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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8일(토) 재경 향우회 발족 54년 만에 처음으로 2007년도 재경 향우회 고성인의 한마당 축제 겸 고성 조선산업 특구지정 축하 잔치를 개최함에 자리를 함께 했다.
고성인의 긍지와 자부심의 바탕위에 화합과 인정이 넘치는 포근하고 따스한 어머님의 품속 같은 부드러움과 섬세한 웃음을 찾을 수 있었고 회포를 나누어 맛볼 수 있는 자리였음은 아마도 타향살이 40여년에 향수의 목마름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재경 향우회 신대도 회장께서 진심어린 정성과 마음을 다한 심혈의 작품으로 그 누구도 그 어느때도 생각지 못했던 한마당 잔치의 구상은 놀라웠다.
우여곡절로 추진위원회를 발족하여 첫 작업을 시작하는 단계에 생각지도 않았던 건강이 좋지 않아 2개월여 병원에서 치료 중에도 걱정이 태산 같았을 것이다. 미루어 짐작되어 관심과 뜻이 있는 향우 선,후배님들의 안타까운 마음으로 애를 태우기도 했는데 옛말에 “선한 끝은 있어도 악한 끝은 없다고” 했듯이 평소 후덕한 인품으로 존경과 사랑을 받았기에 다행히 회복이 빨라 행사에는 아무 지장 없이 진두지휘 할 수 있었음이 기쁘고 고마웠다
고성인의 한마당 축제에 흥분되고 도취된 마음이 아직 가시지 않았는지 하고 싶은 제하의 본말이 전도되어 가고 있다.
우리 고성의 옛 전통문화들 중에 이번 행사에 특이한 것은 총쟁이국밥, 월평리 구장술이라는 프로그램 중에 총쟁이국밥이 등장했다. 어떤 큰 뜻이 그 국밥 그릇에 담겨 있는지를, 맛있다고 한 그릇씩 다 먹으면서도 유래를 몰라 좌중좌담을 나누기는 했으나 잊혀져가는 우리 고장의 면면촌촌 곳곳마다 회한이 스며있는 아름다운 구전 및 흔적들이 수없이 많을 것이다.
필자가 6.25 동족상잔의 사변을 겪고 난 후부터 총쟁이국밥집 옆에 살았기에 총쟁이 국밥의 유래를 알고 있는대로 적어 보려고 한다.
지금은 시대의 변천과 경제 성장의 발전과 더불어 공설시장이 대형화되어 있지만 옛날 고성의 재래시장은 어시장(현재도 평일에는 개장)을 중심으로 제반 품목의 상거래가 이루어졌는데 닷새만에 열리는 5일 장날(1일, 6일)에는 군민의 잔치나 다름이 없었다. 장날 장터에 오면 친척 친지도, 자주 못보던 사돈도, 선·후배도, 오랜만에 반가운 사람 만날 수 있었기에 “할 일 없는 장에 볼 일 없어도” 닷새 장날이 기다려졌고 시장 주변 이것저것 한참 구경하고 한바퀴 돌고나면 시장기가 (허기)들어 요기를 해야 했다.
시장터에는 많은 갖가지 먹음직한 음식 점포도 많았지만 그 중에도 대표적으로 어시장 동편에는 (옛 가야극장 앞) 총쟁이국밥집이 있었다. 반대편 서편에는 (평화당 약방 앞) 마가집(馬氏宅) 돼지국밥집으로 가히 쌍벽을 이루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장보러 와서 생산품목값이 올라 호주머니 형편이 조금 괜찮으면 조금 값비싼 총쟁이 쇠고기 국밥 한 그릇에 막걸리 한 잔을 했다.
가족과 가정을 위해 이것저것 물건을 사고 호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못하면 조금 값싼 마가집 돼지국밥에 탁배기 한사발이면 세상 부러울 것 없이 허리 쭉 펴고 지게 목발 장단맞추어 콧노래 흥얼거리면서 귀가길 멀다 않고 돌아와 편히 쉬는 밤이기도 했다.
그 중에도 꼭 총쟁이 국밥에 얽힌 미담을 전해 훈훈한 할머니의 정을 되새기며 전하고 싶어서 이렇게 장황하게 적고 있다.
6.25사변 이후 모두가 어려운 시기였기에 거리에는 걸인들이 참으로 많았다. 거제도 포로 수용소에서 자유를 찾아 몸은 풀려 났지만 호구 지책은 어려웠던 시절이라 여기 저기에서 천대를 받은 때였기에 장날 장터 갖가지 음식점에는 주인과의 사이에 된소리가 나기 마련이었다.
총쟁이 국밥집은 제일 큰 국밥집이고 거기다 쇠고기 국밥이나 국물이라도, 돼지국밥 국물보다는 한수위라 밥때가 되면 걸인들은 줄을 서기 일쑤였다.
그럴때면 일하는 아주머니들은 걸리적거리기도 하고 남루한 의복에 간수 못한 모습들이라 냄새도 나고 해서 손님들 비위 거스를까봐 멀리 떨어지든지 가라고 고래고래 짜증을 낼라 치면 총쟁이 국밥집 할머니 (故 박덕선 여사님)가 있었다.
푹신한 방석에 앞섶에 큰 전대(돈주머니)를 차고 앉아서 일하시는 분들께 하신 해학적인 말씀은 “야이 사람들아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펄펄 끓는 국물 한 쪽식 나누어주고 큰 가마솥에 물 한 쪽 더 부으면 되는 인심을 왜 그렇게 야멸차게 하느냐고 타이르시면 일하는 분들은 멋쩍은 웃음으로 넘기곤 했다.
그 시절을 옆에서 본 사람으로 이제 와서 생각하면 코끝이 시큰해지기도 한다. 더욱이 그런 총쟁이 국밥집 할머님의 인심을 세월이 언제까지나 붙잡아 주질 않아 할머니께서 세상을 이별하고 영면하신 그때 상가(喪家)의 모습은 주위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던 잊지못할 사연은 따끈한 국 한 쪽에 흐뭇했던 걸인들이 할머님의 고마움에 조금이라도 보답하려 했다.
밤내천에서 모든 때 씻어내고 상가의 문상객들의 잔심부름을 했다는 전대미문의 아름답고 전설같은 사실을 지금 고성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과연 몇 사람이나 기억하고 있을까? 맺음말을 하면 총쟁이 국밥의 유래 중에는 첫번째는 총쟁이 쇠고기 국밥맛이 일품이요, 두번째는 할머님의 넉넉한 인심이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 세번째는 그 할머님의 후덕하심이 손자이신 김화영(삼풍주유소 회장)님께 전수되었다. (실명을 거명한 죄 용서바라며) 고향의 일이나 고향인의 선·후배들에게 봉사와 희생에 소리없이 헌신하고 계심이 이심전심으로 회자 되고 있음에 박수를 보낸다.
누구나 총쟁이 쇠고기 국밥집앞을 지나칠때면 부글부글 푸짐하게 끓는 냄새를 큰 숨으로 맡고 지났는데 할머님의 인자하신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아련함이 눈과 마음을 아리게 하기에 사실을 포장하는 미사여구(美辭麗句)가 왜 필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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