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자란만 바다는 청정해역인가?
김열규본지논설위원 기자 / kn-kosung@newsn.com 입력 : 2007년 09월 09일
반세기를 훌쩍 넘긴 타향살이 끝에 고향 땅, 고성으로 돌아 온 것은 1991년이다. 모처럼의 환향을 고성만과 자란만은 푸르게 싱그럽게 반겨 주었다. ‘청정 해역!’, 이름 그대로 고향바다는 맑고 푸르고 화사했다. 바닷가에 설 때마다 ‘돌아오기 얼마나 잘했느냐!’고 우쭐대곤 했다. 집에서 가까운 동화리 바다에서 수영을 얼마나 즐겼는지 모른다. 늦은 봄부터 시작해서는 이른 가을까지 나는 물장구를 치는가 하면 제법 먼 거리를 두고서 원영(遠泳)을 하곤 했다. 멱 감고 나면 온 몸의 살갗이 시원하고 말끔했다. 일부러 목욕한 것 같기도 했다. 집에 와서 일부러 웃물로 씻을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이젠 그건 모두 꿈이다. 수영 포기한 지는 8년도 넘었다. 뿐만 아니다. 아침저녁, 하일면 일대의 해변을 산책하는 것도 문득 문득 망설여지곤 한다. 늘은 아니지만 코를 싸매고 싶어질 때도 아주 없지 않다. 모래펄은 눈뜨고 못 볼 지경이다. 해변 가까운 물밑에는 해초 한 오리도 보이질 않는다. 그 흔하디 흔하던 ‘잴피’도 눈을 씻고 보아도 안 보인다. 이게 웬일일까? 해초는 육지로 치면 각종 풀 같은 것이다. 풀이 자취를 감춘 산과 들이라니, 그건 상상도 할 수 없다. 한데 자란만 물가 어디에서도, 요 수 삼년 안에 내 눈에 ‘바다 풀’이 띈 적이 없다. 멸종하다시피 한 모양이다. 이럴 수가 있을까? 풀 없는 육지가 사막이라면 해초 없는 바다는 ‘해막(海漠)’이라 해야 하는 걸까?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아리고 마음이 쓰리다. 어쩌다 이 고성의 청정해역이 이런 지경이 되었을까? 궁금하다. 답답하다. 그러고 보니, 해변의 물밑이 온통 누렇다. 거무죽죽하기도 하다. 진흙인지, 무슨 오염물질이 쌓인 것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고기 잡는데 썼을 그물 찌꺼기 말고도 굴이나 피 조개를 양식하는 데 사용하였을 소위 ‘부이’의 뿌연 부스러기들이 여기 저기 널브러져 있기도 하다. 생선 양식장 가까이의 바다에는 녹조가 독살 맞도록 껴 있다. 그런 바닷가에 일부러 돌을 세차게 던지면 물 바닥에서 뜻밖에 흙먼지가 누렇게 피어난다. 내가 내 눈을 믿을 수가 없다. 사막에 견주어질 ‘해막’만 해도 그나마 다행일 것 같다.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오물 처리장 같은 고약한 인상을 아주 지우기는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우리들의 바다, 자란만을 감히 ‘오염 해역’이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다. 적어도 고향을, 우리들 고성인의 삶의 터전을 그렇게 욕되게 부를 수는 없다. 하지만 지금의 이 ‘해막’ 상태를 언제까지나 모른 척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고향에 대한 ‘불효’일지도 모르고 심지어 우리들 삶의 바탕에 대한 배신일지도 모르지 않겠는가? 그건 사랑해 마땅한 우리들 누구나의 고장에 대한 패륜행위일지도 모른다. 그 동안에 당국자나 관계 기관에서 전혀 무관심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또 이른바, ‘수하식’을 비롯한 각종 양식 업자들이 무관심했다고 말해서도 안 될 것이다. 누구나 제 고장의 바다를 사랑하고 아끼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력이, 마음씀이 별로 효과가 크지 못한 것만은 말해도 괜찮을 게 아닌지 묻고 싶다. 이유나 원인은 여러 가지 있을 것 같다. 꼭 꼬집어 한두 가지만 따지고 들어서는 안 될 것 같기도 하다. 이대로 가다가는 청정 해역의 포기만이 아니라, 각종 자연 해산물의 수확과 인공 양식물의 생산에도 문제가 생기지 말라는 법은 없을 것 같다. 뿐만 아니라, 바다 오염이 필경 생태 환경과 인간 생체며 생리에도 영향을 주지 말라는 법도 없다. 너 나 할 것도 없이, 관계 기관이니 업주니 주민이니 할 것도 없다. 우리 고성 사람들 누구나 새삼 마음 고쳐먹고 팔을 걷고는 나서야 할 것이다. 우리들 사랑하는 바다가 우리에게 그렇게 외치고 있다. 아니 빌고 기도하고 있다. |
김열규본지논설위원 기자 / kn-kosung@newsn.com  입력 : 2007년 09월 0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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