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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송학동 고분군은 고자국(古自國)을 대표하는 대형분으로써 그 가운데 제1호분은 주지하다시피 외형이 일본에 있는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과 유사하다는 견해 발표되어 한ㆍ일 양국의 고고학계와 사학계에서 뜨거운 관심사로 등장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지난 1999년 말부터 고성군에서는 송학동고분군 정비계획을 수립하고 제1호분을 비롯한 그 주변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고분에 대한 시굴조사를 실시하여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유적 정비의 방향을 설정하는 자료로 활용하기로 하였다.
그 과정에서 동아대학교 박물관이 시굴조사를 담당하여 예정대로 조사를 실시한 결과 제1호분은 전방후원분이 아니고 3기 이상의 대소고분이 중복되어 있다는 것을 현장설명회를 통해 보고하게 되었다.
당시 문화재위원들로 구성된 지도위원회에서는 사안의 중요성을 감안하고, 정밀발굴조사를 통해서 보다 구체적인 사실을 확인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되어, 2000년 7월부터 현재까지 제1호분에 대한 정밀발굴조사를 실시하게 되었다.
Ⅱ. 이번 조사대상인 제1호분의 기본적인 축조형태는 독립된 구릉 정상부를 남-북으로 일단 삭평한 뒤 그 위에 주변 논과 구릉에서 운반해 온 흑갈색 또는 적갈색, 밝은 황색 등의 점토와 산토를 이용하여 유사판축(類似版築) 상태로 먼저 분구(墳丘)를 조산(造山)하고 그 속에 다시 석곽 또는 석실을 설치하는 순서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유구(遺構)가 지상의 조산된 부분에 설치되는 것이 다른 가야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축조수법이라고 할 수 있다.
분묘는 남-북으로 뻗은 구릉 위에 모두 3기의 원형 분구(1A호분, 1B호분, 1C호분)를 가진 것이 서로 중복해서 연결된 상태로 배치되고 봉토한 생토층에는 보다 이른 단계에 설치된 목곽요가 위치하고 있는 상태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외형상 대형 분구로 보이는 3기의 고분에 대해서만 구체적인 특징을 파악해 보기로 한다.
① 1A호분 과거 후원부(後圓部)로 알려졌던 남쪽부분에 해당하며 송학동고분 가운데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다. 유구는 조산해서 축조된 둥근 분구 정상에서 얼마 안 되는 깊이에 모두 11기의 수혈식 석곽을 배치하고 있다.
석곽은 분구 정상 중앙부를 중심으로 동-서 장축의 초대형 세장형 석곽 4기를 거의 나란한 방향으로 배치하고 그 주위에 다시 7기의 소형 석곽들을 장축 방향에 관계하지 않고 부채꼴로 배치한 상태이다.
그 가운데 중앙에 위치한 4기는 다시 2기씩 짝을 이룬 상태이고, 중앙에 위치한 가장 큰 1A-1호는 길이 10m, 폭 1.4m정도 규모이다. 이들 석곽들은 주로 점판암 제 판석을 눕혀서 쌓고 그 위에 장대석을 걸쳐 개석으로 삼고 있으며 바닥에도 소석을 깔아 놓았다.
그리고 석축 뒤편의 보강 토와 개석 상면의 이음새 부분에는 적갈색 산토를 깔거나 채워 밀폐시키고 그 위에 다시 흑색점토를 덮어 다진 뒤 잔디를 심어 마감하였다. 그중 중앙에 위치한 대형석실이 일제시대 조거용장(鳥居龍藏)에 의해 조사된 것이며, 주위의 소형 석곽들은 일부 도굴된 것도 있지만 원상을 유지하고 있는 것도 있다.
조산한 분구를 다시 파서 그 속에 석곽을 배치하는 과정에서 중복 또는 보강토의 교란상태 등 매장 당시의 특징을 통해, 축조순서의 선후관계가 분명히 밝혀져서 이들 석곽들이 동시에 설치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유물은 도굴로 대부분 훼손되었지만 장경호, 유공광구소호, 고배, 개배, 마구류 등이 부분적으로 잔존하여 석곽 상호간의 축조시기나 재지계와 외래계토기의 분류 등 이 고분의 성격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다.
② 1B호분 1B호분은 과거 전방부로 알려진 부분이다. 분구는 역시 검정색 점토로 조산되었고 표토층에서 2m정도 깊이에서 장축을 동-서 방향으로 하는 장방향 대형석실이 나타났다. 그리고 서남쪽과 서북쪽 봉토 층에서도 배장이나 추가장으로 추정되는 소형 석곽이 나타났다. 그런데 이 고분은 묘실이 가야 묘제의 전형으로 알려진 수혈식 석곽이 아니고 서쪽 단벽 중앙에 연도와 그 끝에 묘도를 갖춘 횡혈식 석실이라는 것이 밝혀져 주목되었다.
즉 석실은 얇은 판석을 눕혀 평면 장방형으로 사벽을 축조하고 그 위에 장대석을 걸쳐 평천청 개석으로 삼는 형태는 일반 가야지역 석곽묘와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서쪽 단벽 중앙에 연도를 두고 그 내외 양쪽으로 석문을 배치하며 석실과 연도 사벽과 천정부에 붉은 채색으로 도장한 것은 가야지역에는 처음 확인된 사실이다. 조사 당시 사벽 면에 도장된 채색이 내부 습기로 대부분 탈락되었지만 당초에는 벽면에 점토를 먼저 바르고 그 위에 붉은 채색이 전면에 걸쳐 도장되었던 것이다.
특히 연도부의 좌우 문주석과 상하 지방석과 중방석 그리고 석실의 남쪽 장벽 상단부에 등간격으로 박혀있는 위장막 설치용으로 추정되는 철못 등의 특징은 가야지역 고분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는 것이다. 석실의 크기는 길이 670㎝, 폭 200㎝, 높이 158㎝이고 연도는 길이 315㎝, 폭 100㎝, 높이 148㎝이다.
유물은 역시 도굴로 대부분 훼실되었지만 일부 잔존한 유대장경호, 대호, 유공광구소호, 개배 등 토기에서 고성지역의 재지계와 신라, 백제, 그리고 일본 등 외래계로 구분할 수 있는 것이어서 주변지역과의 교류관계를 어느 정도 파악 가능한 것이다.
③ 1C호분 남-북으로 위치한 전기한 두 고분 사이에 1C호분이 있다. 역시 정상부에서 2m정도 깊이에서 동-서 장축의 석실 상단부가 나타났다. 처음에는 2기의 수혈식 석곽이 배치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으나 금년도 조사에서 횡구식 대형석실이 잔존하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현재 조사를 진행 중이지만 석실은 서쪽에 묘도를 배치한 평면 장방형의 것으로서 궁륭상 천장과 바닥에는 율석(栗石:단단한 돌)을 깔았는데 도굴로 천정부와 남쪽 장벽이 대부분 훼손된 상태이다.
이 고분은 위치나 구조상으로 보아 3기 가운데 가장 늦은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잔존한 유구 규모나 형태로 미루어 보아서는 전기한 두 고분보다는 분구가 더 높게 보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까지 확인된 유구 크기는 길이 560㎝, 폭 260㎝, 높이 240㎝이다. 유물 도굴로 대부분 훼실되었으나 북쪽 장벽 아래 상면에 안치된 피장자 것으로 추정되는 등자(말을 탔을 때 두발로 디디는 제구), 도자(刀子:작은칼), 요대(腰帶), 귀걸이, 팔찌, 청동제 고배 등 금속제품이 일부 수습되고 있다.
이밖에도 앞에서 잠깐 언급한 것과 같이 3기의 고분 하층과 주변에서 소형 석곽묘와 목관묘 흔적들이 확인되고 있다. 이들 소형분은 후에 대형분이 설치되는 과정에서 파괴되는 수난을 입은 것으로 판단되지만 그 배경은 자세하지 않다.
Ⅲ. 이번 송학동 제1호분 조사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이 분명해졌다고 할 수 있다. 먼저 이 고분을 축조하는 과정에서 어떤 사전의 계획이나 배경 위에서 축조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종전의 일부 주장과는 달리 전방후원분이 아니고 3기의 원형분이 서로 축조시기를 달리하면서 연접해서 중복 배치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 고분에 관심을 가진 연구자들 가운데는 전방후원분은 아니지만 애당초 계획에는 그런 것을 의식하고 축조한 것이 아닐까 또는 경주지역의 황남대총과 같은 중복된 신라고분과도 연관해서 검토할 필요성이 있지 않을까 하는 의견도 있다. 물론 충분히 고려되어야 할 사항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송학동고분군이 대부분 남-북 또는 동-서로 2기씩 각각 짝을 이루어 분포하고 있다는 점과 최근 조사 보고된 나주 복암리 고분에서 시기를 달리하는 유구들이 중복되어 나타난 점, 복암리고분 출토품 가운데 유공광구소호는 송학동고분 출토품과 그 특징이 유사하다는 점, 그 축조시기에 있어서 대차가 없을 것이라는 점 등도 이 고분을 이해하는데 하나의 주목할 사항이라고 부기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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