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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2년 통영부에서 옮겨와 교사리 현위치에 고성향교 세워 교동마을 향교마을로 칭해 읍정개마을, 교동마을 주민 전설 속 돌탑 때문에 옥신각신하기도
토신과 곡신에게 제사 지내던 사직단이 있어 ‘사동마을’로 불려
7. 기월리(基月里)
본래의 고성군 서읍면의 지역으로 계화동(桂花洞)이라 불리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신기동과 신월리를 병합하여 기월리라 해서 철성면(고성읍)에 편입되었고 1979년 기월마을과 신기마을로 나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기월
예전에 대가면 유흥리에서 이곳 기월마을까지 십리길이나 송림(松林)이 있었다고 전하여 지고 있으며 그 송림의 끝이라 하여 터기(基)자를 따오고, 고성읍 서외리와 기월리의 경계변에 ‘월립지’라는 못이 있었다 하여 여기서 달월(月)자(字)를 따와 기월리라 하였다고 한다.
◎ 마을의 형성
마을이 생긴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고성김씨와 문화류씨가 비교적 많이 살고 있다. 자연취락지역은 봉림, 중곡, 소진골, 사작골, 잿골, 양진골 등으로 형성되어 있다.
◎ 전설
기월마을을 예전에는 계화동 또는 계동이라 불렀다. 계화동이란 이름이 생긴 연유는 이곳에 큰 계수나무가 있었다고 하는데서 비롯되었다고 전한다.
계수나무는 유흥리에서 이 마을에 이르기까지 우거졌던 소나무숲의 끝자락에 있었다. 옆에는 또한 어느 부자의 고택이 있어 계수나무에 꽃이 만발할 때면 주위 풍광이 이를 데 없이 아름다웠다. 당시만해도 인심이 후하던 시절이라 원근각처에서 찾아온 구경꾼들이 이 부잣집에 들려 하룻밤 묵어가곤 하였다. 식객이 끊일 날이 없자 이 집 안주인에게 고민거리가 생겼다.
늘상 잔반(殘飯)이 남곤하여 그 처리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식은 찬밥을 주인 식구들이 먹어치우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연중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느 날 이곳을 지나가던 노스님에게 안주인은 넉넉하게 시주를 하고나서 스님에게 자신의 고민을 얘기했다. “스님, 항상 남아도는 잔반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요” 그러자 스님이 일러주기를 “개를 한 마리 잡아 옥곡산봉(지금의 마을 앞동산)에 있는 샘에 버리시오. 그러면 찬밥을 먹는 일은 없을 것이오” 안주인은 스님이 일러준 대로 곧장 실행에 옮겼다.
그 후, 스님의 말대로 이 부잣집에는 식객이 현저히 줄어들었다고 하는데 그와 함께 부잣집의 가산도 차츰 기울어 마침내는 하루 끼니를 잇지 못할 정도로 가난해지고 말았다고 한다. 그때 그 스님이 계수나무의 가지를 꺾어가서 그 후로는 계수나무에도 꽃이 피지 않았다고 전한다.
▣ 신기(新基)
본래 고성군 서읍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신기동과 기월리를 병합하여 기월리라 불렀는데 1979년 다시 기월마을과 분동되어 신기마을이라 명명되었다.
◎ 마을의 형성
마을은 3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졌고 집단 성씨는 없으며 현재는 진양강씨, 김해김씨, 경주김씨, 밀양박씨 외 24성씨가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 사적 및 기타
◇ 왜촌
본 마을 내 잿골 동쪽에 있는 마을로 해방 전 일본사람들이 이곳에 살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지금도 속칭 이렇게 부른다.
8. 교사리(校社里)
교사리는 고성읍의 중심지인 성내리에서 약 1km 떨어져 있다. 본래 고성군 서읍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교동과 사동을 병합하여 교사리라 해서 철성면(고성읍)에 편입되었다가 1957년 다시 교동마을과 사동마을로 나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교동(校洞)
예전의 교육기관이던 향교가 자리한 마을이라 해서 교동이라 불린다. 고성향교는 조선 영조 2년(1726년)에 통영부에서 이곳으로 옮겨와 지금까지 보존, 관리되고 있다. 방학 때면 한문강좌가 열린다. 이런 연유로 교동마을을 향교마을이라 부르기도 한다.
◎ 마을의 형성
조선 영조 2년(1726년)에 향교가 이곳으로 옮겨지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하며 그 이전에도 거주민이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마을을 개척한 성씨는 고성이씨, 밀양박씨, 김해김씨 등이며, 당시에는 30여 호에 불과했던 마을이 근년에 아파트단지가 들어서면서 주거민이 대거 늘어나 지금은 321가구에 주민수 1,105명의 큰 마을이 되었다.
◎사적 및 기타
◇ 교사리 석불
머리 부분이 파손된 석불 2구가 금강역사 1구로 이루어져 있어 일명 교사리 삼존석불이라고도 부른다. 원래는 이곳의 밭둑에 흩어져 있던 것을 1942년 유보성(柳普城) 화상이 석불암을 지어 안치하였으며, 그중 중앙의 석불은 좌불인데 두부 및 수인 부분이 파손되어 석고로 복원하였기 때문에 확실한 형태를 알 수 없다.
좌측에 위치한 보살상은 입상으로 지장보살상이나 역시 수족부와 두부가 파손되어 복원한 것이며, 우측의 관세음보살상은 보살상이 아니고 금강역사상인데 역시 두부가 파손된 것을 석고로 복원하면서 관세음보살상으로 만들었다. 가슴 위에 얹힌 억센 오른 주먹과 내려잡은 왼손, 팔다리의 근육 등은 이것이 보살이 아니고 금강역사상임을 잘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주변에 흩어져 있는 광배석과 석사자상, 기와 파편으로 미루어 보아 이곳 일대가 옛 절터임을 알 수 있으며, 이 석불은 경상남도지정 유형문화재 제122호이다.
◇ 고성향교
교사리 270-1번지에 자리한 고성향교는 옛날의 관학기관으로써 조선 영조 2년(1726년)에 통영부에서 이곳으로 옮겨졌다.
경내에는 공자 외에 18현의 위패를 모신 정면 3칸, 측면 3칸 맞배지붕의 대성전이 있고 강당인 정면 5칸, 측면 2칸 팔작지붕의 명륜당, 정면 3칸, 측면 2칸 팔작지붕의 풍화루등이 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19호이다.
◎ 전설
◇ 희한한 돌탑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고려시대부터 고성읍 교사리 석불암 절 앞에 조그마한 돌탑이 있다. 옛날에는 산기슭에 있었겠지만 시대가 변함에 따라 지금은 교사리 들판가운데 세워져 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이 돌탑을 없애면 교사리의 맞은편 읍정개 지금의 구암마을 처녀들이 정신이상이 들어 집을 나간다는 전설이 있다.
약 100여 년 전 이곳 주위의 농경지를 확장하면서 교동마을 주민들과 읍정개 마을 주민들 사이에 대립이 있었다고 한다. 이 돌탑을 없애버렸기 때문이었다.
읍정개 주민들은 교동마을로 몰려와 돌탑을 다시 쌓으라며 거세게 항의했다. 교동 주민들은 농경지 확장은 소득 증대를 위해 필요한 일이고 돌탑의 전설을 믿는 것은 미신에 불과하니 그럴 수 없다며 맞섰다. 그러자 읍정개 주민들은 그들의 말이 미신인지 사실인지는 확인해 보면 알 것 아니냐며 따지고 들었다.
며칠을 두고 옥신각신하다가 교사리 주민들은 읍정개 주민들의 말대로 읍정개 처녀들이 정신이상이 들어 집을 나간 것이 사실이면 돌탑을 다시 조성하기로 하고 읍정개 마을을 가보았다. 그랬더니 읍정개 주민들의 말은 거짓이 아닌 것이 판명되었다. 집집마다 정신이 성한 처녀가 없고 그중 나이 어린 처녀 하나는 머리를 산발한 채 거리를 헤매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교사리 주민들은 마을로 돌아와 그 돌탑을 그 자리에 다시 조성하였다. 그 뒤 며칠 후 읍정개 마을 처녀들의 정신병이 전부 나았다고 한다. 이 희한한 돌탑은 지금도 논 가운데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 사동
옛날에 이 마을에 토신과 곡신에게 제사지내던 사직단이 있어 사직동이라 불렀는데 이를 줄여 사동이라 하였다고 한다.
◎마을의 형성
약 130여 년 전부터 마을이 형성되어 왔다고 하며, 1914년 행정구역 폐합 시에 교동과 합해져 교사리의 일부가 되었다가 1957년 다시 교동마을과 나뉘어 사동마을이 되었으며, 현재의 거주민은 김해김씨, 고성이씨, 밀양박씨, 진양정씨 등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