양극화 문제가 갈수록 심각한 이때 이를 치유할 수 있는 제정구 선생이 지금 우리 곁에 없다는 것은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제정구 선생은 세월이 갈수록 그 추모열기가 뜨거운 것을 보면 그 이름이 인류사에도 길이 빛나리라 확신합니다”라고 말했다.
이날 추모식에는 김상현·박계동·유인태·원혜영·제종길·조정식·김혜경 등 정계인사와 제재형(전 대한언론인회장)·이호원(제정구선생고성기념사업회 회장) 등 각계 인사들도 다수 참석했다.
이날 추모식에서는 ‘제정구 생명정치의 길’이라는 추모집이 김학준 이사장과 고 제정구 선생 미망인 신명자 여사의 손을 거쳐 제 선생 영정 앞에 헌정되었으며, 손호철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민주화를위한교수협의회 의장)가 발문 요지를 강연하였다. (발문요약 9면 별도 게재)
이날 행사에서 특히 주목을 끈 것은 초등학생 여섯 명의 경쾌한 무용과 남녀 5인조 사물놀이 한마당, 그리고 남녀 6인조의 꼭두쇠 가면무도였다.
이들 공연 팀들은 모두 시흥시 복음자리마을(제정구 선생의 지도로 이루어진 판자촌 철거민 이주정착촌)의 제정구장학회 장학생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특히 꼭두쇠 가면무도는 국제적으로도 알려져 있는 수준 높은 전통연희단이다.
이날 추모식 마지막 유족인사에 나선 신명자 여사는 “제정구는 행복하구나. 제정구는 살아있구나. 수많은 제정구 관련단체가 줄을 이어 나타나고 있으니 참으로 제정구는 행복하구나”라고 조용히 말했다. 또한 참석자 전원은 국회 근처의 감자탕과 추어탕 집으로 자리를 옮겨 밤이 깊도록 소주잔을 부딪치며 환담을 계속했다.
제정구기념사업회는 오는 16, 17일 이틀 동안 경남 고성군 대가면 척정리에 있는 제정구 선생 묘소를 단체로 참배하고 이어 고성과 김해 등 700년 가야문화 기행도 곁들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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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고 제정구 선생 9주기 추모행사가 열리고있다. |
대가면 출신 빈민운동가 막사이사이상 수상
제정구(諸廷坵) 선생은 1944년 경남 고성군 대가면 척정리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유신정권시절 민주화운동의 일선에서 학생운동을 주도했으며 ‘민청학련사건’으로 15년형을 선고받았다.
1973년 청계천 판자촌에서 “도시빈민들을 내버려두고 민주주의를 이야기하는 것은 허구이며 위선”이라는 생각을 굳히고 이 곳에 살기 시작하여 ‘배달학당’을 여는 등 본격적인 도시빈민운동에 투신했다.
1977년 양평동 철거민들과 함께 경기도 시흥군 소래면 신천리로 이주해 복음자리마을, 1979년 한독마을, 1985년 목화마을을 건설했다. 이곳에서 복음신용협동조합 초대 이사장, 복음장학회 회장으로 일하면서 주민들의 자립을 주도했다.
1981년 깊은 신앙과 신학탐구 열정으로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1985년 천주교도시빈민사목협의회를 창립, 초대회장을 역임하고 도시빈민연구소를 세웠다.
1986년 정일우 신부와 함께 막사이사이상 지역사회지도부문을 수상했다. 천주교사회운동협의회 의장, 한국천주교정의평화위원회 이사,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사무총장을 역임했다. 1987년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공동대표로 활약했다.
1988년 한겨레민주당을 창당, 공동대표로 일하면서 정치일선에 몸담았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건설위원회, 재정경제위원회, 산업자원위원회 위원으로 활약했다. 1999년 2월 9일 폐암으로 별세, 국민훈장모란장을 추서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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