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향교 심상정 전교의 서원이야기-4 “천하의 용장” 최균 최강 형제의 정신을 담은 고성 도산서원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나라 구한 형제
충무공 이순신의 친필 편지도 전해지는 명장
1623년 최균·최강 형제 모신 도산서원 건립
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 입력 : 2025년 06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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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만면을 지르는 길을 따라 가다 화림리 신계마을을 지나 화촌으로 올라간다. 화촌소류지 방향으로 산을 마주하고 오르다 보면 구만면 화림리 127번지, 도산서원을 만난다. 안동의 도산서원과 한글은 같지만 고성 도산서원은 ‘道山’이고, 퇴계 이황을 모신 안동의 도산서원은 ‘陶山’이다.
# 의병으로 나라를 구한 최균 최강 형제 형인 최균은 1537년, 아우 최강은 1559년 고성 구만면에서 태어났다. 터울이 20년 넘는 형제가 의병을 일으킨 때는 임진왜란 초기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 최강은 55세의 노장이었다. 최강은 27세에 무과에 급제했지만 관직을 받지 못했다. 의병을 일으킨 최균은 스스로를 풍운장(風雲將)이라 칭했다. 그는 학식과 인품이 높기로 유명했다. 백성들도 그에게 무한한 신뢰와 존경을 보냈다. 백성들은 그를 두고 ‘천하의 용장’이라고도 했다. 형제는 먼저 구만면에서 노략질을 일삼던 왜적부터 몰아냈다. 중년이었던 최균은 남해안 일대 의병의 수장이었다. 학식과 병법, 주역과 천문지리까지 능해 뛰어난 지략가였던 최균이 본진에서 전략을 짜고 병참과 전투를 지휘하면 동생 최강을 비롯한 젊은 의병들은 유격전을 펼쳐 왜적을 무찔렀다. 두 형제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끝난 후까지 그 전공을 이어갔다. 최균은 조정에서 공을 높이 사 수문장을 제수했지만 끝내 취임하지 않았다. 최강은 정유재란이 끝난 후 1603년 제59대 가리포 첨사에 임명됐다. 최균‧최강 형제는 1605년 가리포전투에서 배를 타고 침입한 적병을 형제가 힘을 합하여 격퇴하였으며, 그 공으로 통정대부에 올랐다. 그러나 본디 벼슬에 뜻이 없었던 최균은 혼란한 조정에 회의를 느껴 고향에 돌아와 음악과 책을 즐기며 여생을 보냈다.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른 최균은 80세로 사망한 후 이조판서에 추증됐다. 최균과 함께 가리포전투를 승리로 이끈 최강은 같은 해 순천부사를 거쳐 경상좌수사, 오위도총부 부총관, 충청수사를 거쳐 포도대장에까지 올랐다. 하지만 광해군이 형 임해군을 죽이라는 명을 내리자 이를 거부하고 낙향한 후 다시는 벼슬을 하지 않았다. 최강은 형인 최균보다 2년 먼저,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망 후 그는 병조판서에 추증됐다.
# 최균 최강 장군과 이순신 장군의 인연 고성 도산서원은 인조 재위 당시인 1623년 건립됐다. 임진왜란 당시 고성은 왜구가 육지로 진출하는 길목이었으니, 고성이 뚫리면 조선이 뚫리는 전략 요충지였다. 이를 최균‧최강이 의병을 일으켜 지켜냈으니 그 충절은 소문이 나고도 남았다. 이순신 장군이 보내온 친필 편지에 “최균‧최강 장군의 도움으로 대첩을 이룰 수 있었다”라는 내용도 있는 걸 보면 충무공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왜구를 섬멸해 조선을 지킬 수 있게 한 발판이 된 것이다. 이런 최균‧최강 형제의 공과 정신을 기리기 위해 지방유지들이 뜻을 모아 세운 도산서원은 나지막한 구릉의 남쪽 경사면 끝에, 남서쪽을 바라보고 서있다. 낮은 곳에 강학당을, 높은 곳에 사당을 배치한 전학후묘 형식이다. 고성 도산서원은 강당을 중심으로 좌우에 진수재와 흥학재, 맨 뒤에 사당인 숭의사를 배치했다. 대문격인 양지문까지 구(口)자 형태를 이루고 있다. 1713년 왕으로부터 현판과 노비, 서적 등을 하사받는 사액서원이 됐지만 조선 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을 피하지 못하고 결국 폐쇄됐다. 이후 1870년 중건해 지금에 이른다.
# 도산서원사우중수기(번역 : 심상정 고성향교 전교) 현인을 추모하는 서원이 있음은 현인을 숭배하고 그 덕을 본받아 이곳 백성에게 권장하여 흥기 하게 함이다. 옛날부터 고성에 도산서원이 있었으니 이조판서에 증직된 소호공과 그의 아우 병조판서로 증직된 소계공을 향사하던 사우가 세월이 오래되어 퇴락하여 기울어지고 휘어졌다. 금번 통제사 백은진 공이 부임한 그 이듬해 병오년(1846)에 그 사실을 듣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묘우는 존경하는 모습을 상징함이라. 그 이목을 쉽게 할 수 없다. 또한 사람들이 권태해서야 어찌 후인들에게 시범을 보일 수 있으랴 하고 곧 자재를 내고 재건을 주창하니 이에 인사가 모두 힘을 다하여 공사에 임하니 몇 달이 지나지 않아 공사를 끝내니 그해 칠월이었다. 사당에 영령들을 편안하게 모시게 되었다. 후손 상순이 그 사실의 글을 가지고 오백 리나 북쪽에 있는 나에게 찾아와 기문을 청하니 오직 인심의 감회가 세월이 오래되면 잊혀지기 쉬우나 오래도록 잊지 아니함은 그 감격함이 깊음이라. 두 공의 떠남이 수백 년이 지났으도 인심이 더욱 권하여 장려하니 그 위대한 공적을 알 수 있다. 마침 왜적이 저돌하니 여러 고을 수령들이 도망하였으나 두 형제는 재야의 사람으로서 분연히 일어나 작전을 세우면 손바닥 같이 적진을 꿰뚫고 창을 들면 굳은 성곽도 썩은 나무를 자르듯 하니 전술 신통하고 제어함이 번갯불 같았다. 한 집안에서 충의를 이루어 벼슬에도 나아가고 명성도 얻었다. 그러나 초로에 삶의 뜻을 두어 형제가 서로 손을 이끌어 함께 고향에 돌아와 부귀영화를 멀리하였다. 난리가 일어나면 벼슬아치를 앞질러 먼저 나아가고, 혼미한 세상을 만나면 평범한 사람들의 취미를 즐겼으니 그러한 연후에 형제간 우애를 깊이하고 학문을 강마했다. 바탕이 너그럽지 않고 다만 공명에만 뜻을 견주는 것은 옳지 않음이니 이를 대하는 신념을 굽히지 않는 기상이 사람의 마음에 있어 능히 오래도록 잊혀지지 아니함이다. 그 절개로 국가를 지탱케 하니 맡은 바 성실한 것 보다 큰 것이 없다. 백공이 그 직무를 아는 바로 여론이 한가지로 칭송하지 아니한다면 또 어찌 숨어 있던 광영을 다시 일으켜 기쁘게 드러내리오. 이는 가히 기록할 만하다. 처음부터 이 일을 주간한 사람은 사인 허용규와 상운 두 사람이다. 상지12년병오백로절 통정대부전행사간원대사간지제교 완산 유치명 삼가쓰다.
# 소천정기(번역 : 심상정 고성향교 전교) ‘명장록’, ‘산서야사’, ‘중흥지’ 등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니 이는 역사적 사실이다. 공은 처음부터 무관으로 출전하였으므로 난이 평정된 후 벼슬이 첨사를 거쳐 도총부 부총관에 오르니 왕이 새서(璽書)를 내려 포상했다. 광해조에 이르러 교동별장으로 강등되어 임해군을 구호하니 당시 혼란한 조정에서 문책을 당했다. 그러나 이치에 어긋남이 없어 석방되어 충청수사로 특명되니, “내가 외람되이 높은 벼슬에 오른 것은 옳지 않다.”라 하고 부절을 반납하고 벼슬자리에서 물러났다. 아, 슬프다. 그 당시에 공을 세우고도 몸은 물러나 혼란한 조정에 벼슬하지 않은 곽재우, 정기룡처럼 담대절용하고 가는 곳마다 적을 섬멸한 여러분에 불가하니 그 명절과 의기는 온 백성이 우러러 앙망하는 일이었다. 논자는 곽충익공으로부터 나왔다 하고 군대를 통솔하는 재능은 정기룡을 능가하였다 했으니 공의 도량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공의 종손 정규가 족인 영렬 등과 상의하여 우리 선조가 옛 도산사에서 향사하려 하니 사당이 낡아 퇴락하여 또 서당과 흥학재를 중건하려 하나 당의 동쪽이라. 오직 구만동 형제봉 아래 소대는 우리 선조가 탄생한 곳이라 중요한 지역이니 이곳을 황폐한 채로 두면 옳지도 않고 우리 후손의 책임이 크다고 하였다. 이에 기사년(1929) 봄에 소천정을 기공하여 그해 겨울에 낙성하니 이로써 모두가 옳게 여겨 기뻐하였다. 지난해 내가 정자 주변을 살펴보니 여러 산들이 좌우로 벌려 있고 마치 창을 들어 세운 듯하고 병사들이 진을 치고 있는 것 같았다. 계곡의 바람이 벽에 부딪혀 북과 징을 두들기는 상상을 했는데 공이 노하여 말을 달려 만군 중에 질타하여 썩은 나무를 자른 듯하였다. 공으로 하여금 구원에서 이와 같이 한다면 어찌 왜구가 지금과 같이 이 나라를 삼키게 하였으리오. 지난 일을 회상하며 정자 위에서 머뭇거리며 길이 탄식하며 떠날 수 없었다. 정규가 두 번이나 나에게 기문을 청하나 슬프게도 나의 글재주가 한문공이 장중승의 글 처음을 본뜨나 마음으로 욕되게 함과 세대가 달라졌으나 고요하고 쓸쓸함을 억누를 수가 없어 가만히 그 뜻을 따서 붓을 들어 이에 쓰노라. 진양 하겸진 쓰다. |
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  입력 : 2025년 06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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