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산교를 지났다 아무리 가 봐도 마을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고개를 넘어서니 하이면이다 이런 넘어왔구나 아무 댁이나 쑥 들어가 물었다 동산마을이 어딥니까 내려가서 오른쪽으로 가세요 길 오른쪽에는 속리산 주왕산 설악산 부럽지 않은 단풍에 산이 타는 듯하다
▶ 고성군 상리면 동산리 동산마을
# 얼음 같은 바람 솔솔, 얼음왕국 길을 잘못 드는 바람에 하이면 의원마을까지나 갔다 온 기자, 길 찾겠다고 눈 부릅뜨고 동산마을을 찾다보니 얼음골왕국이라는 간판이 보인다. 차에서 내리는 기자를 보고 네 마리는 깡깡 짖어대고, 이제 막 젖을 뗀 듯 보이는 강아지는 낑낑 안아 달라 보챈다. 동산소류지를 반 바퀴쯤 돌아 둑에 올라서니 동굴 하나가 보인다. 구절초와 개망초가 어지럽게 핀 동굴 앞에 서니 꼭 빨아들일 것만 같은 묘한 기분이 든다. 주인아주머니의 말을 들어보니 동굴 안에는 낭떠러지가 있고, 무슨 이유에선지는 모르지만 여름이면 얼음처럼 찬바람이 솔솔 불어나와 에어컨보다 더 시원하게 여름을 날 수 있단다.
# 누가 농사를 지을라 하긋노 돌이 켜켜이 시루떡 고물처럼 쌓여있다. 도대체가 길 때문인지 아니면 역사적 가치 높은 성터인지 알 수가 없다. 탁탁탁탁. 경쾌하면서도 둔탁한 그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마당 한 쪽에 퍼져 앉아 뭔가를 털어내는 할머니가 보인다. 할머니가 놀라실까 조심스레 인사를 건네고 옆에 같이 퍼져 앉아 저게 뭐냐 물었더니 “길 쌓는다꼬 그거로 안 갖다 놨드나.” 정답은 길이다. “그 길 따라 자~우까지 올라간다 아이가.” 19살에 시집와 입때껏 동산마을에서 살고 있다. 할머니는 척추 수술을 한 게 잘못됐는지 허리 아래를 도통 쓸 수가 없다. 그나마 할아버지가 베어다 준 취나물을 털어 씨를 받는 게 유일하게 할 수 있는 농사다. 할머니는 내일 할 수매 때문에 걱정이 태산이다. 할아버지 말이 20가마를 수매해봐야 100만원도 채 안된단다. “그러니 누가 농사를 지을라 하긋노”하는 할머니 목소리가 아직도 쩌렁쩌렁하다.
# 농사 다 지었으니 빚 갚아야지 취나물 터는 할머니를 뒤로 하고 동네 구경 좀 하려는데 마을회관 아래에서 웃음소리가 와하하 터져 나온다. 염치불구 안녕하세요 한 마디 들이밀며 들어서니 분홍빛 스웨터를 입은 아주머니 한 분이 쌀 자루에서 계속 쌀을 넣었다 덜었다 한다. “사돈을 주낀데 우체국서 30kg 넘는 거는 안받아준다 안하나. 그라모 보리가 좀 싼 깅께 보리로 빼고 쌀로 더 넣으모 되긋제?” 생판 처음 보는 남인데도 기자한테 이것저것 물어가며, 손은 바쁘다. 거류면 살다가 동산마을 오니 산 좋고, 물 좋고, 인심 좋고, 산새소리, 물소리 모든 게 그렇게 낭만적이더란다. 낭만파 박달순 아주머니는 사돈에게 줄 쌀을 야무지게 묶어놓고 손을 훌훌 씻는다. 쪼르르 따라가 이제 한 해 농사 지었으니 뭘 할 거냐 물었더니 단박에 “은자 빚 갚아야지”한다. 아이들은 다 어디 있느냐 물었더니 일을 돕던 막내아들을 가리키며 “저 아들도 대전에 공무원 할 거 아이가”한다. 걱정 덜어서 좋겠다 웃었더니 하하하 호탕하게 웃는다.
# 쌀 한 가마 해봐야 달랑 5만원 낭만파 박씨 아주머니께 꼬박 인사를 하고 나오려는데 크림색 고급 승용차 한 대가 집 앞에 선다. 낯선 말투로 “여기 공사하는 데가 어디요?”한다. 마을 뒤 산 중턱에는 골프연습장 공사가 한창이다. 수영장도 만들고, 그물 쳐서 골프장도 만들었단다. 김종갑 반장을 찾아 골프장 생긴다는데 그럼 논에 농약 들어가고, 피해 없겠냐, 걱정스레 물었더니 괜찮단다. 골프연습장이라서. 그나마 다행이란다. 마을사람들은 골프연습장보다도 당장 내일 있을 수매가 더 걱정이다. 한 가마에 5만원도 안되는 쌀값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 뼈 빠지게 농사지어봐야 인건비도 제대로 나올까 말까다. 쌀가마니를 옮기는 어르신들 이마에 한숨이 점점 깊이 패인다. 그놈의 FTA인가 때문에 쌀값이 더 떨어질 텐데, 내년 농사는 또 어찌 지을꼬.
담장 아래 맨드라미가 늘어선 풍경이 기자는 살아보지도 않은 50년 전으로 돌아간 듯 야릇한 기분이 드는 동산마을. 하지만 구경꾼인 기자 눈에는 아련하게만 느껴지겠지만, 어르신들께는 그렇겠다. “50년 전에는 사는 게 이렇게 팍팍하지는 않았는데...바뀌지 않은 건 풍경 뿐이지...”문득 그 말이 생각났다. 농자천하지대본. 농업은 천하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큰 근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