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이 있던 옥골 원혼의 소리 들린다는 전설
고성읍성의 안청루 앉아 시한 수 읊던 선비 모습 그려
제3장 고성군 마을 유래
1. 고성읍
고성읍의 역사 삼한시대 변한(弁韓)의 12국 중 하나인 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의 본토였으며, 서기 42년~562여년까지 소가야의 도읍지였다.
신라 35대 경덕왕 16년에 고자군(古自郡)을 고성군으로 개칭하였다. 1018년 고려 현종 9년에 고성현으로(조선 고종 32년인 1895년에 고성현에서 고성군으로 개칭되었음) 개칭되면서 동읍내면과 서읍내면으로 나누어 졌다가 1914년 3월 1일자 동읍면과 서읍면을 병합하여 철성면(鐵城面)이라 개칭하여 사용하다. 1918년 철성면을 다시 고성면으로 개칭하였으며 1938년 10월 1일자로 고성읍으로 승격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또한, 1983년 2월 15일자로 삼산면 이당리, 대독리가 고성읍으로 편입 되었으며 1984년 8월 22일자 고성군조례 85호로 리동 명칭 변경으로 5개동 12개 리 40개 마을이 17개 리 40개 마을로 정해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우리지역에 살고 있으면서 잊혀져가는 각 마을의 지명 등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고 잘못 불리고 있는 지명 등을 바로 잡고자 한다.
1. 성내리(城內里)
◎ 마을의 유래
성내리란 성안에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소가야를 세운 말로왕(末露王)은 도읍지인 지금의 고성읍 지역에 돌성을 쌓았는데 그 처음 구조는 둘레가 106,777.2㎝ 높이가 약 454.5㎝이었다고 한다.
성에는 세 개의 출입문이 있어, 그 위치에 따라 동문, 서문, 남문이라 불렀는데 여기서 비롯된 마을 이름이 각 각 동내, 서내, 남내 마을이다. 성내리는 조선시대까지 고성군 동읍면(東邑面)의 지역이었다.
그러던 것이 일제치하에 들게 된 1914년에 행정구역을 통폐합하면서 동내동, 남내동, 남외동 일부와 서읍면(西邑面)의 서내동을 합병하여 성내리라 하고 철성면에 편입되었다. 그 후 철성면이 고성면으로 바뀌고 고성면이 고성읍으로 승격되었지만 성내리란 마을 이름은 변하지 않았다.
◎ 마을의 형성
이곳에 언제부터 우리의 선조들이 터를 닦았는지는 기록이 없어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고자미동국보다도 훨씬 오래된 선사시대 때부터란 것을 고성읍 동외리에 있는 패총으로 미루어 충분히 추정할 수 있다.
소가야 시대에는 도읍지에서도 그 중심부인 성안이었던 곳으로 지금까지도 그때의 명맥이 유지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상공업이 발달하기 전에는 이곳 주민들도 주로 농업에 종사하였으나,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이곳은 지역적 특성에 맞춰 상업지역으로 변하게 되었다.
따라서 주민들의 직업은 다양한 편이다. 역사가 오래된 지역이므로 이곳의 토착민이 어떤 성씨를 가졌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근세 이후 이곳에 터를 잡은 사람들은 은진송씨, 김해김씨, 김해허씨로 전하고 있다.
◎ 사적(史跡) 및 기타
◇ 고성 성지
고성읍 수남리에서 동외리에 걸쳐 일부 윤곽이 남아 있는 성지는 약 2000년 전 소가야국 도읍으로 말로왕(김수로왕 형제 중 막내)때 적을 물리치기 위하여 백성들을 동원하여 쌓았다고 전하나 확실한 고증은 없고 다만 동국여지승람 고성현 성곽조(城郭條)에 보면 「邑城 石築 周 三千五百二十四尺, 高 十五尺 內有四井一池」라 기록되어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성곽의 일부가 왜성(倭城)으로 임진왜란때 왜병의 장기 주둔을 목적으로 개축된 것으로 보여지며 문화재자료 제89호로 지정되어 있다.
◇어시정(漁市井)
소가야시대 성문 안에는 네 개의 우물과 한 개의 못(池)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지금까지 남아있는 두 개의 우물 중의 하나로 구시장 안에 있다.
어시장에서 주로 사용하므로 이렇게 이름 지었는지 모른다. 현재도 어시장에서 사용하고 있는데 매우 깊다.
◇은성정(隱城井)
현 고성교회 뒤편 골목길에 위치하고 있으며 뚜껑을 밀봉한 채 폐정(廢井)으로 남아 있다.
◇안청루(晏淸樓)
고성읍성의 남문루(南門樓)건립연대에 관한 기록은 남아 있는 것이 없다. 다만 조선 세종때의 문신 김수온(金守溫)이 남긴 안청루에 관한 시의 <군정을 다스렸다(郡城彊理)>라는 구절로 보아 이 문루도 읍성을 수축하면서 세워졌던 것으로 추측된다. 읍성 수축연대에 관한 기록중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志)>에 “읍성무진석축(邑城戊辰石築)”으로 되어 있으며, 이 무진년은 서기 1448년(세종30년)으로 김수온의 시와 연대상으로 일치된다.
그러므로 안청루는 고성읍성을 석성으로 수축하면서 그 문루로 건립한 것이 거의 확실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언제까지 존속하고 있었는지는 전혀 알 길이 없다.
◎ 전설
◇ 옥골에 쌓인 원혼의 소리
'옥골’이란 현재에 성내리 서내마을에 위치한 곳으로 소가야시대 때 이곳에 감옥을 지어 죄수를 가두어 둔 곳으로 감옥이 있었다 하여 “옥골”이라 칭한다.
이 부근의 앞은 바다이며 유배지인 “대섬(竹島)”이 있었고 육지는 허허벌판인 골짜기였다. 그 당시 감옥에서 죽은 사람들은 이 골짜기에 묻지도 않고 마구 버려 야수 등의 밥이 되기도 하였다고 전한다.
현재 이곳은 집들이 다 들어차 옛날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으나 어떤 정신적인 잠재의식이 이곳 주민들의 머릿속에 남아 주술적인 요소가 많은 것 같기도 하다.
비가 오거나 으슥한 야경이 되면 현재의 서내마을 회관을 중심으로 한 빈 공터에서 많은 사람들이 고함을 지르며 아우성을 치는 소리가 나며, 흙 또는 자갈을 이곳에 가져와 “와르르” 붓는 소리가 요란하게 난다고 이곳 주변 주민들은 말하고 있다.
아마 이 소리들은 그때 감옥에서 죽은 사람들의 원혼이 자기의 죽음을 애통히 여기거나 시체조차 묻히지 못한 것을 원통히 여겨 흐느끼는 소리거나, 혹은 자기의 시체를 묻기 위하여 흙을 가져다 붓는 소리거나, 아니면 그 당시 부역하던 군중 죄수들의 아우성 소리가 아닌가 여겨진다. 아무튼, 이 소리들은 이땅과 이곳 주민들의 뇌리 속에 오래도록 남아 있을 것이다.
◇ 객사(客舍)마당
고성읍 성내리 중심지에 위치하고 있는 객사마당은 언제부터 전해왔는지 확실한 년대는 알 수 없으나 아마 조선조시대로 짐작된다. 옛날 이 고을에서 저 고을로 말을 타고 다니고 할 때 진주부사 및 고을 원님들이 거제로 시찰 및 밀사로 갈 때면 말을 타고 가면서 이곳에서 말도 휴식을 취하고 먹이도 먹였다고 한다.
그리고 마을 주위엔 큰 연못이 있어 사람이나 말이 쉬어가기는 좋은 곳이었다. 그래서 거제에서 진주로 갈 때는 주인의 승낙도 없이 이 객사마당에서 쉬어 갔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지나가는 나그네가 취식 또는 잠자는 곳이라 하여 객사마당이라고 칭하였으며 150여 년 전부터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해지면서 장터로 변하였다가 지금은 주거지와 상가로 되어 있다.
② 서외리(西外里)
본래 고성군 서읍면의 지역으로서 고성 읍성 서문 밖이 되므로 서문 밖 또는 서문 외, 줄여서 서외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ㆍ폐합시 상평리 송수동을 병합하여 서외리라 해서 철성면(고성읍)에 편입되었다.
그후 1968년 공설시장이 마을의 동편으로 이전되면서 급격한 주민수의 증가를 초래하여 1972년에 진주 문산선 1006번 지방도를 기점으로 서외 1마을과 서외 2마을로 분동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 서외 1(西外 1)
고성읍성의 네 개 문중 서쪽의 문 바깥에 자리한 마을이라 해서 서문 밖 또는 서문 외라 불렀는데, 이를 줄여서 서외라 하였다.
◎ 마을의 형성
아주 오래전에 마을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기록상으로 확인 할 수 있는 주민의 거주시기는 1850년경부터이다. 1850년 고성이씨를 시작으로 밀양박씨, 달성배씨, 김해김씨 순으로 입촌한 것으로 되어 있다.
◎ 사적(史跡) 및 기타
◇ 당모등(당모릿등) : 서외리에 있는 등성이로 성황당이 있었음.
◇ 송수정(松樹井)
서문 밖 위쪽에 있는 마을을 웃담(또는 섬 밖), 아래쪽에 있는 마을을 아랫담(송수 또는 송계동)이라 불렀는데 송수정은 송수 남쪽에 있는 우물을 일컫는다.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줄지 않고 맛이 좋기로 유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