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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 어디에도 없는 절경이어라 ‘연화팔경’

백연암·연대암·청연암 연화산 기슭에 불교 도량 위치, 수령 천년을 역사를 지켜온 보리수나무 자라
/김화홍논설위원 기자 / kn-kosung@newsn.com입력 : 2008년 01월 28일
ⓒ 고성신문

천하 어디에도 없는 절경이어라 ‘연화팔경’



백연암·연대암·청연암 연화산 기슭에 불교 도량 위치, 수령 천

년을 역사를 지켜온 보리수나무 자라
응봉초경, 수등낙조, 장군거석, 칠성기암, 연대취연, 철성가암, 운암낙하, 중춘앵화, 모추풍엽 연화 8경



3. 북평리(北坪里)
북평리는 본래 진주군 개천면의 지역인데 1906년에 고성군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유전, 강변, 후동, 원동을 병합해 법정리가 되면서 마을 북쪽에 들이 열려 있다 하여 북평으로 개칭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자연 취락으로 비노리(非老里), 후동, 유전마을이 있다.



▣ 북평
북평마을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유전(楡田), 강변(江邊), 후동((後洞), 원동(院洞)을 병합해 법정리가 되면서 마을 북쪽에 들이 열려 있다 하여 북평으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을의 형성
마을이 형성된 연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북평리에 소재한 옥천사(玉泉寺)가 신라 문무왕 36년(서기 676년)에 창건된 것으로 보아 사찰 주변에 오래 전부터 마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특히 옥천사 입구의 유전마을은 일제 말까지 대처승(帶妻僧)이 집단으로 거주하였다고 하며 현재 거주민의 성씨는 김씨, 최씨, 유씨, 심씨, 강씨, 등 여러 성씨가 마을을 형성해 살고 있다.



◎ 연화산 옥천사(蓮華山 玉泉寺)
옛 소가야의 북쪽, 진주목의 남쪽에 이 산이 있으니 곧 소백산맥이 덕유산과 지리산을 거쳐 내려와 남쪽으로 달려 온 한 지맥이 함안의 여항(艅航), 사천의 와룡산과 함께 우뚝 솟아 중첩된 연봉이 서남으로 둘러 있고 동북쪽으로 활짝 열려 있다. 옛날에는 이 산을 비슬(琵瑟)이라고 이름붙였던 것인데, 이는 이산의 동북쪽에 선유(仙人), 옥녀(玉女), 탄금(彈琴)의 3봉우리가 둘러 있어 마치 선인이 거문고를 타고 옥녀가 비파를 다루고 있는 형국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부르던 비슬산을 연화산으로 고쳐 부르기 시작한 것은 조선조 인조 때에 학명대사께서 고기에 이르기를 산세가 돌올(突兀 : 높이 서 있는 모습)하고 쟁영(嶸 : 높고 험한 모습)하여 몇 송이의 부용(芙蓉 : 연꽃)이 남두(南斗 : 남쪽에 있는 별의 이름)의 곁에 빼어났으니 이것이 연화(蓮華)다. 그 가운데서 옥파(玉派)가 있어 돌구멍에서 솟아나고 한 갈래의 잔원(潺湲 : 물 흐르는 소리)으로 들려 암곡(岩曲 : 바위의 구비 사명(寺名))을 『연화산 옥천사』라 하였다. 예로부터 서쪽에서 솟아 동쪽으로 흐르는 샘(西出東流)을 옥천이라 했듯이 이 곳의 샘도 그래서 생긴 이름이다. 옥천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의상대사가 창건했으며 그가 전교한 10대 사찰 중의 하나이다.
옥천사는 고려 진각국사가 중건한 이후 여러 차례 중수했으며 해방 이전만 하더라도 옥천사 규모는 경남 지방에서 손꼽히는 대찰이었다. 임진왜란 때 승병의 주둔지가 되었던 역사의 단면이나 400여 명의 승려가 불도에 전념했던 점등에 비추면 쉽게 짐작이 간다. “해방 전 3천 섬의 곡식을 거두어 들이는 전답이 옥천사 소유로 돼 있었으며 또 절 식구들의 식량을 방아 찧어 공급하기 위한 물레방아만도 12곳이나 있었다”고 현 주지스님의 설명이다. 산내(山內)의 암자는 다음의 3개 암자가 있다.



(1) 백연암(白蓮庵) : 숙종 4년(1678)에 묘욱선사(妙旭禪師)가 창건했다.
(2) 청연암(靑蓮庵) : 위와 같다. 여기에는 보리수나무가 보호수로 지정돼 있는데 그 수령은 천년에 가깝다고 추정한다.
(3) 연대암(蓮臺庵) : 연화산의  뿌리라고 하여 그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기도처로서 알맞은 곳이다.



옥천사의 문화재 현황은
(1) 대웅전 : 효종 5년(1745)에 창건하고 고종 2년(1865)에 중창하였으며 지방문화재 제132호로 지정돼 있다.
(2) 자방루(滋芳樓) : 영조 40년(1764)에 창건하여 지방문화재 제53호로 지정되었다.
(3) 명부전(冥府殿) : 옛 궁선당(窮禪堂) 터에 새로 세웠는데 고종 32년(1895)에 건립한 것이며 지방문화재 제146호로 지정돼 있다.
(4) 옥천사 임자명반자(玉泉寺 壬子銘飯子) : 고려 고종 36년(1249)에 제작된 것인데 보물 제495호로 지정되어 있다.
(5) 옥천사 향로(玉泉寺 香爐) : 동제 은입사(銀入絲) 향로로서 조선 인조 16년(1638)에 제작된 것인데, 지방문화재 제59호로 지정되었다.
(6) 옥천사 범종 : 조선 숙종 27년(1701)에 제작된 것인데, 중간에 깨어진 것을 보수한 흔적이 있다. 이것은 진주 민란 때에 난민이 불을 지르는 속에 힘이 센 스님들이 머리에 흰수건을 쓰고 들어가서 종을 피난시키면서 언덕에 떨어뜨렸기 때문에 파열된 것을 보수한 것이라고 전한다. 당시에 진주 민란을 일으킨 사람들이 모두 흰수건을 쓰고 봉기했기 때문에 이를 백건당(白巾黨)이라고 불렀던 것을 비교해 보면 이치에 맞는 말이다. 난민들 속에 섞여 불상, 불구(佛具)를  구출하는 것을 보고 난민의 두목이 모두 수건을 벗으라고 명령하였기에 스님들의 본색이 탄로되어 큰 곤욕을 치렀다고 한다. 지방문화재 제60호로 지정되어 있다.



(7) 법고(法鼓) : 금고(金鼓)라고도 하는데, 제작 연대는 1761년이다.
(8) 목어(木漁) : 불가에서는 소중히 여기는 4물 중의 하나다.
(9) 운판(雲板) : 위와 같다.
(10) 목식통(木食桶) : 수백 명의 밥을 담는 나무로 만든 통이다. 현재 종각 안에 보관돼 있으며 승병이 사용했던 것으로 전한다.
(11) 괘불(掛佛) :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에 모시는 불상인데, 주불은 석가모니불이며 1748년에 조성되었다. 그리고 이 괘불 부처님은 영험이 신통해 날이 가물어 기우제를 지낼 때마다 모셔졌다. 진주에서 자주 그 영험을 보아 진주 남강에서 2회 기우제를 올려 5일 내에 비가 내렸다고 함(1976년).



◎ 옥천사 부도군(玉泉寺 浮屠群)
옥천사 경내에 있는 부도군으로 5기가 있으며 북평리 옥천사 입구 저수지 밑에 있었던 것을 1986년 연화산 도립공원 개발로 인해 현 위치로 이설했다.



◎ 천연기념물 등
◇ 청연암 찰피나무 : 옥천사 청연암의 경내에 있는 거수목으로 피나무과에 속하는 낙엽고목이다. 수령 250여 년을 추정하고 있고 흔히 이 나무를 보리수라 하여 귀히 여기고 있으며 1986년 8월 6일자로 도 지정 기념물 제82호로 지정되어 있다.



◇ 석굴 : 개천면 유전(楡田)산에 있는 석굴로 마치 돌을 깍아 세운 것 같고 높이가 한길이 되며 넓이가 두자나 되어 입구는 기어 들어갈 정도이나 안으로 들어가면 말을 타고 달려도 거칠 것이 없으며 반쯤 들어가면 넘어야 할 곳이 있고 다시 30보쯤 들어가면 물이 있는데 깊이를 알 수가 없다고 한다.



◇ 황소바위 : 옥천사 입구에 있는 백연암 즉 ‘황소바위’라고 불리우는 큰 바위로 옛날 옥천사를 창건할 때(청연암) 황소 한 마리가 나타나서 물도 날라주고 돌도 치워주고 나무도 날라주는 등 많은 일을 도왔으므로 절 낙성 때 큰스님이 황소의 공을 치하하여 소 목에 염주를 걸어 주려는 찰나에 갑자기 황소의 몸에서 하얀 안개가 피어 오르더니 바위로 변했다고 하여 황소바위로 부르고 있다. 그 후 임진왜란 때 왜병이 이 곳에 침입해 옥천사를 불태우고 자방루에서 조련하고 있던 승병들이 황소바위 앞에서 진을 치고 염주를 들고 불공을 드리고 있는 것을 보고 왜장이 나타나서 바위를 부수려고 정을 내려치자 바위에서 붉은 선혈이 치솟아 왜병들이 모두 피투성이가 되어 도망치게 되었고 우리 승병들은 용기백배 왜병을 격퇴하고 옥천사를 지켰다는 전설이 있는 호곡수암(護國守岩)의 바위이다.



◎ 지명 일화
◇ 비노리 : 북평마을 비노리 들판은 토질은 비옥하나 한발이 닥치면 수원이 없어 흉작을 면할 수가 없어 비를 소원한다하여 마을명을 비노리(雨遊)라 부르게 됐다고 한다.
◇ 세진교(洗塵僑) : 유전마을에 있는 교량으로 일명 무지개 다리라 하여 유명하다.
◎ 노거수(老巨樹)
◇ 비노리 거수귀목 : 비노리 마을에 있는 노거수(귀목)로 수령 수백년을 추정하고 있으며 수형이 아름다워 천년 관상수로 마을의 보목으로 보호하고 있다.
◇ 유전 거수귀목 : 유전마을 입구에 있는 노거수(귀목) 두 나무로 수령이 약 400년을 추정하고 있다.



◎ 연화팔경(蓮華八景)
(1) 응봉초경(鷹峰初景) : 매봉은 큰절 뒤편 높은 봉우리이다. 아침 햇빛이 제일 먼저 비치는 곳이니 온 산이 거울처럼 보인다.
(2) 수등낙조(水嶝落照) : 수등은 물무덤재라고도 하는데, 연화산의 남쪽편 높은 봉우리이다. 이 곳은 해마다 바닷물을 길어다가 묻는데, 화산이 비친다고 하여 화재를 막는 뜻에서 그 해 봄에 꼭 실시하고 산제(山祭)를 지냈다. 이 봉우리에 비치는 저녁 햇살은 천하일품의 경치이다.
(3) 장군거석(將軍巨石) : 큰절 건너편을 남산이라 부르는데, 여기에는 옛날 송이가 많이 났다. 여기에서 북쪽으로 뻗은 봉우리를 장군봉, 사자봉이라고 불렀는데, 거석이 즐비하다.
(4) 칠성기암(七星奇岩) : 응봉의 뒤편으로  멀리 뻗은 봉우리로 기암이 많다.
(5) 연대취연(蓮臺翠烟) : 연대암에서 피어 오르는 저녁 연기를 일컫는다.
(6) 운암낙하(雲庵落霞) : 물무덤의 봉우리에서 동쪽편에 옛날 있었던 암자를 운암이라고 일컬었는데. 이 골짜기에서 피어 오르는 안개를 말한 것이다.
(7) 중춘앵화(仲春櫻化) : 연화산에는 곳곳에 벚꽃나무가 고목으로 있어 제철에 꽃이 피면 온 산이 꽃밭으로 변한다.
(8) 모추풍엽(暮秋楓葉) : 연화산 일대는 잡목이 많은 탓으로 늦가을이 되면 단풍이 절경을 이룬다.



▣ 원동(院洞)
원동마을은 조선 후기 통영 통제영 설치시 진주부사가 통제영으로 행차하는 길목으로 이 곳에 고을 원이 쉬어가는 원(院)집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오늘에 이른다.



◎ 마을의 형성
마을이 형성된 연대는 조선 후기 진주에서 통영 통제사영으로 가던 고을원이 쉬어가는 집이 이 곳에 있었다고 하여 마을명을 원동으로 부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후기부터 주민이 거주하게 되면서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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