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5일 패망한 일본이 돌아가고 평화의 땅으로 돌아온 한반도. 40여 년을 한반도 곳곳에서 울려 퍼진 만세소리가 이곳 고성땅에서도 울려퍼졌다.
고성의 항일 독립운동은 얼마 전 아프가니스탄에서 희생된 심성민 씨의 할아버지인 심재인 선생과 이상만, 이재관, 이상호, 이호, 박윤수 선생 등으로 구성된 ‘재일학생단’이 주축이 돼 일어났다.
# 나라의 독립을 위해, 재일학생단
당시 한국을 식민지로 삼았던 일본은 경제공황을 타개하고 1930년대 들어서는 대륙침략 등을 이유로 국민들에 대한 수탈과 탄압을 가중해갔다.
특히 이들이 고성농업실수학교를 졸업하던 1930년대 말은 3.1운동과 광주학생운동 등으로 극도의 혼란을 겪던 시기였다.
이러한 혼란기에 학교를 막 졸업한 인재들이 약한 국력 때문에 묻히는 것을 안타까워한 은사 이구희 선생의 주선으로 이들 6명은 일본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이들이 유학생활을 하던 당시는 이미 일본의 패망이 점쳐지던 때. 그래서 일본인들의 한국인에 대한 천시는 더더욱 심했다. 조센징이라며 무시하고 천시하던 일본인들의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공부하던 이들 6명은 세계의 시각과 마찬가지로 시간이 지나면 일본의 국력이 약해질 것으로 내다보고 그 시기를 노려 독립운동을 펼칠 것을 함께 모의했다.
1940년 4월, 조선에서 몇몇의 유학생이 또 일본으로 유학을 가자, 이들은 신입생 자축회 이름을 빌려 재일학생단을 조직하게 된다. 학생단장으로 심재인 선생이 추대되고, 나날이 단원수가 늘어 이듬해에는 80명의 단원들이 모이게 됐다.
1940년 4월 조직된 재일학생단은 학교를 졸업하면 일부는 한국으로 돌아가고, 일부는 일본에 잔류하면서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을 하기로 약속했다.
이들이 학교를 졸업하던 1941년 5월, 이상만 선생은 곡물검사소 부산지소에, 심재인 선생은 그대로 일본에 잔류하는 등 각자 생활을 하며 독립운동의 적당한 때를 노렸다.
그러나 이듬해 2월 밀회 중 심부름하는 아이가 실수로 비밀문서를 떨어뜨려 80여 명의 조직원 모두가 일망타진 되는 일이 일어났다.
심 선생은 경북 예천에서 일본경찰에게 붙잡혀 심한 고문을 당했고, 다음해 5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및 육군형법 위반으로 징역 4년형을 받고, 박윤수, 이상만은 각각 3년의 징역 등 처벌을 받았는데, 그 중 이상만은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1944년 1월 31일 25세의 나이로 조국의 해방도 보지 못한 채 옥중에서 눈을 감고 말았다.
심 선생은 이러한 공로로 해방 후 학생독립운동사로서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았다.
# 우리는 대한의 건아다, 건아단
김봉일 지사는 고성읍 월평리 출신이다. 심재인 선생 등의 재일학생회와 마찬가지로 김 지사는 수원에서 농민대중을 계발해 신사회를 만들기 위한 ‘항일학생결사 건아단’을 조직해 항일 운동에 앞장섰다.
김 지사는 수원농림학교 재학 당시인 1926년 여름, 동교생 10여명과 함께 마을 근처에 농민야학을 개설해 농민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펼쳤다.
그 이듬해 강원도로 수학여행을 떠났다가 일본인의 소유이며 조선인들이 노동을 하고 있는 대규모 농장을 본 건아단원들은 그 식민성 농장에 분개해, 민족농장 건설의 꿈을 키우기도 했다. 이어 28년에는 조선농우연맹에 가입하고, 조선인에 의한 조선농촌개발이라는 주장에 합류했다.
이후 단원 중 한 명이 발각되는 일이 일어나고, 건아단의 이름을 계림농흥사로 개칭하게 된다. 이후 건아단 출신으로 김해공립농업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던 김성원이 건아단의 목적을 수행하던 중 경찰에 붙잡히는 일이 일어난다.
이 일로 계림농흥사는 조선개척사로 이름을 바꾸고 활동했으나 사건이 확대돼 1928년 결국 일본 경찰에 잡히게 된다. 18개월 동안 미결수로 남아있던 김 지사는 1930년 경성지방법원에서 면소 판결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이러한 고인의 공을 기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고성 출신으로 고성에서 혹은 전국, 일본 등지에서 나라의 독립에 몸바친 애국지사들은 수도 없이 많다. 그러나 그들의 이름은 ‘노는 날’로 전락해 태극기조차 찾아볼 수 없는 요즘 우리에게는 이미 잊혀졌는지도 모르겠다.
“고향에 계신 부모 형제 동포여! 더 살고 싶은 것이 인정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택해야 할 오직 한 번의 가장 좋은 기회를 포착했습니다.
백 년을 살기보다 조국의 영광을 지키는 이 기회를 택했습니다. 안녕히, 안녕히들 계십시오”라고 쓴 윤봉길 의사의 유서. 아마도 고성 출신 독립운동지사들 역시 이런 마음으로 조국 광복을 위해 목숨을 바쳤을 것이다.
그들의 조국애를 똑같이, 함께 느끼지는 못하더라도 광복절, 일 년에 하루, 단 한 번만큼은 수천, 수만의 사람이 목숨 바쳐 지켜낸 이 나라, 한반도에 사는 것을 감사해야할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