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고성신문 | |
“인민군이 와서는 밥을 해주라쿠데…우리가 그리 무서븐 세상을 살았다 아이가”
“박 하사! 팔에 무슨 피야?”… 총알이 팔을 관통한 것도 모른채 전투 벌여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오전 4시.
북쪽에서 남쪽으로 탱크와 포탄, 그리고 인민군들이 내려왔다. 그래서 전쟁이 시작됐다. 다른 나라도, 다른 민족도 아닌, 같은 땅덩어리에 사는 같은 민족이 서로 총부리를 겨눴던 3년. 그 동족상잔의 비극을 사람들은 잊어가고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종전>이 아닌 <휴전>상태다. 지구상의 유일한 휴전국.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일에 앞서 그날의 격전과 긴장, 그리고 우리가 잊어가는 이야기들을 다시 한 번 들어본다.
<편집자주>
#죽음을 마다않은 대가는 12만원?
김덕보 무공수훈자회 고성지회장
우리는 정말 고생 많이 했어. 죽음을 마다않고 싸운 사람들이지, 우리가. 고성은 무공훈장을 3명이 받았어. 그 외에는 화랑훈장이지.
태어난 운명이 안 죽고 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굴진운동이라고, 총알 피하는 훈련을 받아서 다행히 안 맞고 살아 돌아왔어.
내 생각인데...요즘 정부는 배려 부족이야. TV나 신문에서 사욕을 위해 받고 가지면 안되는 돈을 가지고 사건을 일으킨 사람이 고관들이거든.
그런 사람들은 나라에서도 도움을 주잖아. 하지만 나라를 위해 싸운 유공자의 대우가 약해. 국가에서 주는 영예금이 있는데 무공수훈자...훈장을 받았다는 사람들이 12만원, 전쟁에 목숨 내놓고 싸운 참전용사는 7만원. 우리 목숨이 많아야 12만원어치냐고. 돈의 문제가 아니라 그만큼의 성의 문제야.
- 목숨을 걸고 이 땅의 평화를 지켜냈지만, 그 평화의 값과 목숨의 값을 합친 것이 겨우 12만원. 물론 김 고성지회장의 말처럼 성의의 문제지만, 그들은 총알이 오가고 그 총알에 팔이 뚫려가며 대한민국을 지켰다. 그들에게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것이 고작 12만원의 영예금이란 말인가. 할인혜택을 준다 해도 그들은 움직일 일이 없어 그 혜택을 받지도 못하는데 말이다.
# 그 무서븐 세상을 살았다 아이가
대가면 배칠갑 할머니
내가 스물 여남은 살 될 땐갑다. 그때는 아가 없을 땐데...뭐시 다가닥 다가닥 샀드마는 인민군들이 우리 집에를 쑥 들어온다 아이가. 그래 밥을 해주라 쿠데. 말들이 동네 쭉 늘어서가 있는데, 무섭더라꼬.
내가 지금 그것들이 왔으모 머시라 캤으낀데 그때는 내가 아무 말도 몬했다. 그래 부석에서 불을 때가 밥을 하는데...솥에 밥물이 안 흐르나. 그기 흐르고 있는데 무전을 받드마는 고마 싹 나가삐는 기라. 그래 뭐 밥은 묵도 안하고 갔지.
피난은 안가도, 그래도 폭탄이 떨어지고 그랬다. 가동하고 수암에는 폭탄이 떨어지는 바람에 집도 폭싹 내리앉고, 사람도 죽었다 쿠드나...모리긋다.
참, 아이고...우리가 그런 무서븐 세상을 살아냈다 아이가.
- 더 남쪽으로는 바다 밖에 갈 곳이 없어 피난도 못간 고성 사람들. 그들은 그나마 편한 전쟁을 보냈지만, 그래도 시시각각 그들을 위협하는 비행기 소리와 폭탄이 터졌다는 소식은 이미 57년이 지난 지금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난다고 한다.
모든 것이 지나면 추억이 된다지만 딱 하나, 서로 죽고 죽이던 그 전쟁이라는 난리만큼은 절대 추억이 되지 못한다. 그것은 그 당시나 지금이나 모두 악몽이다.
# 113일 전선 기록 - 박성지 (회화면)
50 년, 스무살에 입대했어. 무서운 게 무슨 소용이야. 나라에서 부르니 그냥 간 거지. 가보니 부모 형제 위해서 싸우는 것이더라고. 안강전투, 아직도 생각나요.
포항부터 경주까지 점령하면 대구는 그냥 독안에 든 쥐지. 안강역에 집결해서 저녁을 먹고 앉았자니 차가 와서 우릴 실어갔어. 어딜 들어섰는데 생전 맡아본 적 없는 썩은 냄새가 진동을 하는데 뭔지는 몰랐지. 하사가 <지금 자면 죽는다. 자지마라>길래 눈 부릅뜨고 아침까지 버텼어. 눈을 떠보니 세상에, 그 썩은 냄새 나는 곳이 시체 구덩이더라고.
산이고 뭐고 할 것 없이 시체 구덩이야. 인민군을 묻은 모양인데 까만 군화만 보여. 거기다, 물이 없어 산 밑에 계곡에 가서 물을 길어오는데 계곡 바로 위에 시체가 쌓여있었지. 그것도 모르고 그 물을 마셨어.
그날 저녁에 첫 교전이 있었고 다음날엔 후퇴가 시작됐는데 영산강에 헌병이 돌아서 있어. 폭탄이 떨어져서 다리가 없어졌어요. 어찌어찌 강을 건너니 이번에는 또 10일이나 접전이네. 후퇴하면 총살한다는 명령까지 떨어지는 긴박한 상황이었지. 내가 살아야 조국이 있지 내가 없으면 조국도 없다는 생각으로 전투했어. 하루 8번까지도 접전에 접전을 거듭했지.
그래서 우회하니 누가 탄창을 옆에 두고, 손은 철사로 총에 묶여있고, 발도 철사로 묶여있어. 인민군이 후퇴하며 남겨놓은 병사라 하더라고.
9월 중순쯤 37도선까지 후퇴하라는 삐라가 뿌려졌어. 그래서 음력 8월 15일 안동국도 따라 안동에 들어갔더니 주민들이 함지박에 뭔가 이고 나와. 뭔가 보니 인절미야. 얼마나 반갑던지. 그때는 워낙 먹을 것도 없던 시절이고, 전쟁 중이니 먹을 거라곤 아무 것도 없었지.
태백산 넘을 때는 건빵 6봉지가 3일치 식량이었어. 건빵은 아까워서 부숴먹지도 못해. 전방까지 보급이 안 되니 영월에서는 피난 간 집 뒤져서 밥 해먹어. 피난 가면서 팥이며 콩을 부엌에 두고 가니, 그거 찾아내서 삶아먹어. 산골은 다 그래요.
소백산(문경) 공격해 북진하는데, 하루 240리를 걸어갔어. 빨리 올라가야 추수한 것을 인민군한테 안뺏긴다 그런 이유였지. 대관령을 걸어서 지날 때 주막에서 한 말, 지금도 잊지 않아. <아저씨 평창 얼마나 남았어요?> <5마장 정도>
많이 걸으니 군화 속 발이 다 터져. 빈집 가면 제일 먼저 한 게 밥, 두 번째가 발 씻기. 발을 씻고 비누를 깔아 신으면 덜해.
그 때 인민군 포로도 잡았어. 애가 어리니까 포로수용소에 보내지 않고 분대장이 데리고 다녔어. 그러면 그 애가 북한 지형을 다 알려줘. 그런데 흥남 가기 전에 강 앞에서 애가 갑자기 주저앉길래 이유를 물었더니 어머니가 강 건너에 나와 계신대. 어머니랑 만난 그 애나 그 애 가족들이나 전부 얼싸안고 울어. 살아 돌아왔다고...
참, 안강전투 때는 송장이랑 잠도 잤어. 잠을 못자니 미치겠는 거야. 그래서 땅을 파고 들어가 잤는데 자꾸 뭐가 걸려. 그게 송장이었던 거지. 낮에 얼른 뛰어나와 고개 넘어가니 분대장이 기다리더라고.
인민군이나 백성 모두 사복차림이라 구분 못해. 눈에 거슬리면 다 쏴. 안 그러면 내가 못살아. 인민군은 그래도 티가 났어. 얼굴도 행동도 달라. 흥남 시내서는 백발노인이 국군 보고 태극기 흔들다가 인민군한테 총살당하기도 했어.
풍산 가서 인민군 훈련소 구경도 했어. 말로만 듣던 삼수갑산을 5마장 남기고 철수했지. 철수하던 중 왼쪽 팔을 뭉둥이로 때리는 기분이 들더라고. 한석권 분대장이 <박하사, 팔에 무슨 피야>하길래 보니 팔에 탄피가 박혀있어. 최전방이니 위생병이 있을 리가 없지. 압박붕대로 대강 묶고는 적진을 지나 80리길을 걸어갔어.
6월 28일 입대해서 11월 3일 부상당했지. 부산 국군병원에서 치료받았어. 아, 그때 한석권 분대장이 자기 주머니를 탈탈 털어 그때 돈으로 5~6만원 주면서 <병원 가면 돈 들 거다. 가서 맛있는 것 사먹어라>라고 했어. 둘이 이별하면서 참 많이 울었지. 그때는 혹시 포로로 잡히면 비밀 유출된다고 이름도 안가르쳐 줬어. 한석권 분대장, 장교로 진급하라 해도 싫다고 항상 1분대장만 했지. 뚝섬출신 한석권 분대장, 내가 꼭 찾고 싶은데 방법이 없어.
이후 기자가 한석권 분대장을 찾기 위해 고향이라는 서울 뚝섬을 근거로 노유동, 구의동 등의 동사무소와 연락을 해봤으나 주민번호를 몰라 실패했다. 병무청 역시 군번을 몰라 조회조차 하지 못했다.
결국 뚝섬 근처의 초등학교 중 가장 오래된 학교를 수소문했고, 그 중 1918년부터 있었던 경동초등학교와 연락을 취했으나 학적부가 전쟁 중에 불타버려 1956년 학적부부터 있다고 한다. 기자가 생각하기엔 경동초등학교 출신인 듯 한데, 확인할 방법이 없어 안타깝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