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개천면 개천면은 본래 진주군 지역으로서 거동(巨東), 거서(巨西), 청동(靑東), 청남(靑南), 구례(具禮), 덕성(德城), 상명(上明), 하명(下明), 유전(楡田), 강변(江邊), 후동(後洞), 원동(院洞), 상물(上物), 하물(下物), 봉치(鳳峙), 용궁(龍宮) 등 16개 동리를 관할하였으며 1906년 9월 24일자 칙령 제49호로 고성군으로 편입되었다.
1914년 3월 1일자 조선총독부 경상남도령 제2호로 면을 병합할 때 개천면으로 하여 창원군 진전면의 나동(羅洞), 선동(仙洞)의 2개 리와 영이곡면(永耳谷面)의 성곡(省谷) 일부를 병합해 가천(佳川), 청광(靑光), 예성(禮城), 명성(明星), 북평(北坪), 용안(龍安), 봉치, 나선(羅仙) 등 8개 리로 개편했다.
개천면은 1907년 5월에 면이 설치되어 1973년 7월 1일자, 대통령령 제 6542호로 마암면 좌연리를 편입하였다. 1983년 2월 15일자로 대통령령 제11027호로 개천면의 나선리 선동이 구만면 화림리로 편입되고 1984년 8월 22일자 고성군 조례 제858호 명성, 예성, 좌연, 북평, 용안, 봉치, 청광, 나선, 가천 등 9개 법정리 16개 마을(행정리) 22개 반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개천면은 고성읍에서 24.4㎞ 북쪽에 위치해 동쪽은 마산시 진전면, 남쪽은 구만면·마암면·영현면, 서쪽은 영오면, 북쪽은 진주시 일반성면과 이반성면에 접하고 있다. 면사무소의 소재지는 명성리 625-1번지에 위치하여 총면적은 42.3㎢이고 가구는 661가구에 인구 2,072명(남자 : 1,017명, 여자 : 1,055명)으로 고성군 총가구의 4.0% 총인구의 3.5%가 거주하며 경지면적 725ha, 임야가 3,232ha이고 특용작물 재배면적은 35ha에 17.5M/T을 생산하며 농가수는 592호에 비농가가 69호로 인구밀도는 77인/㎢로 군내에서 가장 낮은 편이다.
면내에는 초등학교 1개 교가 있으며 취락은 개천천 봉치포강(鳳峙浦江) 등 소하천으로 이어지는 산록경사지에 발달해 있다. 면내의 문화재 현황으로는 북평리 소재 옥천사에 국가지정문화재의 보물 제459호인 임자명반자와 지방문화재 제53호인 자방루, 지방문화재 제59호의 향로, 지방문화재 제60호인 범종, 지방문화재 제246호의 명부전과 목식통을 비롯한 119점의 불교 소장품이 일괄하여 지방유형문화재 제299호로 지정돼 있다.
사적은 옥천사 부도군, 보령사 성지, 취령산 민보 유지, 청광리 장치령, 좌연리 사찰지와 천연기념물 및 자연승지로 청연암 찰피나무(기념물), 유전산에 있는 석굴, 옥천사 입구의 백영암 황소바위 등이 있으며 연화산을 중심으로 1983년 9월 29일자 경남고시 제157호로 개천면 외 4개 면 지역이 연화산 도립공원으로 지정돼 있다.
1. 예성리(禮城里) 예성리는 본래 진주군 개천면의 지역인데 1906년에 고성군에 편입되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구례, 덕성동과 영의곡면의 성곡일부를 병합해 구례의 예(禮) 자와 덕성의 성(城) 자를 따서 개천면의 예성리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행정리로 덕성(德城)과 구례(具禮)의 2개 마을이 있다.
▣ 덕성 덕성마을은 암석으로 이루어진 산세가 뻗어 있어 덤재로 부르고 있으며 또한 중담마을 윗쪽에 돌출한 산모양이 사두(蛇頭)와 같다고 하여 사안두(蛇顔頭)라고도 부르고 있다. 덕성의 마을명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구례와 덕성동을 병합하여 예성리라고도 하였으며 1984년 이동명칭 및 행정구역 확정시 덕성(행정리)으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을의 형성 덕성마을은 아래쪽 들판을 명정(明亭)들이라고 칭하고 있는데 옛날 이곳에 소가야 시재의 명정골(明亭邑)이 있었다고 전하고 있으며 주민이 거주하게 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현재 거주민의 성씨는 인천채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고 청송심시 등 여러 성씨가 마을을 형성해 살고 있다. 취락으로는 웃골, 중담, 비리곡, 아래담 등이 있다.
◎ 마을의 지세 연화산(蓮花山 : 해발 477.4m) 줄기가 북쪽으로 길게 뻗어 내려 영오면 성곡리와 경계를 이루면서 긴 산골을 형성한 산록지에 자리잡은 마을로 마을 앞의 큰 들은 비옥한 토질로 이름나 ‘큰들’이라 칭하고 큰들 아래로 영오천이 흐르고 있어 수원도 양호하여 농산물의 생산이 풍부한 지대이다.
◎ 지명 일화 ◇ 방아들 : 마을 앞 내를 건너 1㎞ 지점에 약 100년 전까지 물레방아가 있었던 것이라 이 곳을 옛날부터 방아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 구례 구례마을은 예성리에 속한 마을로 1984년에 고성군의 이동명칭 및 행정구역 확정시 구례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을의 형성 마을이 형성된 연대는 약 400년 전인 1594년경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현재는 경주김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고 배씨, 서씨, 심씨, 강씨 등 여러 성씨가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 마을의 지세 구례마을은 연화산에서 뻗어내린 산줄기가 길게 내려오면서 서쪽은 영오면과 경계를 이루고 동쪽은 깊은 산골을 형성해 주위가 모두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로 옛날부터 금, 은, 동과 철이 생산되었다고 전하고 있으며 윗쪽에 1974년도에 설치된 구례저수지가 있어 농경지는 수원이 좋은 비옥한 토질로 농산물의 생산이 풍부하다.
◎ 연대암(蓮臺庵)과 전설 구례마을에 있는 연대암은 옥천사의 3개 암자 중 하나로 1694년에 창건 되었다. 이 암자에 얽힌 전설은 옛날 이 마을은 깊은 산골로 호랑이 등 산짐승이 많아 사람이 살지 못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연대암의 수도승이 법당에서 염불을 하다가 깜빡 조는 사이에 꿈을 꾸었다. 꿈에 옥동자가 연화산과 문치산 중간을 무지개를 타고 내려오는 것을 보고는 무슨 좋은 일이 있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저녁에 다시 꿈에 옥동자가 나타나서 말하기를 “동네 입구에 큰 숲을 만들면 들짐승도 없어지고 인가가 형성돼 사람이 살게 될 것이리라”하였으므로 수도승이 다음날 마을에 내려와 마을입구에 나무를 정성들여 심었다. 과연 옥동자가 말한대로 산짐승도 없어지고 한 집, 두 집 인가가 들어서면서 지금의 마을이 형성됐다고 전하고 있다. 그리고 그 당시 심었다고 하는 수백년된 나무가 한두 그루씩 지금도 남아 있으며 마을이 숲으로 둘러싸여 바깥쪽에서는 잘 보이지 않은다.
◎ 지명 일화 ◇ 중산골 : 스님이 수양을 한 곳이라 하여 중산골이라 부르고 있다. ◇ 창골 : 6.25사변 이후에 생긴 지명으로 6.25사변 때 주민이 대창(죽창)을 들고 공산당과 싸워 많은 전사자가 났다고 하여 창골이라 부르고 있다.
2. 명성리(明星里) 명성리는 본래 진주군 개천면 지역인데 1906년에 고성군에 편입되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상명과 하명을 병합해 개천면의 명성리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행정리로 하명(下明)과 상명(上明)의 2개 마을이 있다.
▣ 하명 하명마을은 1984년 고성군의 이동명칭 및 행정구역 확정시 명성리를 분동해 마을이 명성리의 아래쪽에 위치하였다 하여 하명으로 명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을의 형성 마을의 형성된 연대는 약 700여 년 전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옛날에는 진양군과 마산시를 잇는 유일한 역마촌의 구실을 하였다고 하며 5일장(市場)이 섰던 곳으로 마을 이름을 ‘역골장터’라고 불러 오기도 하였다. 그리고 현재의 면 소재지가 된 것은 1928년 3월로 면단위 기관으로 면사무소를 위시하여 고성경찰서 개천치안센터, 동고성농협 개천지점, 우체국, 보건지소와 개천초등학교가 소재하고 있다.
◎ 지명 일화 ◇ 가리산 : 옛날에 하명마을에 살았던 만석군 부자가 가을 추수 때 벼타작을 하면서 가래로 벼를 뒤룬 뒷겨가 모여서 산이 되었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전하고 있다.
▣ 상명 상명마을은 1984년 고성군의 행정구역 확정시 명성리를 분동해 마을이 명성리의 윗쪽에 위치하였다 하여 상명으로 명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을의 형성 마을이 형성된 연대는 지금부터 약 500여 년 전부터 사람이 살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으며 현재 거주민은 경주김씨의 집성촌으로 형성돼 있다.
◎ 지명 일화 ◇ 관음사지 : 마을 동북쪽 관음봉 밑에 약 400년 전에 ‘관음사’란 암자가 있었는데 폐사되어 지금은 절터만 남아있는데 전하는 바에 의하면 예성리(구례) ‘연대암’의 불상이 관음사의 불상이라고 전하고 있다.
◇ 옥녀봉(玉女峰)과 전설 마을 뒷산에 있는 옥녀봉은 옥녀가 가야금을 치는 형상이고 맞은편의 선유산(仙游山)은 옥녀의 가야금 소리에 맞춰 선비가 춤을 추는 모습이며 망선봉(望仙峰)은 옥녀와 선비가 즐기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전하고 있다. 옥녀봉은 옛날 옥녀란 아가씨가 가난한 집안에 출가해 삭바느질을 하면서 남편의 공부를 도와 남편이 한양으로 과거보러 떠난 뒤에는 마을 뒷산에 올라 멀리 한양을 바라보며 남편의 장원급제를 빌면서 가야금을 쳤다고 한다. 이러한 옥녀의 지정이 감천되어 어느날 갑자기 산신령이 나타나서 “옥녀야 너의 지극한 정성에 너의 장군이 과거에 장원급제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그 자리에 쓰러져 불귀의 몸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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