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손 엄지와 검지가 없다. 그래서 지체 4급이다. 하지만 컴퓨터 수리도 하고, 컴퓨터 수리 상도 받았다. 김창열씨는 마음먹으면 안 되는 건 없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래서 손가락이 남들보다 좀 적어도 못하는 것이 없다.
2000년쯤. 김씨는 부산 영도의 자동차 공장에 근무하고 있었다. 신차가 막 출고되려는 시점이어서 일이 너무 많았다. 지친 아주머니들을 도와주다가 그만 프레스기에 손가락이 끼었다.
물론 산재 처리도 되고, 치료도 무사히 끝났지만 마음의 상처는 치료하기 힘들었다. 타락하고 방황했다. 두 손 모두 자유롭다가 어느 날 갑자기 연필도 숟가락도 젓가락도 쥐기 힘들어졌다.
다치기 전엔 생각지도 못하던 일들이 어려워졌다. 그러다 보니 글을 한 자 쓰려 해도 남들은 상상도 못하는 고통을 겪었고, 밥 한 술 뜨기 위해 마치 처음 숟가락을 쥐는 아이처럼 먹어야 했다.
그러는 와중에 자연스레 부지런히 노력하는 것이 몸에 배어버렸다. 그래서 사고방식까지도 점점 달라지기 시작했다. 제대로 살기 위해 노력을 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오른손은 주머니에서 나올 줄을 모른다. 그렇게 지내다가 2004년 고성에 내려왔다.
4달 전 어머니가 목이 이상하다 하더란다. 편도선이 부은 거라 생각하고 병원엘 모시고 갔다. 의사가 정밀검사를 받으라 했다. 후두암이라 했다.
“말로는 그 기분 표현 못하죠” 지금도 그때 그 참담한 기분이 떠오르는 듯 말한다.
그래도 지금은 어머니 병도 많이 호전돼 말도 잘 하시고, 음식도 잘 드신다. 수술도 잘 끝나 이제 방사선 치료를 하고 있다. 5년만 재발하지 않으면 완치다. 간병인을 둘 만큼의 상태는 아니지만 그래도 김씨는 퇴근 후 저녁마다 어머니께 간다.
김씨는 지금 지체장애인협회에서 운영하고 있는 장애인휠체어택시를 운전한다. 자원봉사는 아니지만 언제나 봉사하는 마음으로 일한다. 김씨는 “다른 데를 갈까 생각도 했지만 이 일이 좋습니다. 여기는 저를 필요로 하는 곳인 듯하다”며 웃는다.
김씨의 나이는 36살. 덕분에 어머니의 결혼하라는 지청구를 쉬지 않고 듣는다. “저는 아직 할 일이 너무 많아서 결혼을 못하겠어요”하는 노총각 김씨. 다만 어머니가 입원 중이라 혼자서 집안일을 해내는 것이 아직은 벅차다고 한다.
손가락을 잃은 기억을 잊기 위해 취미로 시작하게 된 컴퓨터 수리는 이제 장애인기능대회에서 은상을 수상할 정도로 전문가 수준이 됐다. 업으로 하는 것은 아니지만, 업으로 수리하는 사람들만큼의 수준이 됐다.
김창열씨는 자신은 가벼운 장애라며 다른 장애인들에게 “젊은 사람은 장애가 있더라도 체육동아리, 취미생활, 노래교실 등을 할 수 있는데 안하는 분들 많다”며 교육프로그램이 좀 많았으면 좋겠다고 한다.
또 “나도 할 수 있다, 하고자 하는 의욕만 있다면 해낼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야합니다. 희망을 가집시다”라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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