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5학년 때 상록수를 읽으면서 언젠가는 박동혁과 같은 농민운동가가 되겠다는 꿈을 꾸었고, 채영신 같은 색시를 만나는 게 최대의 꿈이었던 귀농 도사 이병철(고성군 마암면 두호출신) 전국귀농본부장의 이야기 주머니를 풀어 나가본다.
“나는 운동이란 이름으로 평생 백수로 살아왔어.(웃음) 처음에는 오지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집사람이 지금도 마산대학교에 근무하기 때문에 마산 근교를 찾다 보니 지도에 숲안마을이 있더라고.
산중 마을이기는 한 데 더 이상 개발될 것 같지는 않고 크게 욕심내지 않고 땅에 의지하면서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선택했지. 옛날엔 비보사상(裨補思想)이라고 산에 내려오는 기운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그것을 막기 위해서 조상들이 숲을 조성했나봐.
요즘은 숲이 거의 사라지고 이름만 전해져 내려오고 있어. 한 40여 가구에 100여 명이 채 안 되게 살고 있는 마을이지. 텃밭 정도 가꾸고 저희들이 먹을 만큼의 채소와 논농사를 하고 있고 조그만 산을 빌려서 나무를 심어 놓았어.”
그가 처음 시작한 생태운동에 큰 흔적을 남긴 ‘우리밀살리기’. 한 살림의 박재희 회장과 함께 우리밀을 되살려 보자고 얘기하고 고향인 마암면 두호마을 스물네 농가를 설득해 우리밀 재배를 시작했다. 고향에 살고 계셨던 아버지의 힘이 컸다. 두호마을은 1987년, 마을 단위에서는 최초로 시국선언을 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1990년, 이 땅에서 사라졌던 우리밀 재배에 성공하고, 십만 명이 넘는 소비자를 우리밀 회원으로 모을 수 있었다.
“유기농으로 안전한 먹을거리를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했지. 우리 밥상에서 빵이라든가 과자라든가 면이라든가 하는 거의 모든 가공식품의 70~80%가 밀 제품이니까. 그럼 우리밀을 다시 심자 그래 놓고는 고향마을의 아버지께 말씀 드렸어요.
이 운동에 출자를 하고 가입한 회원이 십만 명이 훨씬 넘었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사례야. 밀은 이미 이 땅에서 사라져 버린 농산물이었는데. 그런 걸 되살려 낸 운동은 세계적으로 거의 유례가 없어요. 소비자들이 돈을 내어 밀 살리기에 출자하고, 이런 건 유사 이래 없던 일이지. 사라져 버린, 수입 밀 때문에 빼앗겨 버린, 그 빼앗긴 밀을 되살릴 수 있다면 우리가 짓고 있는 농사를 충분히 지킬 수 있다. 그런 생각이지.
지금까지 우리 운동은 우리 쌀을 지켜야 한다. 우리 쌀을 지키자. 그런 식으로 방어적이었어. 그러면 오래 갈 수가 없지. 빼앗긴 밀을 살려 낼 수 있다면 우리한테 있는 것을 지키는 것은 어렵지 않아. 문제가 아니지. 우리 밀을 되찾음으로써 지금 있는 모든 것을 다 지킬 수 있다. 지키는 정도가 아니고 제대로 일궈 낼 수 있다. 여겼어. 정공법이었지. 그때 아버지는 우리밀살리기운동본부 생산자 공동대표를 하셨어.”
-귀농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한 말씀만 해주신다면요?
“귀농은 삶의 근본적으로 바꾸는 겁니다. 삶의 전환이고, 삶의 구조조정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정말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건강하게 행복하려고 한다면, 지금 이대로의 삶이 안 되겠다고 자각이 든다면 귀농은 중요한 대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왜 귀농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를 분명하게 스스로 정리하고 결단이 섰을 때, 자연과 함께하는 삶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귀농을 해야 된다고 봅니다.” “똥은 좋은 거름입니다. 거름에 도움이 되지 않는 물질, 휴지, 기저귀, 생리대 등은 똥통 안에 넣어서는 안 됩니다. 이곳을 이용하시는 분께서는 되도록 많이 싸서 풍성한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협조해 주시길 바랍니다.”- 봉화로 귀농한 윤길학님 집 뒷간에 자리를 잡은 그는 위의 쪽지 글을 보았다.
가장 더럽고 천하다고 여긴 똥을 되도록 많이 싸서 풍성한 농사를 짓기 위한 농부의 마음과 농사의 기여했다는 보람과 기쁨을 맛보았다는 그의 마음. 만물의 모든 것을 감사하고 고마워하는 그의 마음은, 아마도 깊게 새겨진 대지의 어머니 마음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