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썩은 고기를 먹는 식성과는 다르게 깨끗한 환경만 찾아다니는 독수리가 매년 100여 마리가 찾아드는 마을이 있다. 그 마을을 가로지르는 내에는 일급수가 흐른다. 또 마을 앞에는 산이 우뚝 서 있는데 그 산은 마치 달마가 마을을 굽어보는 형상이다.
달마가 있는 동네로 유명한 고성군 개천면 청광리는 임진왜란 전후(1600년 대)에 하나둘씩 모여든 사람들이 청남과 청동으로 나뉘어 살았다.
# 푸른 아름다움이 동쪽에 있어 청동마을
동북쪽 진주와 접한 청동마을. 산 아래 나선저수지를 따라 작은 내도 흐른다.
느티나무 그늘이 드리운 물속을 보면 크고 작은 피라미들이 헤엄치고 있다. 전주 최씨, 재령 이씨가 대부분인 청동마을은 조선시대 당시 선비 6형제가 공부한 고개라 하여 ‘육이재’라고 불렸다.
청동마을에 있는 문화재 자료 제292호인 밀양 박씨 박진사 고가는 사랑채와 안채, 곳간, 대문 등 조선 후기의 사대부집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그 뒤에 병풍처럼 둘러쳐진 산에서는 달마가 청광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이 산이 보잠산인데, 달마가 굽어보는 곳은 청남마을 달마선원이다.
# 달마로 중생에 보시하라
달마선원은 청광 김영대씨가 지은 절이다.
청광은 고성에서 태어나 진주남중과 진주농고를 졸업하고 공무원이 되었다. 하지만 선천적 구순구개열(속칭 언청이)을 가진 청광을 곱게 보는 이가 없었다.
몇 번을 죽으려 자살 시도를 해봤지만, 하늘은 명이 아직 다하지 않은 그를 거두지 않았다. 그러다 흘러든 전라도 해남의 한 암자에서 달마가 꿈에 나타나 “지금 네가 보는 나를 그려 중생에게 보시하라”고 하더란다.
그 길로 달마를 그리기 시작한 청광은 달마가 내려다 보는 청광리에 달마선원을 짓고, 전국에서 몰려든 2만여 통의 편지와 함께 달마의 집에 기거하고 있다.
# 애달픈 사랑이 있는 남쪽의 푸른 마을
뒷산이 소뿔(牛角)처럼 생겼다고 하여 ‘소뿔담’이라고 불렀다는 청남마을.
마당몰이(中村), 웃담(上村), 청광물(靑光谷)이 모여 마을을 이룬 청남마을에서 전해오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옛날 소뿔담으로 불릴 쯤의 청남마을에 담을 하나 사이에 두고 처녀, 총각이 살고 있었다. 처녀의 집은 양반으로 부잣집이었지만, 총각집은 가난했다.
예의가 엄격한 집 총각이라 마음이 착하고 용모 또한 준수했다. 어느 날 글을 읽던 총각을 본 처녀가 한눈에 반했더란다.
그래서 처녀는 몸종을 시켜 '내일 한나절 해가 그림자를 발아래에 오게 하거든 소당산 깊은 산골에 있는 큰 바위까지 나오라'고 총각에게 전했고, 처녀와 총각은 만나자마자 그만 사랑에 빠져버렸더란다.
소문은 퍼지고 퍼져 결국 처녀가 아이를 가졌다고까지 부풀었다. 소문을 들은 총각이 결혼으로 일을 정리하고자 했지만, 처녀의 아버지는 가문을 욕되게 한 죄를 물을 것이라 했다.
총각의 간청에도 꿈쩍 않는 처녀 아버지를 이기지 못한 둘은 소당산 큰 바위에서 몸을 던졌다. 그 순간 하늘에서 천둥번개가 치며 큰바위가 반으로 뚝 갈라졌단다.
# 소값 좀 올려주소
전설처럼 전해오는 사랑 이야기를 담은 산을 뒤에 두고 약 40가구가 모여 사는 청남마을은 소도 키우고 논에는 벼를 키우는 전형적인 농촌마을.
주민들은 특히 젖소를 많이 키우는 청남마을에는 얼마 전 최신식 축사를 새로 지어 배설물 등의 오염이 없어졌다며 자랑이 대단했다.
하지만 이 마을의 이병원(62)씨는 “요즘은 아무리 세상이 좋아도 우리 동네도 고령화 동네야”라 말했다. “마을 전체가 노력해 고령화를 극복하고, 우리 마을의 단감이나 밤 등 농산물을 살릴 방법을 찾아야할 것”이라며 어려운 농촌 경제를 탄식하듯 뱉어낸다.
농촌체험마을로 선정이 된 청광리에는 요즘 제초제를 찾아볼 수가 없다. 예전에는 ‘그라목손’이라는 독한 제초제를 썼단다. 그런데 그 농약이 잡초만 죽이는 게 아니라 근처의 농작물에도 해를 끼쳐 이제 사용을 중지했다고 한다. 대신 우렁이 종패를 이용하는 등 친환경농업에 열심이다.
하지만 여느 농촌과 마찬가지로 살림은 나아지질 않는다며 마을의 어르신들은 하나같이 “기자님, 우리도 좀 맘 편하게 먹고 살게 소값이나 좀 올리게 해주소”라는 말들을 쏟았다.
전 이장을 맡았던 청동마을의 최호은씨는 “소값도 뚝뚝 떨어지고, 친환경농업을 하긴 하지만 생산량이나 판매량이 그다지 나아지질 않는다. 또 워낙 젊은 사람들이 없는 탓에 우리 마을 평균 나이도 노인이다. 농촌이 우리 대한민국의 근간 아니었나. 농촌을 살릴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고 했다.
작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청동과 청남으로 나뉘어 400년을 살아온 청광리.
그곳에 가면 일급수가 흐르는 내와 달마가 굽어보는 산 그리고 이야기가 있고 심성 착하고 소박한 사람들이 있다.
어르신들의 말씀처럼 소값도 좀 오르고, 쌀값도 좀 쑥쑥 올라서 젊은 사람들도 다들 고향으로 돌아오는 그런 날이 언젠가는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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