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겨찾기+ 2025-07-11 15:39:45
회원가입기사쓰기전체기사보기원격
뉴스 > 특별기고

엄마


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입력 : 2023년 12월 22일
↑↑ 박미영 씨(왼쪽 첫번째)가 90세 노모와 보낸 즐거운 한때
ⓒ 고성신문
ⓒ 고성신문
추운 겨울을 이기려고 사람은 두꺼운 옷을 입는다. 나무는 잎사귀를 떨어뜨리고 앙상하게 가지만 남긴다. 온 엄동을 견딘다. 때론 사람도 나무처럼 엄동설한을 견디는 삶을 살아낸다.
지난해 연말 언니와 나는 한 해를 무탈하게 보낸 기념으로 저녁을 먹자고 약속해 두었다. 맛집으로 소문난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한 후 이야기를 나누었다. 음식이 나오기도 전에 서울 사는 동생한테 전화가 왔다. 동생의 목소리는 다급했고 떨리고 있었다.
“왜 전화를 받지 않았어. 두 통이나 걸었는데.”
시골에 사는 아재한테도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덜컹 심장이 뛰었다. 엄마가 스쳤다. 앞이 보이지 않았다. 떨리는 손으로 전화기를 눌렀다. 아재는 119구급차가 엄마를 병원으로 이송 중이며 구급대원의 전화를 받으라고 했다.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컴컴한 밤에 운전대를 잡고 급하게 달려갔다. 병원에 도착하니 엄마는 언니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경로당에서 있었던 일을 조근조근 말씀하셨다. 못 일어서고 자꾸 넘어진 이야기를 반복하면서도 달려온 딸에게는 담담한 표정이었다. 코로나 검사 결과 확진이었다. 다음 날 코로나 환자가 입원할 수 있는 병원으로 급하게 옮긴 후 일주일 동안 치료를 받았다. 경로당에서 다섯 명이 확진되었고 평생을 함께 산 이웃집 아주머니는 세상을 떠나셨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엄마가 살아온 삶은 강인한 세월을 보듬고 있었다. 엄마의 눈물은 그 회한이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코로나 치료약은 그렇게 강인했던 엄마를 무너뜨렸다. 보호자만 보이지 않으면 링거 바늘을 뽑고 침대에서 내려오려고 몸부림을 쳤다. 집에 가고 싶어 했다. 왜 그랬을까. 눈만 뜨면 논밭에서 사셨다. 비가 와도 밭에 계셨던 엄마였다. 엄마는 혼자서 화장실에 갈 수 없고 앉아서도 이동하지 못했다. 자식들은 엄마를 간호하고 보호해 줄 요양병원이나 요양원에 보낼 준비에 바빴다. 엄마가 금쪽 같이 키웠던 자식들은 그랬다.
외갓집은 가난했다고 한다. 육 남매 중 큰딸인 엄마는 공부 대신 동생들을 돌봤다. 외할아버지는 엄마를 종갓집 10남매 맏며느리로 시집을 보냈다. 장남인 아버지는 어릴 적부터 할아버지의 바람대로 서당에서 공부하며 한학자의 길을 걸었다. 자식 키우고 집안 대소사는 모두 엄마 몫이었다. 엄마의 고된 시집살이는 그렇게 이어졌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딸네 집에 거의 오시지 않았다고 한다. 어쩌면 딸의 힘든 시집살이를 바람결에 전해 들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릴 때부터 엄마를 보고 자란 나도 어느새 부모가 되었다. 엄마는 아무 말이 없었다. 당신은 시집간 날부터 속은 새까맣게 타들었고 누구에게도 속내를 드러내지 못했으리라.
일의 멍에에 짓눌린 탓에 엄마의 몸은 점점 쇠약해져 갔다. 사십 대 초반에 벌써 이명이라는 병을 얻어 한쪽 귀는 들리지 않았다. 병원에서도 고칠 수 없다고 하니 엄마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다행히 조금 남은 청력이 자식들과의 소통 창구가 돼 주었다.
학식을 갖춘 남편은 글을 배우지 못하고 평생을 사신 엄마와 육 남매를 두고 육십네 살에 먼저 세상을 떠났다. 설상가상으로 10년 전쯤에는 직장암을 앓았다. 천금 같은 큰아들도 가슴에 묻었다. 그런 세월을 살다 어느새 나이 구십이 되었다. 잠시도 앉아있을 새조차 없었던 엄마는 하염없이 하늘만 물끄러미 바라보곤 하신다.
엄마가 작물을 심고 수확하는 천 평 남짓 되는 밭은 삶의 터전이었다. 밭고랑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갖가지 씨앗을 묻고, 그 씨앗은 엄마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날씨가 무더운 여름철이 되면 콩잎은 바람결에 쉬이쉬이 쉬어가며 하라고 엄마한테 귀띔을 해주었다. 풀은 기세등등해졌고 엄마의 삶은 풀보다 더 강해져야 했다. 태풍이 몰아치거나 작물이 타들어 가는 가뭄이 길어지면 엄마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땅을 헤집고 나온 싹이 새의 먹이가 되었을 때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엄마는 땅에 순응했다. 다시 씨앗을 묻거나 모종으로 빈자리를 채웠다. 그리고는 돌아섰다.
엄마가 키워 낸 땀의 결실은 간장이 되고 된장이 되었다. 겨우내 먹을 김치가 되었고, 시집간 딸이 해산했을 때는 부기를 빼는 보약이 되기도 했다. 그것들은 모두 자식들 입에 들어갈 양식이었고 우리들의 학자금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딸들에게 엄마가 일을 못 하도록 말리라고도 하셨다. 엄마의 허리는 점점 힘을 쓰지 못하고 그렇게 굽어만 갔다.
그런 엄마한테 치매라는 병이 서서히 찾아왔다.
“엄마! 몇 살이고?”
“팔십 살 아이가. 구십 살인데.”
“엄마! 내가 누고?”라고 물으면 대답 대신 큰 소리로 웃으신다. 세상일 다 잊어도 어찌 당신이 낳고 키운 자식을 잊을 수 있을까. 나는 할 말을 잃었고 차마 눈물조차 흘릴 수 없었다. 자꾸 희미해지는 정신을 강하게 붙들려고 하나 흩어지고 마는 세월 앞에 허탈한 웃음만 맴돌았다.
엄마는 평생 호미질로 드나들었던 밭에 얼마나 가보고 싶었을까. 위험해서 안 된다고만 하는 자식들 몰래 유모차에 의탁해 혼자 나섰다고 했다. 땅이 반질반질해질 만큼 자주 다녔던 길은 중장비가 갈아엎어 밭 언저리까지도 못 갔다며 아쉬워했다. 딸이 할 수 있는 건 엄마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다.
모녀는 길을 나섰다. 오랜 친구를 만나듯 들뜬 마음은 어느새 저만큼 앞서갔다. 엄마의 발길이 머문 곳은 어느새 묵정밭이 되어 있었다. 잡초와 망초꽃이 엄마를 반기고 있었다. 너른 밭에 무리 지어 핀 꽃을 보며 엄마의 거친 삶이 구름같이 덧없다는 생각을 했다.
“우찌하것노”를 반복하시며 밭을 둘러보셨다. 손수 심은 머윗대는 웃자랐고 부추는 풀 속에서 겨우 생명만 유지하고 있었다. 엄마는 부추를 벤 후 호미질을 해두고 돌아섰다. 언제 만날지도 모를 엄마에게 망초꽃이 잘 가라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잠시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엄마는 망연자실했다.
엄마는 어느새 요양원에 가지 않아도 될 만큼 점차 회복되어갔다. 손수 자갈 나르고 기와 얹어 지은 집에서 살 수 있게 되었다. 엄마가 사는 집은 사철 갖가지 꽃이 피어 엄마의 친구가 되어 주는 곳이다. 평일은 요양보호사가 엄마 곁에서 도움을 주신다. 우리는 엄마에게 마지막 효도를 주말에 집에서 하기로 약속했다. 먼저 간 오빠가 하늘나라에서 밤낮 지켜봐 줄 것이다.
엄마의 모든 것이 우리를 이만큼 키웠다. 엄마의 등 굽은 허리가 말해주듯 당신 삶의 전부가 자식이었다. 엄마가 그랬듯이 사시는 동안 살갑게 대하며 못다 한 효도를 할 참이다. 고작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엄마 몸을 씻어드리고 주절거리는 말에도 장단을 맞추어주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 가슴에 묻어 둔 응어리가 눈 녹듯 사라지길 바랄 뿐 더 원하는 것은 없다.
엄마의 평생 삶은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이 없었다. 큰일 치를 때마다 손수 술 담그고 시루떡 안치기는 눈대중으로도 가능했으나 야물었던 손맛은 필요 없는 세상이 되었다. 청춘을 함께 한 이들도 거의 세상을 떠났다. 엄마도 이제 더 이상 삭풍을 맞을 필요가 없다.
엄마 얼굴에 저승꽃이 번지고 있다. 엄마는 여생을 조금이나마 순풍에 맡겼으면 좋겠다. 우리 육 남매가 고달팠던 엄마의 마음에 순풍이 되어 어루만져 주고 싶다.
엄마가 드실 간식을 챙겨 운전대를 잡는다. 사립문으로 들어서는 자식을 보며 환히 반겨 줄 엄마를 생각하며 천천히 차를 몬다. 슬프고도 아름다운 그곳은 어릴 적 추억이 있는 내 고향이다. 평생 노동을 해 오신 엄마가 계시는 마음의 안식처다. 내가 엄마가 되어도 엄마가 있어 좋다. 내 엄마여서 고맙습니다. 엄마 사랑해요.
 
2023년 9월 17일
엄마의 구십 살 생신을 맞아
셋째 딸 박미영 적음
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입력 : 2023년 12월 22일
- Copyrights ⓒ고성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트위터페이스북밴드카카오스토리네이버블로그
이름 비밀번호
개인정보 유출, 권리침해, 욕설 및 특정지역 정치적 견해를 비하하는 내용을 게시할 경우 이용약관 및 관련 법률에 의해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포토뉴스
가장 많이 본 뉴스
만평
상호: 고성신문 / 주소: [52943]경남 고성군 고성읍 성내로123-12 JB빌딩 3층 / 사업자등록증 : 612-81-34689 / 발행인 : 백찬문 / 편집인 : 황수경
mail: gosnews@hanmail.net / Tel: 055-674-8377 / Fax : 055-674-8376 / 정기간행물 등록번호 : 경남, 다01163 / 등록일 : 1997. 11. 10
Copyright ⓒ 고성신문 All Rights Reserved. 본지는 신문 윤리강령 및 그 실요강을 준함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백찬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