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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희망을 품고 사는 마을‘상리면 망림리’


/김화홍논설위원 기자 / kn-kosung@newsn.com입력 : 2008년 01월 19일


철마를 타고 쉰 곳 동산리 철마산 전설 유래…오형제 부모 병을 고치기 위한 효행 ‘오효일부의 정여비’


신선과 선비가 많이 배출된 곳 무선리 선동마을, 감

티재에서는 통영 진주 등 산적이 이권을 놓고 싸워


5. 동산리(東山里)
▣ 동산리
동산리 마을의 동명은 1895년(고종 32년)에 지방제도를 개정할 때 고성군 상서면 동산리로 되어 있었으며 마을 구성은 본동과 모정골, 어전골(느랏골)과 점터로 산재한 산간벽촌 마을로 한 법정리로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을의 형성
현재 동산리 마을에 거주하는 김해김씨 문중의 기록에 의하면 약 400여 년 전에 이곳에 처음 이주를 해왔다고 전하고 있다. 그 뒤 안동김씨 등 제씨가 마을에 입촌해 약 150년 전에 본동에만 100여 호가 넘게 살고 있어 최성기를 이루었으며 마을에 서당이 있어 상리 면민들이 이곳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 정여와 비 (旌閭와 碑)
◇ 오효일부(五孝一婦)의 정여비
김해김씨 문중에 조선 정종 시대에 오형제가 부모의 병환을 구하기 위해 서로 앞을 다투어 효도를 하고 장부(長婦)도 부군 못지 않게 효도한 것이 조정에 알려져 고종께서 포상과 정여를 내리신 교지를 문중에서 소정하고 있으며 마을에 효도비가 있다.


◇ 열녀비
모정골에 전주이씨 문중의 열녀비가 있다. 남편이씨가 사망하자 부인이 식음을 전폐하고 부군 묘소에서 시묘살이를 하다가 남편 뒤를 이어 사망하였으므로 향리 유림에서 열녀비를 세웠다고 전하고 있다.
◎ 지명 일화


◇철마산(鐵馬山)
태고 때 모 장군이 철마를 타고 이곳에 와서 쉬어 갔다고 마을 앞 산이 철마산이고 쇠말뚝에 말고삐를 매었다는 곳이 ‘쇠말땅’이다. 그리고 장군과 군졸이 칼을 한 데 묶어 세운 곳이 속쇠산(束釗山)이라 하며 장군이 쉬었다는 곳이 느랏골(於田谷)이라 전하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이여송 장군이 왜병을 물리치고 이곳에 와 산세를 살펴보고 명지가 많아 산의 혈을 끊었다는 곳이 철마산정에 웅덩이로 흔적이 남아 있다.


 


6. 망림리(望林里)
▣ 구미(龜尾)
구미마을은 1914년 3월 1일, 조선총독부 경상남도령 제2호로 면의 명칭 및 구역을 정할 때 망림리에서 분동돼 망림2구로 하였다가 광복 후에 구미(龜尾)라 칭하게 되었는데 그 유래는 앞산의 형세가 거북이와 같고 마을의 위치가 거북이의 꼬리부분이라 하여 거북이 구(龜), 꼬리 미(尾) 자를 붙여 구미라 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 마을의 형성
마을이 생긴 연대는 신석기시대라고 하고 있으나 기록이 없어 알 수가 없고 다만 입촌한 성씨들의 년대를 추정해 보면 서기 1600년경(지금부터 약 400년 전후)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입촌한 성씨는 맨 먼저 합천이씨, 다음으로 김해김씨, 고성박씨, 원주이씨, 밀양박씨, 달성서씨 등 여러 성씨가 입촌하여 마을을 형성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재실과 비
합천이씨 문중의 송은재(松隱齋)가 있고 재실로 고성박씨의 구산재(龜山齋)와 원주원씨의 숭모재(崇慕齋)가 있으며, 비는 밀양박씨 효자비, 고성박씨 송덕비가 마을에 있다.


◎ 지명 일화
◇ 깃대산
옛날 산 정상에 깃대를 꽂아 신호를 보내는 산이라 하여 깃대산이라 부르고 있다.


◇ 찬바람 고개
깃대산 서쪽 능선 중턱에 있는 조그마한 고개로 무더운 여름철에도 이 고개에는 찬바람이 난다하여 찬바람 고개라 부르고 있다.


◇ 구미동(龜尾洞)
옛날 노승이 이곳을 지나다가 터를 잡았다는 설이 있으며 지금도 기와장과 질그릇 조각 등이 출토되기도 하며 우물은 지금도 남아 있어 식수로 사용되고 있다.


◇ 장재(長財)터
이곳에 옛날 부자가 오래 살았다 하여 장재터라고 부르고 있으며 불땐 숯과 깨진 그릇조각 등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 망림(望林)
망림 마을은 망림리 본동마을로 1500년 경에 전주최씨, 밀양박씨, 창원황씨가 거주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 앞 산세가 뛰어나고 문수암 밑의 팔송정 숲이 아름다워 숲을 바라보면서 항상 희망을 갖고 살기를 바란다는 뜻에서 바랄 망, 수풀 림 자를 따서 망림(望林)이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재실
◇ 망모재(望慕齋) : 밀양박씨 문중의 재실로 망림 물포산(勿浦山) 밑에 있다.
◇ 치암재(痴庵齋) : 창원황씨 문중의 재실로 망림리에 있다.


 


7. 무선리(武仙里)
▣ 무선
무선 마을은 약 100년 전에 진보이씨가 입촌해 마을이름을 ‘무리산’이라고 불렀는데 1930년에 선동과 분동되면서 ‘무선’마을로 이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을의 형성
약 100년 전에 진보이씨가 입촌하였고 그 뒤 전주최씨, 함안이씨가 입촌해 마을을 형성하여 지금은 경주최씨, 합천이씨, 현풍곽씨, 밀양박씨 10여 성씨가 살고 있다.


▣ 선동(仙洞)
선동마을의 지명은 옛날 무이산(武夷山) 덕디로 되어 있었다. 청령산(靑凉山) 밑에 신령님과 선비가 많이 마을에서 배출되었다 하여 신선 선(仙) 자를 따서 선동이라 하였으며 마을 뒷산이 무이산이라 ‘무리산 마을’이라고 고을 원님이 지어주었다고 전하고 있다.
◎ 마을의 형성
구전에 의하면 지금부터 약 200여 년 전에 전주최씨가 처음 이곳에 정착했으며 의령남씨가 임란 때 입촌하여 마을을 형성해 지금은 밀양박씨, 경주최씨, 해주최씨, 안동권씨, 순흥안씨, 남원양씨, 남평문씨, 전주이씨, 김해김씨 등 10여 성씨가 마을을 이루고 있다.


 


8. 자은리(自隱理)
자은리는 단일 법정리로 형성된 마을로 본래 상서면의 지역으로서 마을 안에 잔 다리가 많았다 하여 ‘잔다리’ 또는 ‘작은교’라 하였는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통폐합시 선당골, 건너땀, 안땀, 외덕대, 덕백을 통합해 자은리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구전에 의하면 조선조 말엽에 이곳 안땀에 지금의 면사무소격인 행정치소가 있었다고 전하고 있으나 정확한 고증은 없다. 그리고 ‘자은(自隱)’은 임진왜란 때에 왜적이 고성에서 진주 방면으로 쳐들어 가면서 많은 양민을 학살할 때 이곳 자은 마을의 깊은 산골에 숨어 피난을 안전하게 할 수 있었다 하여 마을명을 한자로 스스로 자 자와 숨을 은 자를 붙여 자은리(自隱理)로 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 마을의 형성
자은 마을의 형성은 임란 때 이곳에서 마을 사람들이 피난했다고 전하고 있으며 또한 임란 전후 경주최씨가 맨 먼저 입촌해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9. 부포리(夫浦里)
▣ 부포
부포 마을의 지명은 옛날부터 감티, 부개, 부포로 불리어져 왔는데 ‘감티’는 통영에서 70리, 진주에서 70리 되는 지점이 이곳으로서 옛날 사천, 진주, 지리산 지역의 산적과 통영, 마산, 부산 등지의 산적이 서로 만나 감투다툼을 한 고개로서 감티(재)라 부르게 되었으며 ‘부개’는 천황산 줄기가 지아비 부(夫), 클개(날개) 포(浦) 자 모양을 하고 있다 하여 이곳을 지나던 원님이 지어준 지명으로 부개라 하였다 한다. 그리고 ‘부포’는 일제시 행정구역 개편으로 부포리로 하였다가 광복 후 분동이 되면서 부포와 내부포(內夫浦)로 개칭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을의 형성
구전에 의하면 지금부터 약 500여 년 전에 수원백씨가 이곳에 정착해 살기 시작했다. 그 후 밀양박씨, 전주최씨, 평택임씨 등 지금은 10여 성씨가 마을을 형성해 살고 있다.


◎ 마을의 지세
부포 마을은 고성에서 사천~진주 방면 국도의 갑문에 위치한 감티고개 마을로 뒤에는 천황산(天皇山), 앞은 선당산 자락에 자리잡은 마을로 군내에서 높은 지대로 겨울에 춥기로 전라도 운봉(雲峯) 다음 가는 마을로 알려져 있으며 농토가 비옥하지 못하고 수원도 좋지 못한 지대이다.


◎ 재실과 비
◇ 수원백씨 문중에서 임진왜란 때 삼대가 공을 세우고 전사한 공(公)에 대해 조정에서 ‘삼총사’란 시호를 내린 재실인 쌍충재(雙忠齋)와 추모비가 있다.
◇ 창녕조씨 문중에 조선초기 판서벼슬을 한 공(公)의 무덤과 비석, 장군석이 전해지고 있다.


◎ 지명 일화
◇ 전어골 : 옛날에 이곳에 전어가 살았다 하여 전어골이라 한다.
◇ 벌밭골 : 벌이 많아 사람의 접근이 없었다 하여 벌밭골이라 한다.
◇ 피밭골 : 선당산(仙堂山) 아래 독메에 명당이 있었는데 임란 때 왜적이 기운을 꺽기 위해 불을 피우고 쇠말뚝을 이곳에 박자 용마가 나와 이산 저산으로 뛰면서 피를 토하고 죽었다 하여 피밭골이라 전하고 있다.


▣ 내부포
내부포 마을은 일제시 행정구역 개편으로 부포리 법정리로 되었다가 광복 후 분동되면서 부포와 내부포로 행정구역이 변경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을의 형성
구전에 의하면 지금부터 약 500여 년 전에 창녕조씨가 이곳에 정착해 살기 시작하면서 그 후에 수원백씨가 입촌해 골땀, 안땀 장성거리의 산재마을로 되어 있다가 1980년도에 취락구조 개선으로 새 마을이 하나 형성돼 4개의 산재마을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을의 지세
내부포마을은 천황산 자락에 자라잡은 4개의 산재 마을로 고성읍에서 진주 방면 국도의 약 10㎞ 지점에 위치해 삼산면과 영현면을 관통하는 군도가 4거리를 형성하고 있다. 이곳에 1960년도에 5일 시장(시장일 5일과 10일)으로 재래시장이 개설돼 쌀을 위시한 농산물의 시장이 25년간 계속되다가 폐지됐으며 지금은 이곳을 ‘장성거리’라 부르고 있다. 경지는 마을 주변에 비교적 넓은 들판을 가지고 있으면 수원도 풍부한 편이다.

/김화홍논설위원 기자 / kn-kosung@newsn.com입력 : 2008년 01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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