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룡산(臥龍山)에 숨겨져 있는 이야기는 고려 제 8대 임금 현종(顯宗)의 이야기로 현종(顯宗)이 출생 후 어린 시절을 사천(泗川) 와룡산(臥龍山)의 와룡사(臥龍寺)에서 보냈고, 현종(顯宗)의 아버지 욱(郁)이 귀양살이 한 곳이 바로 이 사천(泗川) 와룡산(臥龍山)의 배방사(排房寺)이다.
고려사 권1에 종실 욱(郁)을 사수(泗水)로 귀양보냈다는 기사와 권 88 및 권 90의 기사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고적조(古蹟條)에서 나타난 종실(宗室) 욱(郁)과 현종(顯宗)에 관한 기사를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고려 태조의 여덟 왕자 중 제1자(惠宗), 제2자(定宗), 제3자(光宗)는 차례대로 왕위를 계승하여 즉위할 수 있었으나 제 4대 광종(光宗)부터는 후사계승(後嗣繼承)을 함으로 인하여 왕자로서 영화를 누리고 있었는데 5대 경종(景宗)이 헌애왕후(獻哀王后)의 소생인 송(誦)을 남겨 두고 재위 6년(982년)만에 죽게 되니 두 왕후(자매)는 청상과부의 몸이 되었다. 헌애왕후(獻哀王后)는 아들 송(誦)이 있으므로 외로움을 모르고 있었으나 헌정왕후(獻貞王后)는 슬하에 일점없이 청상의 몸으로 외로운 몸이 되었던 것이다. (두 왕후는 태조의 제7자 욱(旭)의 딸이다.)
경종(景宗)의 비(妃) 황보씨(皇甫氏:헌정왕후)가 궁(宮)에서 나와 사제(私第)에 있었다. 하룻밤에는 곡령(鵠領)에 올라가서 오줌을 누었더니, 도성(都城)에 흘러 넘쳐서 모두 은(銀)바다로 되는 꿈을 꾸었다. 점장이가 말하기를 “아들을 낳으면 한 나라에 임금이 될 것이오” 하니, 비는 “내가 과부(寡婦)인데 어찌 아들을 낳으랴”하였다. 종실(宗室) 욱(郁)은 태조의 여덟째 아들이다. 살고 있는 집이 비(妃)의 사제와 가까웠다. 그리하여 서로 왕래하다가 사통(私通)하여 임신(姙娠)하였다.
성종(제6대) 때 비(妃)가 욱(郁)의 집에서 자는 데, 그 집 사람이 뜰에다가 섶을 쌓고 불을 질렀다. 벼슬아치가 달려가 구원하고 성종(成宗)도 또한 바삐 가서 화인(火因)을 물었다. 그 집 사람이 사실을 아뢰니 비(妃)는 부끄러워 후회하였다. 자기집에 와서 겨우 문간에 오자 산기(産氣)가 있었다. 문 앞에 버드나무를 부여잡고 몸을 풀었으나 비(妃)는 죽었다.
그 연유로 욱(郁)은 성종 11년(992) 종친의 법도를 지키지 못함을 힐책하여 산남도(山南道) 사천현(泗川縣)에 있는 와룡산(臥龍山)의 와룡사(臥龍寺)에 유배(流配)되었다. 그리하여 왕명으로 보모(保姆)를 가려서 그 아이를 양육하게 하였고, 마침내 시모(侍母)와 종자(從者)를 딸려 와룡산(臥龍山)의 욱(郁)에게로 돌려 보내게 되었는데 이 아이가 후일에 현종(顯宗)이었다. 그러나 부자가 함께 살 기회를 주지 않고 욱(郁)은 배방사(排房寺)로 옮겨 살게 하여 부자간의 동거를 불허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배방사(排房寺)에서 와룡사(臥龍寺)까지는 능선을 따라 오르고 내리면 그렇게 먼 거리가 아니었다. 욱(郁)은 날마다 아들 순(詢)을 만나는 것을 낙으로 삼고 있었다. 성종 16년(997) 7월 7일에 종친의 몸을 지키지 못한 죄로써 천리타향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6년만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욱(郁)은 아들 현종(顯宗)에게 금(金) 한 주머니를 가만히 주면서 “내가 죽거든 이 금을 술사(術士)에게 주고, 나를 고을 성황당 남쪽 귀룡동(歸龍洞)에 장사하라. 그리고 반드시 엎어서 묻도록 하라.”하였다.
욱(郁)이 귀양 사는 곳에서 죽은 뒤에 현종이 그의 말과 같이 하였는데, 매장한 무렵에 엎어서 묻도록 청하니, 술사가 “무엇이 그리 바쁜가” 하였다.
다음 해 2월에 현종(顯宗)에게 대량군(大良君)이란 시호를 내리고 귀경을 시키니 강보에 싸인 채로 떠났던 순(詢)이 개경에 돌아왔다. 대량군이 12세(1003) 숭교사(崇敎寺 )에 출가하고 숭교사에서 수도를 하고 있던 순(詢)이 다시 삼각산 신혈사(神穴寺)로 옮겨가 있었다.
성종(成宗)은 병약하여 왕위를 순(詢)의 이모(헌애왕후)의 아들 송(誦 : 목종)에게 전위하였고 목종(穆宗) (제 7대)은 재위 12년 (1009년) 강 조(康兆) 등에 의하여 퇴위하게 되고 대량군을 왕위에 등극케 하니 이가 곧 고려 제8대 현종(顯宗)이다. 즉위해서는 욱(郁)을 뒤쫓아 높여서 효목대왕(孝穆大王)이라 하고 묘호(廟號)를 안종(安宗)이라 하였고, 그 뒤엔 건릉(乾陵)에 이장(移葬)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