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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추억 담긴 밤내다리 있는 ‘죽동마을’

죽계리 죽동 장계 평계 3개 마을로 형성, 진양강씨 의령남씨 안동장씨 등 30여 성씨 집성촌 이뤄
/김화홍논설위원 기자 / kn-kosung@newsn.com입력 : 2007년 11월 23일


 
이당리 이곡마을 경주최씨문중 재실 추모재, 삼산면 병산마을 가는 소금쟁이 ‘소금산’이라  불러
장계마을에 도깨비가 놓은 돌다리 경지정리로 사라져
이당리 황불암 오선달 송덕비 의성재 사적 흔적 남아


 














13. 죽계리(竹溪里)
죽계리는 본래 고성군 동읍면의 지역으로써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죽동(竹洞)과 장계(長溪)를 병합하여 죽계리라 하여 철성면(고성읍)에 편입되었으며, 장계마을이 다시 장계와 평계(平溪)로 분동되어 현재의 죽계리는 죽동, 장계, 평계의 3개 행정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 죽동(竹洞)
옛날에 지금의 죽동 동쪽에 위치한 대밭등이라는 등성이 위에 큰 대밭이 있었다고 하며 이 대밭 주위에 형성된 마을이라는 뜻에서 죽동마을이라 불리게 되었다.
◎ 마을의 형성
임진왜란 이후, 대가면에서 흘러드는 고성천 주변으로 마을이 생기기 시작하였으며 진양강씨, 김해김씨, 의령남씨, 인동장씨, 경주정씨 등이 1880년 경부터 입촌하기 시작하여 현재는 위 성씨 외에 30여 성씨가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 장계(長溪)
일제 하에서는 영희(永喜)부락, 해방 후에는  죽계(竹溪) 2구로 불리어 온 장계마을 은 긴 시내를 끼고 있는 곳이라 하여 이러한 동명이 붙여졌다.
◎ 마을의 형성
마을이 형성된 연대는 비교적 짧은 편으로 약 100여 년 전부터 김해김씨, 김녕김씨, 수원백씨 등이 농사짓기에 편리한 이곳에 터를 잡아 마을을 이루기 시작하여 지금은 위 성씨 외에도 20여 성씨가 거주하는 제법 큰 마을이 되었다.


◎ 전설
◇도깨비가 놓은 다리
지금은 경지정리를 하여 흔적도 없으졌으나 옛날 죽계리 장계마을에 있었던 돌다리에 얽힌 전설이다.
확실한 연대를 알 수는 없으나, 예전의 이 마을 앞을 흐르던 진소리라는 강을 건너지 않고는 마을사람들이 고성평야의 넓은 들판으로 나갈 수도 없고, 거류면으로 갈 수도 없었다고 한다.
그런 까닭으로 이곳 주민들은 진소강에 다리를 놓기 위해 여러모로 공을 들였으나 다리를 놓을 방도는 없고 하여 고민하던 중에 어느 날 마을의 대표자인 이장의 꿈에 도깨비가 나타나 “우리가 다리를 놓아줄 터이니 걱정하지 마라” 하더란다.
이장은 꿈이 하도 이상하여 이튿날 동네사람들에게서 꿈에서 들은 그대로를 알렸다. 주민 모두가 바라던 바를 이뤄주겠다는 이장의 꿈이야기는 그날 밤 동네 사람들의 시선을 모두 진소 강가로 모이게 했다.
아니나 다를까 밤이 깊어 사방이 깜깜한데 어디선가 하나 둘 불빛이 나타나기 시작하더니 불빛들이 무리지어 부산하게 움직이는 것이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동네 사람들이 전날밤 불빛이 움직이던 진소강을 찾아보니 사람의 힘으로는 움직이기조차 어려운 커다란 돌들이 징검다리를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
이후, 그 다리를 이용하여 사람이 오갈 수도 있고 장마가 져도 홍수 피해를 입지 않아도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그 돌다리가 있었던 곳에는 도깨비가 간혹 나타난다고 하는데, 경지정리가 된 후 그 돌다리의 흔적은 찾을 길이 없어 아쉬울 뿐이다.


▣ 평계(平溪)
흔히 ‘쏙시’라고 불리는 평계마을은 유서  깊은 속싯개에 인접한 마을로 본래 장계마을의 일부였으나 한일협약 후 분동되었으며 마을 앞이 넓은 들판이고 속싯개로 흘러드는 고성천이 마을과 들판 사이를 가로지르는 지형으로 인하여 평계라는 동명이 되었다.
◎ 마을의 형성
마을이 생긴 연대는 오래디지 않았다. 구전에 의하면 약 150여 년 전 김녕김씨(金寧金氏)가 먼저 입촌하였고, 뒤이어 성산이씨, 함안이씨, 진양강씨, 창원황씨, 양천허씨 등이 입촌하여 마을을 이루었으며, 현재는 위 성씨 외에 10여 성씨가 거주하며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14. 율대리(栗垈里)
본래 고성군 동읍면의 지역으로써, 지형이 밤처럼 생겼다 하여 밤디, 밤대 또는 율대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율대리라 해서 철성면(고성읍)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율대리는 단일 법정리로 이루어져 있다.



◎ 동명의 유래
율대마을은 약 500여 년 전 윤씨와 황씨만이 거주하는 두 성씨의 집성촌이라 하여 윤황촌(尹黃村)이라 일컬었다고 전해진다.
그후 마을 주변에 밤나무가 많아서 밤대라고 칭하였으며 이를 한자화한 것이 율대이다.


◎ 마을의 형성
마을이 형성된 연대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15세기 후반 파평윤씨가 입촌하였고 18세기 후반에는 고성박씨, 전주이씨가 입촌하였으며, 이후 창녕조씨, 김해김씨, 진양정씨가 입촌하여 마을을 이루었다. 지금은 이 외에도 다양한 성씨가 거주하고 있다.


 


15. 이당리(梨堂里)
본래 고성군 상서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이동, 우곡동, 당동을 병합하여 이동과 당동의 이름을 따서 이당리라 하여 삼산면에 편입되었다가 1983년 2월 15일자로 고성읍에 편입되었다. 현재의 이당리에는 면전(棉田)과 이곡(梨谷)의 두 개 마을이 있다.


▣ 면전(棉田)
마을 앞 국도변에 있는 넓은 밭들은 옛날부터 면화 재배로 유명했다. 이런 연유로 이 마을을 예전에는 면밭골이라 불렀으며 1914년 행정구역이 편제되면서 면밭을 한자화하여 면전이라 칭하게 되었다.


◎ 마을의 형성
마을이 생긴 연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맨 먼저 이 마을에 터를 잡은 성씨는 보성선씨(寶城宣氏)로 1690년에 입촌하여 사방에 흩어져 살고 있고, 뒤이어 당골에는 진양강씨, 면밭골에는 밀양박씨, 황불암에는 달성배씨, 장수황씨가 입촌하였으며 여타 지역에 진양정씨, 함안이씨, 김해김씨 등이 입촌하여 마을을 이루었고 지금은 위 성씨 외에도 여러 성씨가 거주하고 있다.


◎ 사적 및 기타
◇ 오선달 송덕비 : 마을 입구 도로변에 있는 해주오씨(海州吳氏)의 송덕비로, 부자이던 오선달이 많은 소작인들에게 크게 은혜를 베풀어 소작인들이 푼돈을 모아 세운 것이다.
◇ 의성재(儀誠齋) : 면밭골에 있는 밀양박씨 입향조(入鄕祖)를 모시는 재실이다.


▣ 이곡(梨谷)


배나무가 많은 골짜기라 하여 뱃골이라 불리는 동네가 이곡마을 내에 있다. 이곳은 이동(梨洞)이라고도 부르는데 뱃골의 한자말이다.
이곡마을은 이뱃골의 배나무 ‘이’자와 골짜기라는 뜻의 ‘곡’자가 합해져 탄생한 이름이다.


◎ 마을의 형성
전하는 바에 의하면 200여 년 전인 1,800년경 연안차씨(延安車氏)와 파주염씨(破州廉氏)가 맨 먼저 입촌하여 이 곳에 터를 잡았다고 한다.
지금은 함안이씨와 경주최씨가 대중을 이루는 가운데 연안차씨, 김해김씨, 전주최씨, 달성배씨, 김해허씨 등 10여 성씨가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 사적 및 기타
◇ 추모재(追慕齋) : 경주최씨 문중의 재실이다.
◇ 소금산 : ‘소금쟁이’라고도 하는데 삼산면 병산마을로 넘어가는 높은 산등성을 일컫는다. 무엇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붙었는지 그 내력을 잘 아는 사람이 없으나, 옛날에 이곳을 넘어 어촌의 사람들이 소금을 팔러 오곤 하지 않았나 추정하고 있다.

/김화홍논설위원 기자 / kn-kosung@newsn.com입력 : 2007년 11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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