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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심 걱정 없이 살기 좋은 마을‘상리면 척번정리’


/김화홍본지논설위원 기자 / kn-kosung@newsn.com입력 : 2007년 12월 21일

‘구시골’이란 뜻, 비가 오면 빗물이 씻은 듯 없어져 씻을 척 번뇌 번 정자 정 따 지명 불러져
수령 250년 된 척번정리 오정자나무 마을 역사 간직, 오산

독립만세 의거 항일정신 불태워


 


1. 척번정리(滌煩亭里)
▣ 척정(滌煩)마을

척번정리는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조정시 조동(槽洞)과 척정(滌亭)을 병합하여 조정리(槽亭里)로 하였다가 1938년 행정구역 재조정시 척번정리로 고쳤다.
‘조정리’라 함은 ‘구시골’이란 뜻으로 마을 지형이 소 죽통처럼 생겼다하여 유래되었다고 하며 척번정리는 마을이 보기에는 평평하지만 비가 오면 빗물이 깨끗이 씻은 듯이 간 데 온 데도 없이 없어지기 때문에 씻을 척(滌), 번뇌 번(煩), 정자 정(亭)자를 따서 척번정리로 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이는 불교적인 의미가 짙은 이름으로 근심 걱정이 없는 마을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이를 향토 출신 김열규 교수(민속학 교수)는 하늘 아래에서 제일 좋은 동네 이름이라고 두 번이나 글을 써서 찬양한 바도 있다. 지금부터 약 100년 전에는 대나무가 울창하여 죽번정(竹煩亭)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고 하며, 척정마을은 면소재지 마을로서 상리면의 중심 마을이다.



◎ 마을의 형성
척정마을은 마을 서쪽에 고인돌 7점이 ‘칠성바위’라 불리고 있었는데 도로 확포장 공사로 2점이 없어지고 현재 5점이 남아 있으며 15년 전에 농토를 정리하다가 약 2,000년 전 청동기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돌칼 몇 점이 발굴된 바도 있어 이 곳에 아득한 옛날부터 조상들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는 함안이씨, 전주최씨 등 30여 성씨가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면소재지 마을로서 면사무소, 파출소, 농협, 우체국, 보건지소, 초등학교, 중학교 등이 있다.
◎ 기념물
척정마을의 정자나무(일명 오정자나무)는 군 나무로 지정되어 있으며 수종은 느티나무로 수령 250년을 지정하고 있다. 수고가 30m, 나무둘레가 6m나 되며 옛날에는 동제를 지내 왔으나 1960년부터 지내지 않으며 여름철 주민의 휴식처로 보호받고 있다.



▣ 조동(槽洞)
조동마을은 척번정리의 행정마을로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통폐합시 조동과 척정을 병합하여 조정리로 하였다가 1938년 행정구역 재조정시 척번정리로 개칭하여 1984년 8월 22일자 고성군 조례 제858호로 군의 리명칭 및 구역확정시 척번정리의 조동(행정리) 마을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을의 형성
조동마을이 형성된 연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척번정리 주변의 고인돌에서 청동기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돌칼 등이 발견된바 있어 이 곳에 아득한 옛날부터 조상들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현재는 전주이씨. 함안이씨, 김해김씨, 영일정씨, 전주최씨, 등 제씨가 마을을 형성하여 살고 있다.



▣ 평촌(坪村)


평촌 마을은 1914년경에 조동마을에 편입되었다가 광복 후 분동되어 1984년 8월 22일 고성군의 리동 명칭 및 행정구역 확정시 평촌마을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을의 형성


평촌 마을이 생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조동 마을에서 분동 당시 남평문씨가 6호, 청주한씨가 4호, 전주이씨가 3호 , 그 외 성씨 7호로 모두 27가구가 마을을 형성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2. 고봉리(古鳳里)
▣ 고봉마을
 ◎ 동명의 유래

구전에 의하면 조선시대에 윗마을을 고곡(告谷)이라 하고 아랫마을을 봉곡(鳳谷)이라 이름하여 1,600년 경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다. 1895년 행정구역 개편 때 고곡과 봉곡의 앞자를 따서 고봉이라 명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옛날 활(弓)을 쏘았다는 사정거리가 있고 건너편 산에 과녁판을 세웠던 것과 앞산에 ‘재’자가 붙은 건물이 있었기에 잿간이라는 이름이 유래되기도 한다.



◎ 마을의 형성
고봉 마을이 생긴 연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구전에 의하면 1,600년을 전후해 맨 먼저 고성이씨가 입주하고 다음으로 거창유씨, 밀양박씨, 김해김씨, 전주이씨, 평강채씨, 남평문씨, 경산전씨 등 현재 10여 성씨가 마을을 이루고 있다.



◎ 고봉리 느티나무
수령 약 300년의 정자목으로서 높이 30m의 수형이 양호한 나무로 잎이 균일하게 피면 모내기를 일제히 마칠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제대로 할 수 없다고 한다.



▣ 비곡(比谷)
비곡마을의 형상은 골이 깊고 산이 높으며 경지면적이 좁아 처음에는 까마귀 오(烏)자와 날 비(飛)자로 비오동(飛烏洞)으로 불리다가 1938년 행정구역 재조정시 고봉리 2구로 변경되었다가 1984년 8월 22일자 고성군 조례 제858호로 고성군의 리동 명칭 및 행정구역 확정시 비곡으로 명칭이 변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을의 형성
비곡 마을이 생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대략 1,600년 경에 영일정씨가 맨 먼저 입촌했으며 다음으로 밀양박씨와 고성박씨가 입촌하면서 마을이 형성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3.신촌리(新村里)
▣ 신촌마을

신촌 마을은 1895년(고종 32년)에 지방제도를 개정할 때 가슬(歌瑟)로 하였으며 마을 앞을 국도가 지나가면서 한 때 새들이라 부르기도 하였으나 1938년 행정구역 재 조정시 마을 뒤에 장군당 둔전밭골, 벼락식골, 후미밭골 등의 산이 있어 산세가 피파설이라 하여 마을 이름이 좋지 못하여 신촌으로 개명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을의 형성
신촌 마을이 생긴 연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대략 1,600년을 전후하여 김해김씨와 의령남씨가 정착하여 살았으며 그 후 마을 앞들과 냇물이 맑고 좋아 순흥안씨, 해주최씨, 고성이씨, 진양정씨, 거창유씨, 경주최씨, 달성서씨, 진양강씨, 수원백씨 등의 성씨가 입촌하여 130여 호의 대촌을 이루었으나 이농현상으로 지금은 53호가 살고 있다.


 


4. 오산리(烏山里)
▣ 오산
오산마을은 마을 뒤의 오두산(烏頭山 : 해발 500m)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까마귀가 마을의 수호신처럼 마을의 재앙을 막아왔다고 하여 까마귀 오(烏)자를 따서 오산(烏山)이라고 하였다 하며, 옆 마을 평촌(平村)에서 까마귀가 울면 오산마을에서 초상이 났다는 전설도 있다.



◎ 마을의 형성
오산마을의 생긴 연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구전에 의하면 마을 서쪽 산세가 마치 짐승이 누워 있는 형태로서 인근 ‘와실골’에 약 400년 전에 절(寺)이 있었는데 까마귀가 울어서 절이 폐하였다고 하며 지금도 그곳에 기와장과 절터의 흔적이 있고 ‘절꽃’이란 꽃이 매년 가을이면 피고 있어 오산마을에 사람이 살 게 된 것은 신라시대부터가 아닌가 짐작되며 한편 조선조 41년(서기 1608년) 경에 남명 조식 선생의 제자인 여양진씨 백곡선생(白谷先生)의 손자가 진주 수곡에서 산 좋고 물 좋은 이 마을을 찾아 정착하여 살면서 까마귀가 많아 ‘오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 후 청주한씨가 입촌하였다 하며 서기 1,675년 경에 경주정씨가 입촌하고 평강채씨와 전주이씨가 입촌하여 마을을 형성하였으며 지금은 밀양박씨와 전주최씨 등 52호에 137명이 거주하고 있다.
◎ 상리면 오산리 ‘독립만세’ 의거
1919년 3월 18일 상리면 오산리 한일동(韓日東)씨가 진주의 독립만세 의거에 참여한 후 동네 청년들과 의논하여 동지를 규합해 한기원(韓琪源), 진택성(陣澤成), 진정성(陳丁成), 진구성(陳九成), 진갑성(陳甲成), 진인성(陳仁成), 진익성(陳益成)씨 등이 주동이  돼  한지에 ‘독립만세’라 쓴 깃발을 만들어 들고 오산리 삼거리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하던 중 상리주재소에 파견돼 있던 일본 헌병들이 달려와서 총칼로 위협하고 강제로 해산시킨 바 있는 의거의 마을이기도 하다. (자료 : 고성군지, 전란사와 민족운동편)



▣ 중촌(中村)
구전에 의하면 한 때 마을 이름을 ‘개울’이라 하였는데 마을의 형세가 개와 호랑이가 양쪽에서 노려보고 있는 사이로 썩은 밥을 먹으러 가는 격이라 하여 ‘개올’이라 불렀다 하며 1984년 8월 22일자 고성군 조례 제858호로 고성군의 리동 명칭 및 행정구역 확정시 가동(柯洞) 마을에서 분동되어 오산리 중촌 마을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을의 형성
마을의 생긴 연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옛날 마을에 서재(書齎)가 있어 지금도 서재골이란 명칭이 있으며 임진왜란 전에 밀양박씨가 거주하였고 그 후 평강채씨, 전주최씨, 남평문씨 등 제씨가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 가동(柯洞)
가동마을은 오산리에서 분동된 마을로 한 때 마을 이름을 ‘개울’이라 칭한 바도 있으나 마을 이름이 좋지 못하다 하여 1913년 경 당시 면장이 가동으로 개칭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일명 ‘한수골’이라 부르기도 한다.
◎ 마을의 형성
본 마을이 생긴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430년경 평강채씨가 입촌해 취락이 이루어지게 됐으며 현재는 채씨, 곽씨, 박씨, 최씨, 문씨, 김씨 등 제씨가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김화홍본지논설위원 기자 / kn-kosung@newsn.com입력 : 2007년 12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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