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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째 당뇨 앓은 아내 병 수발…반 백년 동안 9남매 키워 자손들만 32명
아주 예전에 스무살 총각이 19살짜리 여자아이와 결혼을 했다. 총각은 “가시나”랑 어떻게 살지 고민했단다. 그냥 무작정 잘해줬다. 어느 날부턴가 19살 여자아이도 잘해주더란다. 그래서 그 둘은 56년째 싸움 한 번 안하고 살고 있단다.
그 두 어린 부부는 이제 황혼에 접어들었다. 아니, 접어든지 한참 지났다.
이정원(76·거류면 가려리) 할아버지와 김태수(75) 할머니는 56년을 해로하며 한 번도 다툰 적이 없다. 9남매를 낳고 반백년이 넘게 함께 살아도 큰소리 한 번 난 적이 없다.
이정원 할아버지와 김태수 할머니 슬하에 32명의 자손을 두고 있다.
꾸무럭거리는 하늘이 곧 비를 뿌릴 것만 같던 지난 주 금요일, 기자가 이정원 할아버지 댁을 찾았을 때 이정원 할아버지는 볍씨를 뿌리느라 분주했다. 외양간에는 소가 긴 하품을 뱉고 있었고, 할머니는 어두운 방에서 목소리만 흘러 나왔다.
“할머니”를 대여섯 번 부르니 “누가 왔는갑다. 끊자”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리고 종일 누워만 있어 뒷머리도 같이 누운 할머니가 나오셨다. “내가 눈이 좀 안 보여서...”할머니의 시선은 기자가 아닌 마당 가운데쯤으로 고정돼 있었다. “당뇨가 심해서 눈이 안 보인다 아이가. 할매는 아랫도리는 움직이지도 못한다.” 아내의 불편한 거동을 지켜보던 할아버지가 한숨처럼 말을 내뱉는다.
할머니는 40년째 당뇨를 앓고 있다. 1960년대 어느 날부턴가 할머니가 물을 많이 마시기 시작하길래 소갈이 났다 싶어서 병원엘 가봤더니 당뇨 판정이 내려졌다.
하지만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 돈 잡아먹는 병, 당뇨를 앓고 있자니 입원도 약값도 부담이었다. 아침마다 할아버지가 일 나가기 전 주사를 놓고, 약을 챙겨주고 있지만 할머니 병은 점점 나빠져 손발이 저리고 눈이 안 보여 지금은 시각장애 1급이란다. 하지만 자식이 아홉이나 있고, 집도 있고, 논도 있으니 장애수당은 전혀 받을 수 없다. 그렇다고 자식에게 기댈 수도 없다. 자식 아홉이 하나같이 넉넉한 사람이 없다.
할머니는 돈을 잘 벌어오는 것도, 이름이 알려져 권세를 누리는 것도 아닌 할아버지를, 말씀하실 때마다 보이지 않는 눈으로 정확히 찾아내며 웃으셨다. “할아버지가 속 썩이지는 않으셨어요?”하는 기자의 질문에 56년 전 새색시 적으로 돌아간 듯 수줍게 웃으며 “뭘 속을 썩여. 젊을 때부터 참 잘했다. 한 번도 속 안 썩이고 잘했다”고 칭찬하신다. 자녀분들은 잘 오시냐는 물음에 일주일에 한 번씩 순서 정해서 한 명씩 돌아가며 청소도 하고 밥도 해주고 한다며 먼 산을 보신다.
자식이 와도 보고 싶은 그 얼굴을 못보는 그리움, 그리고 자식이 힘들게 사는 것 다 알아도 돈 한 푼 쥐어주지 못하는 미안함 때문에.
할머니 상태가 많이 안좋아지면서 노부부는 작은 소원 하나가 생겼다. “할매 죽기 전에 막내아들 내외간에 결혼하는 걸 봐야지. 결혼을 시켜야 하는데 내가 돈이 없으니 선뜻 하라할 수가 있나...”. 막내아들 내외는 혼인신고만 한 채로 살고 있단다. 아이도 이제 돌배기 하나가 있는데 결혼식을 안 올려서 남들 다 있는 결혼사진 액자도 없단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결혼식도 시원하게 못치러주는 신세를 참 한스러워 하셨다.
막내아들은 사업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사업이 자리 잡는 대로 결혼식을 올릴 계획인데도 부모님 마음은 그렇지 않은가 보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9남매 중 창원에 사는 넷째아들 이경호씨는 “아버지 나이가 벌써 76세신데 그 연세까지 농사짓고 계신 걸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거기다 어머니는 건강까지 악화되셨으니 자식 된 도리로 부모님을 모셔야 하는데 형제들이 하나 같이 넉넉한 살림이 없으니...”라며 부모님께 송구스러워했다.
한 번은 부모님을 이경호씨 집으로 모셔온 적이 있었다. 하지만 평생을 들에서 농사짓고 사신 부모님은 아파트를 그렇게 답답해하시더란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다시 고성으로 모셔온 것.
할아버지는 “내가 지팡이를 짚어줘야 자식들이 제대로 나가는데, 돈도 없고 아무 것도 없으니 그 노릇을 못한다”며 목에 생선가시가 걸린 듯한 한탄을 하셨다. 할아버지는 5천 평 농사를 짓지만, 모두 남의 땅이다. 할아버지 땅은 얼마 되지도 않는다. 그러니 넉넉하지 않아 자식들에게 변변한 도움이 못되는 것이 언제나 마음에 걸린다.
하지만 형제간의 우애나, 부모님을 공경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도, 어디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넉넉하다. 그래서 작년 겨울에는 바르게살기운동협의회에서 수여하는 모범가정상도 받았다.
부부간에 사이가 좋은 걸 보고 자란 자식들이니 우애도, 부부간도 사이가 안 좋을 수가 없다. 자식들은 많은 재산을 바라지도, 높은 명예를 바라지도 않는다.
이정원 할아버지, 김태수 할머니의 9남매는 부모님이 그저 더 이상 편찮으시지 않고, 오래 사시기를 바랄 뿐이다.
나오는 길에 제비 한 마리가 할아버지 댁 처마로 날아드는 것을 봤다.
처마 끝의 제비집에, 어미로 보이는 제비가 먹이를 물어 날랐다. 먹이를 새끼 입에 넣어주는 모양이 꼭 할머니를 위해 밥을 챙기고, 약을 챙겨 먹이는 할아버지 같다. 사람 사는 것을 동물이 흉내 낸다더니, 제비가 사이좋은 할아버지 할머니를 흉내 내는 것만 같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넷째 아들 말처럼 “딱 그만큼만 건강하고, 사이좋게” 오래오래 사시기를 바라며, 할아버지 댁을 나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