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형을 선생(72, 고성군 삼산면 병산리 출생)이 지난 7월 21일 밤 9시에 별세, 24일 고향인 병산리에 안장됐다. 그는 반독재투쟁 과정에서 당한 심한 고문 후유증으로 당뇨병을 앓게 되었고, 10여년 간의 오랜 투병 끝에 운명하셨다.
유족으로는 정인경(鄭仁京) 여사(60)와 아들 셋이 있다. 장남 보성씨는 증권예탁결제원 과장으로, 차남 보건씨는 리스앙주화장품 지점장으로, 삼남 보익씨는 한누리투자증권 선임연구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3.15부정투표 현장서 자유당 깡패 작살내다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 영안실에 마련된 고인의 빈소에는 7.29고성민중의거 감옥동지 모임인 ‘이구회’(회장 정출도) 회원들을 비롯해 경향 각지의 민주화 투쟁 동지들과 친지들이 모여 고인의 뜨거웠던 민주화 투쟁 정신을 밤이 깊도록 기렸다.
고성중, 고성농고를 거쳐 경북대학교에 진학한 서형을 선생은 대학생 시절부터 이승만 독재정권에 온 몸을 던져 저항했다.
3.15부정선거 직전인 1960년 3월 초순경의 일이다. 자유당 소속 고성통영지구 국회의원 최석림씨가 삼산면 병산리에 나타나 이승만 대통령 후보와 이기붕 부통령 후보 당선을 위하여 선거 연설을 막 시작하려 하자 서형을 선생(당시 경북대 학생)은 손에 들고 있던 사상계 잡지책을 최석림씨의 얼굴에 힘껏 내던졌다.
무거운 잡지책이 최씨의 얼굴을 정확하게 강타했다. 최씨의 측근들이 서선생의 멱살을 잡고 주먹을 내질렀다.
장사라고 소문이 났던 서 선생은 최씨의 측근 한 명을 달랑 들어다 땅바닥에다 패대기쳤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동네 청년들이 용기를 얻어 몽둥이를 들고 달려나오자 최씨 일행은 줄행랑을 쳤다.
그리고 3월 15일 정부통령투표일. 병산리에서 덕망이 높았던 한학자 서병수씨가 제 1번으로 투표소에 들어가서 투표를 했다. 그러자 어깨가 떡 벌어진 청년 한 명이 길다란 젓가락을 들고 투표함 쪽으로 가더니 서병수씨가 막 투표한 투표용지를 꺼냈다. “히야! 이승만 박사와 이기붕 선생을 안찍고 장면이를 찍었구만”하면서 그 투표용지를 쫙쫙 찢어버렸다.
서병수 선생 옆에 서 있었던 서형을 선생은 그 청년의 멱살을 잡아 투표소 밖으로 끌어냈다. 그리고 혼신의 힘을 다해 그 청년을 때려눕히고 죽어라 하고 그의 얼굴을 짓밟았다. 동네사람들이 살인나겠다며 겨우 뜯어말렸다.
■7.29 고성 반독재민중의거 최초 모의자
서 선생은 그날로 마산으로 대구로 도망을 다녔다. 도망을 다니면서도 마산 3.15부정선거 규탄 시위에 적극 가담했고, 대구에서도 부정선거 규탄 시위대에 앞장섰다.
대구매일신문사에서 훗날 발행한 ‘3.15부정선거 규탄책자’(화보) 표지 사진에도 서 선생의 얼굴이 크게 실려 있다.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고 7.29 총선이 십여일 앞으로 다가왔다. 고향에 내려온 서 선생은 김화영, 김윤열, 이청수, 김재욱, 강남일씨(당시 모두 대학생) 등과 ‘반민주잔당척결 고성군민 궐기대회’를 모의하기 시작했다. 7.29 총선을 일주일 앞두고 ‘반민주잔당척결 고성군민 궐기대회’가 고성읍 쌀시장에서 개최되었고, 시가행진에 이어 자유당 최석림 국회의원 선거사무소 앞에서 단식농성이 시작됐다.
7월 하순의 땡볕 아래서 단식농성이 일주일째 계속되자 병원으로 실려가는 학생들이 속출했다. 고성군민들도 동요하기 시작했다. “최석림은 물러가라”는 요구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그러나 7월 29일 투표는 시작되었고 다음 날 아침 개표 중간발표는 최석림의 우세로 나타났다. 개표가 진행되던 고성군청 앞에는 5000여 명의 군민들이 몰려들었고 경찰은 바리케이트를 치고 비상사태에 대비했다. 이윽고 군중으로부터 “부정선거 다시 하라”는 구호가 터져나왔고 돌멩이가 날기 시작했다.
돌 세례를 맞은 경찰은 도망치기 시작했다. 성난 군중들은 군청으로 경찰서로 난입하였고 투표함을 부수고 불살랐다. ‘고성 반독재 민중의거’는 이렇게 전개되었다.
26명의 시위 주동학생들은 그날 밤 모두 구속되어 부산형무소로 끌려갔다. 당시 구속자 명단은 다음과 같다(가나다 순). 권충웅, 김수복, 김윤열, 김재욱, 김화영, 신장효, 윤보현, 이청수, 정출도, 진병언, 허종권(이상은 현재 서울 거주), 김정수, 김종욱, 박기산, 장숙례, 진진규(부산 거주), 배상렬(진주 거주), 강종형, 김상갑, 김춘랑, 한준현(고성 거주) 박병화, 서정동, 서형을, 진영준, 한영우(작고).
시위 학생들이 밤 사이에 구속수감되자 고성군은 발칵 뒤집어졌다.
“학생들 대신에 우리를 잡아가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운 고성군민 시위가 연일 계속되었다. 구속학생들도 감옥에서 단식투쟁을 전개하는 등 반민주잔당 척결을 위한 옥중투쟁을 계속했다. 학생들은 100여일의 옥중투쟁 끝에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3선개선 반대하다 고문받고 해직당해
서형을 선생은 대한건축사협회 출판부장으로 근무하던 1969년 8월 중순경 중앙정보부 요원으로부터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을 지지하는 건축사협회 명의의 광고를 신문에 게재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당시 민주화추진협의회 특별위원회 부위원장이기도 했던 서 선생은 중앙정보부의 요구를 그 자리에서 거부했다. 이해 말 경 건축사협회 모 이사는 서 선생에게 출판부장직 사퇴를 요구했고, 서 선생은 이것도 거부했다. 며칠 후 중앙정보부 요원에게 연행된 서 선생은 48시간 동안 지하 감방에 갇혀 무수히 폭행당했다. 그때의 고문으로 서 선생의 양쪽다리 정강이 부분은 보라색 피멍으로 물들었고 그 피멍은 죽을 때까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김영삼씨와 민주화추진협의회 적극 주도
서 선생은 이듬해인 1970년 1월 건축가협회에서 해직되었다. 야인이 된 서 선생의 민주화투쟁은 더욱 격렬해졌다. 짬짬이 집장사를 하면서 생기는 푼돈은 김영삼, 김대중씨 등이 중심축이었던 민주화추진협의회(이하 민추협) 활동자금으로 거의 헌납되었고, 1987년에는 삼일절에 파고다공원에서 개최된 민주회복궐기대회 등 시위 때마다 제일 앞줄에 서서 경찰과 부닥쳤다.
1986년 서울 시내 무교동 민추협 사무실 임대계약 때도 서 선생은 보증금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2,000만 원을 자신의 돈으로 대납하기도 했다.
이후 임대계약은 정보기관의 압력으로 해약 당했다. 서 선생은 김영삼씨가 주도하던 민주산악회의 주축 멤버이기도 했다.
■해마다 4.19묘지 목욕재계하고 참배
서 선생은 말년에 병원에 입원하기 전까지 4.19 기념식 때마다 서울 수유동 4.19혁명 희생자 묘지를 찾았다. 갈 때마다 목욕재계하는 등 정성을 다했는데 어떤 때는 함석헌 선생과도 묘지에서 만나 같이 눈물을 흘리며 한국 민주주의의 장래를 걱정하기도 했다. 서 선생은 김영삼 대통령에게 4.19 묘지의 국립묘지화를 적극 건의하여 국립묘지로 승격되는 데 큰 기여를 했다.서 선생의 이 같은 민주화투쟁은 정부로부터 공식 인정을 받았다.
정부는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에관한법률’에 따라 2001년 12월 18일 ‘명예회복’ 조치를 결정, 인정서를 서 선생에게 교부했다. (1970년 1월 3선개헌 반대 투쟁 과정에서 대한건축사협회 부장직에서 강제해직된 점 등이 인정되었다.)
7.29 고성민중의거 감옥 동지들인 ‘이구회’ 회원들은 최근 서형을 선생이 당뇨병으로 투병 중인 병원으로 두 차례 문병했었다. 회원들은 그때마다 서 선생의 깡마른 양쪽 정강이를 쓰다듬으며 서 선생의 그 길고 험했던 민주회복투쟁을 뜨겁게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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