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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그는 집을 떠나기 전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사내대장부는 집을 나가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 서 돌아오지 않는다.” 상해(上海)에서는 귀하게 내리는 눈이란다. 우리가 고성신문 2008년 특별 행사로, 대한민국의 뿌리가 싹튼 임시정부의 흔적을 찾으러 나서던 날은 눈이 내리고 있었다. 일행은 고성신문 가족들과 새교육공동체 고성주민모임 회원들. 모두 15명이다.
먼저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를 둘러보았다. 임시정부청사는 마당로(馬當路)에 있는 프랑스식 건물로 된 3층 벽돌집이다. 1926년부터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있었던 1932년 직후까지 7개월간 청사로 사용하던 곳이다. 작은 골목 안에 위치해 있어서 지리를 잘 알지 못하면 지나쳐 버릴 수도 있을 만큼 초라하지만, 상해를 찾는 한국인 관광객들이 필수적으로 찾는 명소이다.
청사는 중국 정부가 관리하고 있었는데, 정동영 통일부장관이 방문하여 중국과 공동관리 및 보존을 정식으로 합의했단다. 그러나 주변이 올림픽 때문에 재개발에 들어가는 바람에, 청사를 옮길 가능성도 있다고 했다. 다음으로 들른 곳은 홍구공원(紅口公園)이다. 홍구공원은 일반 여행객에게는 크게 볼 것은 없는 넓은 휴식처에 불과하다. 그리고, ‘근대화의 아버지'라 불리는 노신(魯迅)의 무덤 및 흔적이 있어 '노신공원'이 정확한 이름이고 '홍구공원'은 이 공원의 옛 이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공원을 아직도 홍구공원이라고 부른다. 우리 한국인에게는 노신보다는 윤봉길 의사의 항거 현장으로 더욱 뜻 깊은 곳으로 옛 이름이 더 의미 있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넓은 공원의 극히 작은 일부분에 윤봉길 의사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러나 윤봉길의 아호인 매헌(梅軒)의 의미를 살려 ‘매원(梅園)’을 만들고, 별도로 매화로 둘러싸인 한국식 정자를 만들 정도로 윤봉길 의사에 대한 중국 정부의 뜨거운 관심을 볼 수 있다. 중국 근대사의 중심에 윤 의사의 의거가 들어 있는 것이다.
예전엔 역 광장이었던 곳이 이제는 매화가 핀 꽃밭으로 바뀌어져 있다. 그리고 윤 의사가 폭탄을 던진 곳엔 돌비석 하나만 뎅그러니 놓여 있다. 공원의 규모에 비해 너무 작고 초라하여 무심코 스쳐가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 날.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는 이곳에서 일본의 전승 축하기념식장의 단상에 수통형 폭탄을 투척한다. 그리고 당당히 말했다. ‘내가 폭탄을 던졌다’라고. 이 폭탄에 일본의 육군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라(白川義則)가 폭사하고, 주요 인물들이 죽거나 중상을 입었다. 이 의거는 일본의 중국 침략 이후 약화되었던 독립 운동에 다시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으며, 중국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인식을 전환한다. 한 청년이 역사적 전환점을 만든 것이다.그의 흉상을 지그시 바라본다. 살며시 웃고 있는 윤봉길 의사의 웃음 속에서, 자신의 목숨을 버리지 않으면 민족의 독립을 앞당길 수 없다는 슬픔과, 한편으로 민족과 조국을 사랑하는 뜨거운 열정을 느낀다. 그의 의거는 우리 가슴에 살아있는 생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