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0년 전남 영암에서 벼슬하던 김희철 역적 모함 피신한 곳
신부마을 새밋골
곡용마을 더운샘 시금치를 데칠 정도로 물이 따뜻해 300년 전
안동권씨 많이 살아
4. 신월리(新月里)
본래 고성군 동읍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신부동, 구선창, 거운지 일부를 병합하여 신월리라 해서 철성면(고성읍)에 편입되었다. 현재는 행정 마을로 신부(新扶)마을과 곡용(曲龍)마을이 있다.
▣ 신부
1610년경, 전라남도 영암에서 벼슬을 지내던 김해김씨 문중의 희철(希鐵)이라는 분이 역적으로 모함을 받아 피신한 곳이 지금의 신부마을 샘골(새밋골) 지역이라고 한다. 그후 차츰 인구가 늘고 생활영역이 넓어지면서 현재의 신부마을로 터전을 옮겼다고 하는데, 신부라는 동명은 그 당시 터전을 새로 옮긴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 마을의 형성
약 380여 년 전 김해김씨가 입촌하여 마을을 개척하였다. 현재까지도 김해김씨 집성촌이라 할 만큼 거주민의 절반 정도가 김해김씨이다. 150여 년 전 본거지가 옮겨진 후, 타 성씨들도 입촌하여 현재는 김씨 외에 전주최씨, 밀양박씨, 창원구씨, 영천이씨, 파평윤씨, 진양강씨, 경주최씨, 남양홍씨 등 여러 성씨가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 사적 및 기타
◇ 임금바위
신부마을의 북쪽 남산 기슭에 있는 높이 약 4m, 둘레 약 20m의 바위로 바위 위쪽에 사람이 거닐어서 생긴 것 같은 발자국 형상이 새겨져 있어 마을에서는 이것이 옛날 임금님이 쉬어가면서 밟고 지나간 흔적이라 전해지고 있는데 이런 연유로 임금바위라 부른다.
◇ 구선창(舊船艙)
신부마을 웃땀 서남쪽에 있는 지역으로, 확실한 근거는 없으나 옛날 임진왜란 당시 이곳에서 거북선을 만들었다는 설이 있다.
▣ 곡용
신부마을의 동남쪽에 위치한 곡용마을은 마을 뒷산이 용이 굽은 형상이라 하여 곡용이라 불렀다고 한다.
◎ 마을의 형성
마을이 생긴 연대를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약 300년 전 안동권씨가 입촌하였다고 하며 그 전에 진양강씨가 살았다고도 한다. 현재는 김해김씨, 밀양박씨, 안동권씨, 경주이씨 등의 순으로 10여 성씨가 살고 있다.
◎ 사적 및 기타
◇ 더운샘
곡두름개(꼽두름개)에 있는 샘으로 옛날에는 이곳의 샘물이 시금치를 데칠 정도로 따뜻했다고 하며 지금은 많이 식었으나 수량이 풍부해 마을 주민들은 물론 인근의 주민들도 이 물을 이용하고 있다.
5. 동외리
본래 고성군 동읍면의 지역으로써, 고성읍성 동문 밖이 되므로 동문 밖 또는 동문 외, 줄여서 동외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남하동, 정동을 병합하여 동외리라 해서 철성면(고성면)에 편입되었다. 1974년 남산마을이 남산 1동과 2동으로 분동(分洞)되면서 동외마을, 남산 1마을, 남산 2마을, 정동마을로 나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동외(東外)
소가야성의 네 개의 문 중 동쪽 밖에 자리한 마을이라는 뜻으로 ‘동문 밖’을 줄여 ‘동밖’ 또는 ‘동문외’를 줄여 ‘동외’라 불리어 왔던 마을이다.
◎ 마을의 형성
마을이 언제부터 형성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 마을에 남아있는 당산의 패총(조개무덤)으로 미루어 이 지역이 선사시대 주거지의 일부였던 것은 분명하며, 조선 중엽의 지도에서도 확인되듯이 성문의 바깥에 자리했던 마을이었던 것으로 보아 고려나 조선시대에는 서민층이 모여 이곳에 마을을 이루었을 것이다. 조상대대로 이곳에서 살았던 전통가문이 없는 것도 이곳이 비교적 주거민의 이동이 빈번했었던 지역임을 말해준다.
◎ 사적 및 기타
◇ 동외리 패총(貝塚)
동외마을 당산에 있는 패총(조개무덤)은 고성만의 해안선을 중심으로 형성된 총 중의 하나이다. 이곳은 소가야국의 중심지인 고성평야의 남서구릉지로 이 야산을 가리켜 마을 사람들은 당산이라 부른다.
1974년 동아대학교에서 패총 일부분을 발굴 조사한 바 있으며 김해식토기, 철기, 골각기 등이 다수 출토되었고 야철지로 추정되는 지하유구(地下遺構)가 발견되어 창원 성산패총과 동일성을 갖는 것으로 판단된다. 현재 이 패총은 동아대학교 박물관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도지정문화재 기념물 제26호로 지정돼 있다.
◇ 당산(堂山)
정상부근에 패총이 있는 동외마을의 작은 야산으로 이곳에서 기도하면 아들을 낳는다고 하여 6.25당시까지만 해도 밤중에 촛불을 밝혀 놓고 기도를 올리는 광경을 자주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한다.
◇ 당산새미
당산의 서쪽편에 있는 우물로 수도가 보급되기 전에는 이 마을 사람들뿐 아니라 이웃 주민들도 많이 이용할 정도로 물이 마르는 날이 없이 물맛 또한 좋아 마을의 젖줄로 불리었다.
◇ 병막(病幕)
1946년 호열자 전염병이 전국적으로 창궐할 때 환자를 격리수용하던 임시막사가 현 대웅예식장 앞 고성체육관 자리에 있었다. 희망촌이라고도 불렀다.
◇ 정삼이 둠벙
현 무지개아파트 자리에 있었던 웅덩이의 이름이다. 어떠한 한발에도 물이 마르지 않아 이곳 주위의 농사는 매년 풍년이었다고 하는데 아파트 건립 시 매립하여 지금은 그 자취조차 없어졌다.
◇ 철성정(鐵城亭)
당산의 남쪽 기슭에 있던 궁도장으로 원근 각처의 여러 한량들이 이곳에서 활을 쏘곤 하였는데 지금은 민가로 바뀌었고 궁도장은 교사리 고성 신공설운동장 옆으로 옮겼다.
◇ 명원재(明原齋)
고성군내 황씨 종친들의 재실이다. 이 재실의 재목은 옛 고성객사(固城客舍)로 건립되었다가 한때 통영군으로 갔다가 다시 고성체육관으로 지어진 집을 뜯어 그 재목의 일부를 황씨들이 구입하여 지었다고 한다.
◇ 기타
목화가 재배되던 시절, 고성의 유일한 솜 공장이 동외마을에 있었다. 소구루마(달구지) 제작공장과 농기구, 놋그릇을 만들던 가내공장이 몇 군데 있었는데 달구지 제작소는 유명하였다고 한다.
▣ 남산 1(南山 1)
남산 1마을은 남산의 산자락에 형성된 마을이라는 뜻으로 이전에는 남산 2마을과 병칭(竝稱)하여 남산부락이라 불렀다. 1974년에 남산 2마을과 분동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 마을의 형성
남산 1마을은 소가야시대의 토성이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그 무렵부터 사람의 왕래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기록상으로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직후인 1600년(조선 선조33년)경에 김해김씨가 제일 먼저 이 마을에 터를 잡았고, 1800년에 경주최씨, 1810년에 고성박씨, 1815년에 전주최씨, 1843년에 밀양박씨가 들어와 살았는데 현재는 위 성씨의 후손들 외에 다양한 성씨가 거주하고 있다.
◎ 사적 및 기타
◇ 남산공원
고성의 유일한 시민공원으로 이곳에서 고성읍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공원 입구에는 선인들의 행적비가 일렬로 정비되어 있고 84계단을 올라 평평하게 터가 닦인 산기슭에 이르면 대한불교 조계종 옥천사(玉泉寺:고성군 개천면 소재)의 소속인 보광사(普光寺)를 만날 수 있다. 보광사 좌측 전방에는 호국영령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운 충혼탑과 봉안각, 6.25반공유적비 등이 세워져 있다. 보광사 주위로는 산을 오르내릴 때 편리하게 계단식 산책로를 만들어 두었고 보광사 앞뜰을 비롯한 여러 곳에 벤치도 있어 읍민들의 휴식공간으로써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최근엔 보광사 윗편 산등성이에 생활체육시설을 설치하여 조석으로 많은 읍민들이 이용하고 있으며, 이곳에서부터 산정을 거쳐 수남리(철뚝)와 신월리까지 이어지는 3~4m 폭의 산책로가 닦여졌다. 고성만이 내려다보이는 산정에는 팔각정이 세워져, 읍민들의 건강증진과 휴식은 물론 산을 오르는 사람들에게 마치 자신이 그림속의 주인공이나 된 듯 착각이 들만큼 고성만의 전경과 어우러져 운치를 더하고 있다.
◇ 공회당(公會堂)
구한말의 객사를 일컫는데 이 마을에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 객사:궐패(闕牌)를 모시어 두고 임금의 명을 받고 내려오는 벼슬아치를 대접하고 묵게 하던 집. 고을마다 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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