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향교 심상정 전교의 서원이야기-3 천하명필 행촌 이암의 정신이 살아있는 고성갈천서원
1712년 회화면 봉동리 금봉서원이 전신
행촌, 도촌, 묵재, 관포 4현사 모신 서원
1896년 서원철폐령으로 폐쇄, 광복 후 복원
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 입력 : 2025년 04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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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선 도로를 사이에 두고 작은 내가 흐르고, 앞은 나지막한 산이 그늘을 드리운다. 아마도 아스팔트 포장 전의 흙길 그대로, 경지 정리가 되지 않았을 즈음에는 그 풍광이 제법 운치 있었겠다. 고성갈천서원은 대가면 갈천리, 고성사람들이 흔히 ‘갈래종생’이라 부르는 마을에 자리하고 있다. 지금이야 도로가 사통으로 뚫려 불편한 것 없는 동네지만 20~30년 전만 해도 갈래종생은 고성에서 제일 오지로 꼽히던 동네다. 갈천천과 대가천이 만나는 지점에 구릉이 있다. 서원은 서쪽 비탈면에 서쪽을 바라보고 세워져 있다. 어느 지역 서원이나 다 그렇듯 유림들이 조용히 공부하기에는 이만한 곳도 없겠다. 조용한 마을에서 아름다운 풍경과 함께 하니 배움도 즐거웠겠다.
# 1712년 회화면에서 갈천으로 이전 고성갈천서원은 행촌 선생과 묵재 노필, 관포 어득강, 행촌 선생의 동생인 도촌 이교 선생을 모시고 있다. 몇 해 전까지는 갈천서원으로 불리다가 2018년에 ‘고성’을 더해 이제 정식 명칭을 ‘고성갈천서원’으로 하고 있다. 고성갈천서원이 지금의 자리에 들어선 것은 1700년대였다. 애초에는 회화면 봉동리 곰실마을에 고성 이씨들이 세운 금봉서원이 있었다. 금봉서원에서는 행촌 선생과 관포 선생을 모셨다. 그러나 임진왜란 당시 서원이 소실되면서 사라졌다. 이후 1712년 숙종 당시 갈천으로 옮겨오면서 묵재 선생까지, 모두 3선생을 모시다가 1854년 철종 당시 도내 유림들이 건의하면서 행촌 선생의 아우인 도촌 선생도 함께 제향하며 모두 4현사가 됐다. 고성갈천서원도 고종의 서원 철폐령을 피해가지 못했다. 1896년 폐쇄됐던 고성갈천서원은 광복 이후 지역 유림들에 의해 복원됐다.
# 전학후묘 형식의 고성갈천서원 고성갈천서원은 유생들이 공부하는 강당을 낮은 자리에 배치하고, 높은 곳에 4현사를 모신 사당을 모시고 있다. 이를 전학후묘(前學後廟) 형식이라 한다. 서원의 출입문은 불사문(不舍門)이다. 이는 맹자의 말로, 학문을 이루지 않고는 그만두지 않겠다는 결의, 다짐을 뜻한다. 이것은 갈천서원의 뜻이자 고성인의 정신인 셈이다. 불사문을 지나면 정면 3칸, 측면 1.5칸으로, 팔작지붕의 강당이 나온다. 중앙의 마루, 마루 양쪽에 각 1칸씩의 방이 있다. 오른쪽에는 누마루가 있어 행사나 토론장으로 쓰였다. 강당 뒤쪽에는 사당이 자리한다. 출입문인 내삼문을 지나면 나오는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5칸의 맞배지붕으로 행촌 이암, 도촌 이교, 묵재 노필, 관포 어득광 선생 등 4현을 모시고 있다. 도리(서까래를 받치기 위하여 기둥 위에 건너지르는 나무)나 장여(도리 밑에서 도리를 받치고 있는 길고 모진 나무) 아래에 소로(두공, 첨차, 한대, 제공, 장여, 화반 따위를 받치는 네모진 나무)를 받쳐 장식한 소로수장 구조로, 도리는 모두 3개다. 서원 앞에는 침계루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붕괴 위험도 생겨났고, 유지관리 걱정도 생겼다. 1990년대 들어 고성이씨 이평열 씨의 노력과 이한동 총리의 협조로 정부보조금을 받게 되고, 종친회에서도 뜻을 모으면서 갈천서원 내에 고전 방식의 목조건물 낙영재를 건립하고, 사우와 불사문을 중수했다. 매년 3월 상정일과 9월 중정일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 고성의 4현을 모신 고성갈천서원 고성갈천서원에 모신 4현사 중 행촌 이암 선생(1297~1364) 고성 이씨로, 시호는 문정공이다. 고성의 역사나 서예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행촌 이암 선생을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행촌 이암 선생은 고려 공민왕 당시 문하시중을 지냈다. 그의 서예 실력은 멀리 중국에까지 명필로 소문났을 정도였다. 조부 때부터 왕실과 혼인할 수 있는 귀족이었고 손자인 이원은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명문 집안이었다. 16살에 과거에 급제하여 왕실의 부인(符印)을 관리하는 중책을 맡았다. 13살에 조맹부의 송설체를 체득하여 원나라 왕실에 연화경을 써 바쳐 천하명필의 명성을 얻었다. 공민왕의 복주(지금의 안동) 천도시에 1등공신에 책록되고 철성부원군이 되었다. 고성의 현인으로 제향되고 있다. 도촌 이교 선생(?~1361)의 시호는 문열공(文烈公)이다. 행촌의 아우이고 벼슬은 이부상서를 지냈다. 효우가 지극하여 상을 당해서는 채식만으로 연명했으며 몸가짐이 엄정하여 집안 어른들도 함부로 말하지 못했다고 한다. 문장과 학행이 뛰어나 형인 행촌과 쌍벽을 이뤘다. 고성의 현인으로 제향하고 있다. 묵재 노필 선생(1464~1532) 광주 노씨이다. 김종직의 문하에서 김굉필과 함께 학문에만 전념했다. 중종 때 거듭되는 재난으로 뛰어난 선비를 천거하도록 하자 두 차례나 천거됐으나 거절했다가 1518년 김안국에 의해 천거되고 6품직에 특채되어 모든 유림의 추앙을 받았다. 공조좌랑을 끝으로 향리로 내려와 학문에 전념하고 후진을 길렀다. 관포 어득강 선생(1470~1539)은 고성 출신으로, 함종인이고 이름과 호가 물과 관련이 있다. 26살에 과거에 급제하여 곡강군수 등 남달리 외간직을 선호했으며 벼슬은 대사간을 역임했다. 성균관 교수 시절 퇴계 선생을 가르쳤던 인연으로 훗날 명성이 더 알려져 있다. 당시 한양의 고관들이 관포와 교우하기를 원했으며 자유분방하고 해학을 즐기며 살면서 ‘관포선생시집’이 전해지고 있다. 고성향교의 명륜당에도 관포 선생의 시가 걸려 있다.
# 갈천서원중건기 (번역:고성향고 심상정 전교) 고성현의 북쪽 혼돈산 아래 갈천에 서원이 있다. 이 서원은 행촌 이선생, 묵재 노선생, 관포 어선생 삼현을 병향하던 곳이다. 대개 고성의 고을은 삼선생이 머물러 사시던 곳으로 그 옛날 향인들이 행촌 이 선생을 위하여 현의 동북쪽 회화면 봉동리 곰실마을에 금봉서원을 세웠다. 그러나 임진란의 병화로 원우와 문적이 모두 소실되었으니 사림의 한스러운 바가 컸다. 숙종 때 임진 계사년 즈음의 사적을 살펴보면 혼돈산 아래 갈천은 일찍이 어선생이 유상하던 곳이었으므로 여기서 비로소 선생을 위한 사당을 세워 향사하였다. 시임(始任)은 이석항 문이태 전성직 등이었다. 그러다가 임란 후 2백여 년이 지난 경종 원년 신축(1721)에 사림의 공론으로 3선생을 연향(聯享)하게 되었다. 이로써 본 원은 그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그 후 정사 임술년(1737~1742) 사이 옛터에다 중수하였으니 시임(時任)은 최항대와 강성주 등이었다. 신묘년(1771)에는 원우가 무너지는 큰 수해를 입게 되었으므로 부득이 어산 밑으로 서원을 옮겼는데 거기도 역시 갈천의 한 구역이었고 시임은 최광첨이었다. 갑인년(1794)년에 심한 풍우로 말미암아 원우가 물에 잠겨 경퇴하였으니 그때의 경황은 말로써 다할 수가 없었다. 곧 중건을 논의하게 되었는데 어떤사람은 이건을 강조하기도 하고 혹은 옛터에 중건하기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는 흉년이 거듭되어 재정이 매우 어려웠고 또 향교의 중수에도 힘이부치는 상황이었으므로 이러한 실정을 감안하여 옛터에 중건할 것을 공론으로 정하였다. 시임은 성사범 이광벽 강진일 등이었다. 그리하여 을묘년(1795) 10월에 조역하였는데 공사 중간에 이광벽 간사의 상을 당한지라 최치악이 간사를 맡았다. 병진년(1796) 5월에 준공하였다. 봉안일은 6월 22일이었다. 이날은 천기 청랑하고 많은 선비들이 운집하여 봉안을 봉축하였다. 이번의 서원 중건은 지극히 어려운 여건 속에서 이루어진 사문의 성사(盛事)였다. 돌이켜보면 집사자의 갈력탄성(竭力殫誠)과 고을 태수 남이익의 도움이 없었던들 어찌 능히 이룰 수가 있었겠는가? 여러분의 노고에 사림은 깊이 감하(感賀)하는 바이다. 3선생의 청분유적(淸芬遺蹟)은 아직까지 모아서 문집으로 만들어 원중에 갖추어 두지 못하였으므로 후인들을 위하여 나에게 기문을 청하거늘 참월(僭越)함을 무릅쓰고 원사공역 전말의 대략을 갖추어 적는다. 숭정 기원 후 상지20년 세적룡(1796) 후생 전주 최일대 삼가 쓰다. |
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  입력 : 2025년 04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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