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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이 벌한 폭정 통제사 ‘신대영’의 碑
10여 년 전만 해도 남‘산’이기만 하던 곳이 이제는 남 ‘공원’이 됐다.
철마다 피는 갖가지 꽃에, 나무들이 뿜어대는 피톤치드 덕분에 온종일 사람들의 발길이 머문다. 남산을 찾아 올라가다보면 84계단 앞에 죽 늘어선 비석들을 볼 수 있다.
이 비석들 덕분에 남산 초입은 ‘비석거리’라는 이름도 얻었다. 비석거리의 총 26개 비석 중 대부분은 고성에 부임한 통제사들의 공적을 기린 비고, 하나는 전설의 고향에도 나온 사연이 깃든 밀양 박씨 열녀비다.
그 중 한 비석이 유독 눈길을 끈다. 겉으로는 다른 비석들과 별반 다를 것도 없다. 다만 절반쯤은 모자(개석)를 쓰고 절반은 쓰지 않았다는 것 정도. 이 개석은 왕의 허가가 있어야 씌울 수 있는데, 반쯤은 개석이 없으니 왕이 허가를 하지 않았던가 보다.
그럼 왜 다를 것도 없는 비석들 중 하나가 눈길을 끈다는 것일까. 이 비석에는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비밀이 하나 있다.
이 비석들은 70년대 초중반 한창 새마을 운동 구호를 부르짖던 당시 고성읍내에 흩어져있던 것을 한데 모아 다시 세운 것이다. 그러던 중 김춘랑 시인(現 소가야문화보존회 집행위원장, 시조시인)이 땅에 묻혀있던 비석을 하나 발견했다.
비석의 내용인 즉, 극히 높은 산이요 극히 긴 물인 당신의 그 은혜를 어찌 갚겠는가, 공덕이 산과 같고 공의 혜택이 물과 같다는 것.
이 비석의 주인은 고성 통제사로 부임했던 신대영(申大 ). 그런데 또 한 가지 눈길을 끄는 대목이 이름 가운데 대(大)자다. 대자 가로획을 잘 보면 획 끝에 점이 하나 박혀있다. 자연마모로 보이지 않는, 정처럼 뾰족한 것으로 쪼아 만든 듯한 점이다.
그래서 결국 대자는 개 견(犬)자가 되어버렸다. 뿐만 아니라 이름 뒤의 선정(善政) 중 政자는 심하게 훼손해 얼핏 보고는 짐작조차 할 수 없을 정도다. 이는 위의 대자가 견자로 바뀐 것까지도 의도적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비의 아래 받침석을 보면 ‘매치처’라는 단어로 보아 이 비가 묻혀있던 것과 이 비를 땅에 묻은 사람을 알 수 있다. 정축년(인조 15, 1637), 4세손 그리고 종자, 매치처 등의 단어로 볼 때 정축년 2월 통제사 신대영의 4대 손자인 신홍주라는 통제사가 고성에 부임해와 조상의 악덕을 나타내는 이 비를 발견해 매립한 것으로 보인다.
조상의 욕된 것을 바로 보지 못하는 자손의 입장에서는 이 비석을 부수기도 그냥 버리기도 곤란했을 것이다. 그래서 생각 끝에 땅에 묻었을 것이다.
이 비석이 만들어진 시대는 16~17세기쯤으로 추정된다. 당시 신대영이라는 통제사는 아주 포악한 성격으로 추정되는데 제일 처음의 極자가 추정 이유다. 극(極)자의 경우 조선시대 당시에는 임금 외에는 쓰지 않았고, 만약 쓰게 되면 역적으로 몰리는 등 중죄에 해당하는 일이었다.
때문에 이는 아첨을 좋아하는 무리들이 썼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선정을 베푼 사람보다 악덕한 사람에게 이러한 내용을 붙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 반어법일 수도 있고, 선정을 바라며 미리 만들어둔 비석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신대영이라는 자가 포악한 통제사였음은 확실해 보인다. 그리고 政자의 훼손은 정치 같지 않은 정치를 해 민심을 얻지 못했음을 백성이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이는 대자가 견자로 둔갑한 이유도 된다.
김춘랑 시인은 “워낙 포악한 통제사이니 백성들의 원성이 높았을 것이다. 때문에 이러한 비석의 훼손을 통해 신대영이라는 통제사의 악덕을 후세에까지 남기고자 한 것이라 풀이된다”며 “이는 고성의 민주주의 정신이 이때부터 발현된 것 아닌가 한다”고 설명했다.
400년 전, 고성에서 정치답지 않은 포악한 정치로 민초들을 힘들게 한 신대영이라는 통제사. 그래서 큰 大가 아닌 개 犬자를 이름자로 얻은 악독한 그의 이름은 고성 남산공원 84계단 바로 앞 첫 번째 비석에 그대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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