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겨찾기+ 2025-07-05 08:08:56
회원가입기사쓰기전체기사보기원격
뉴스 > 라이프

세계적인 암 연구학자 이호윤 박사 나의 뿌리는 대한민국, 경남 고성군 마암면입니다

1946년 마암면 두호리 출생
가난 탓에 정규 중학교도 못갔던 소년
건국대 축산과 졸업 후 캐나다행
양계육종농장 책임자에서 암 전문 학자
서드베리지역 한인회장, 한인상도 수상

최민화 기자 / 입력 : 2023년 07월 28일
ⓒ 고성신문
ⓒ 이호윤 박사

가난해서 정규 중학교도 못갔던 소년을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인 포항공대는 ‘한국을 빛낸 과학자’로 선정했다. 이역만리 캐나다 온타리오주에 거주하는 세계적인 암 연구학자, 이호윤 박사는 고성을 넘어 한국을 빛내고 있다.

# 가난 때문에 공부할 수 없던 시절
광복 이듬해에 태어난 작은 아들은 유난히 똘똘했다. 하지만 아들을 중학교에 보낼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집이었다. 아무리 일해도 팍팍한 살림살이는 도통 숨통이 틔질 않았다.
삼락국민학교를 졸업한 아들은 마암면 두호리에서 20리를 걸어 고성읍에 있는 공민학교를 오가며 공부했다. 학력이 인정되지 않는 곳이었지만 공부할 수 있으니 감사했다.
검정고시를 치른 소년은 고성농업고등학교에 입학했지만 학비는 납덩이처럼 묵직한 부담이었다. 학교를 그만두지 않을 거라면 장학금을 받는 수밖에 없었다. 소년은 3년 내내 장학금을 놓치지 않았다.
대학입시가 목전이었다. 들리는 소문에 건국대학교 축산과는 학교에서 4년동안 등록금과 숙식비용을 받을 수 있는 장학제도가 있다고 했다. 곰곰 생각해보니 축산을 공부하면 그야말로 ‘국가와 사회에 이바지하는 인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먹고 사는 데도 지장이 없을 터었다. 다만 살기 힘든 시절이라 전국의 수재들이 다들 이 장학제도를 노리고 지원해 경쟁자가 상상초월이었다. 또다시 이를 악물고 공부했다. 그리고 당당하게 합격했다.

# 인생의 전환점, 캐나다행
이호윤 박사가 대학 시절을 보낸 60년대는 서울이든 고성이든 살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였다. 생활비 몇 푼도 집에 손을 벌릴 수 없었다. 청년 이호윤은 학군장교(ROTC) 7기였다. 1969년 졸업과 동시에 장교로 임관한 그는 군 전역 후 병아리 부화 육종회사인 천호의 부화장에서 책임자로 근무하게 됐다.
전공을 살려 일하는 것이 즐거웠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바랐던 학자의 꿈을 버릴 수가 없었다. 해외에서 더 넓은 세상을 보고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싶었다. 그러던 중 캐나다의 양계육종회사에서 그를 초청했다. 절호의 기회였다. 그리고 그의 인생에 있어 가장 큰 전환점이었다.
출국을 목전에 두고 고성 출신의 후배를 반려자로 맞았다.
캐나다는 미지의 세계였다. 이름조차 생소하던 시절이다. 1974년 5월, 토론토 국제공항에 도착한 부부에게는 달랑 미화 100달러가 전부였다.

# 학자를 꿈꾸던 청년 이호윤
캐나다의 양계육종농장에서 4년간 근무했다.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을 정도로 생활은 안정됐다. 하지만 학자가 되고 싶은 꿈은 여전히 꿈으로 남아 있었다.
포기할 수 없었다. 아내와 상의 끝에 농장을 퇴사하고 편의점을 시작했다. 낮에는 아내가, 밤에는 낮동안 공부하고 돌아온 이호윤 박사가 가게를 맡았다.
그는 맥매스터대학교 학장을 찾아갔다. 공부를 하겠다고 했다. 당돌한 동양 청년에게 학교애서는 B학점을 받아오라 했다. 패기 넘치던 청년 이호윤은 “원하는 학점을 받지 못하면 실험실에서 실험만 하겠다”고 선언하고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하지만 결과는 아쉽게 원하는 학점에 이르지 못했다. 실험실행이었다.
하지만 대학에서는 그의 노력을 높이 샀다. 추천서를 써주겠다고 했다. 맥매스터대학의 추천서로 구엘프대학으로 향했다.

# 드디어 이룬 학자의 꿈
포기하지 않으면 어떻게든 길은 열린다. 학자가 되겠다는 청년 이호윤의 꿈은 마침내 코앞까지 다가왔다. 구엘프대학에서 분자생물학을 전공하게 됐다.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일하는 생활의 연속이었지만 하고 싶은 공부를 한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즐거웠다.
1988년 드디어 석사 학위를 받았고, 4년 후에는 같은 대학에서 분자 바이러스학 박사 학위까지 취득했다. 그리고 3년 후에는 미국 버지니아대학 의과대학에서 박사후과정까지 마치고 같은 대학의 방사선종양학과 조교수로 임용됐다. 1974년 처음 캐나다에 왔던 이민자 청년은 결국 꿈을 현실로 만들어내고야 말았다.
그는 방사선연구협회의 젊은 과학자상을 받았다. 이듬해에는 캐나다 온타리오주의 암 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하는 동시에 오타와대학교 의과대학의 조교수로 임명됐다. 그리고 온타리오주의 수상으로부터 최우수 연구 과학자상을 받으면서 15만 달러(약 2억 원)의 연구비를 상금으로 거머쥐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나 이호윤 박사는 온타리오주 헬스 사이언스 노스 연구소의 선임연구원이자 온타리오 동북부 암 치료약 개발 책임자를 맡았다. 이 시기 포항공대에서 ‘한국을 빛낸 과학자’로 등재됐다.
2009년 그는 오타와대학교 의과대학의 정교수로 임용됐다. 북미지역을 통틀어 한국 출신 교수가 1천 명쯤 되는데 이 중 정교수는 100명 남짓하니 대단한 일이었다.

# 세계적인 암 전문가이자 성공한 한인
암에 있어서는 세계 몇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저명인사가 됐다. 과학자이자 교육자로 100여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 중에서 500회 이상 인용된 논문도 두 편이다. 암 치료 소염제를 개발해 특허등록했고, 제약회사도 공동설립했다. 학자로서 70여 명의 석·박사와 교수들을 양성해냈다.
2015년에는 암세포만 선별적으로 제거하는 새로운 항암물질 VR23을 개발했다. 독성과 부작용 확률도 낮은 데다 항암물질 투여 시 저항하는 암세포까지 제거할 수 있는 물질이다. 20년동안 암치료제 개발에 매달린 끝에 나온 혁신적인 연구성과였다.
자리를 잡고 보니 유학 초기, 어려웠던 시절에 여기저기서 도움받았던 것이 떠올랐다. 도움에 보답하고 싶었다. 연구기금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연구기금으로 저개발국가에서 온, 힘든 환경에서도 열심히 공부하는 유학생 수십 명에게 돈 걱정 없이 공부할 수 있도록 전액 장학금을 지원했다.
이호윤 박사는 온타리오주 서드베리 지역의 한인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뿌리가 한국인임을 잊지 않았다. 한글과 한국문화를 알리기 위해 한글학교를 설립해 20여 년간 운영했던 그는 온타리오 북부지역에 거주하는 한국전쟁 참전용사들과 가족들을 초대해 바비큐를 나누며 그들을 위로하고 감사하는 자리를 15년간 마련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 백발이 성성한 참전용사들은 눈물을 보이기도 했고 오래 전 한국전쟁 당시를 떠올리며 한국의 발전상에 놀라워하기도 했다.
이런 발자취 덕분에 2016년에는 캐나다한인상 문화부문 수상, 2017년에는 대한민국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았다.

# 꼭 만나고 싶은 박순금 선생님
70대 후반인 이호윤 박사는 이제 대학 강단에서는 은퇴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는 현역이다. 명예 선임과학자이자 명예교수로 후진을 양성하고, 아직도 암 연구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이호윤 박사의 딸 이양하 임상심리학박사는 온타리오주 경찰이 신설한 경찰정신건강관리부서의 총책임자로 임명되기도 했다. 이양하 박사는 토론토대학을 졸업하고 런던 웨스턴대학에서 임상심리학 박사 학위를 받은 후 토론토 정신건강센터에서 수 년간 학자로 일하다 상담클리닉을 개원했다.
자신의 삶도 자녀 교육도 사회생활도 무엇 하나 소홀하지 않았다. 정말이지 어디서도 누구에게도 “나는 열심히 살았다”라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 삶이었다. 나이가 들고 보니 옛생각이 슬금슬금 피어오르기도 한다.
“찢어지게 가난하던 초등학교 시절, 학문에 대한 가능성과 즐거움을 알려주신 은사님이 계십니다. 1~2학년 담임이었던 박순금 선생님은 가난한 소년에게도 대학에 가서 공부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셨어요. 선생님 덕분에 제가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의 은사 박순금 선생님이 삼락초등학교에 근무한 것은 한국전쟁 직후 그가 입학했던 1953~1955년 경이다. 살아 계시다면 적어도 90대 초중반이겠지만 요즘 의학기술이 좀 좋은가. 그래서 이호윤 박사는 은사님을 찾고 싶다고, 그래서 꼭 감사했다고 말하고 싶다 한다. 어린 소년의 마음 속에 미래에 대한 씨앗을 심어주어 감사하다고, 덕분에 지금껏 열심히 공부하고 살아냈다고.
“고향 고성에 있었던 시절이 까마득합니다. 어린 시절 고성에서 보낸 추억이 있기에 고향을 떠올리면 가슴 한 켠이 따뜻해져 옵니다. 그리고 언제나 힘이 됩니다. 비록 멀리 있지만 마음은 늘 고향 어디쯤 머물러 있는 듯합니다. 지면으로나마 고향에 저의 소식을 전할 수 있어 참으로 반갑고 행복합니다. 언젠가 고향 고성을 찾게 되기를 바랍니다.”
* 박순금 선생님이나 박 선생님을 아는 분은 고성신문(055-674-8377 최민화 기자) 또는 이호윤 박사(beallee48@gmail.com)에게로 연락주십시오.
최민화 기자 / 입력 : 2023년 07월 28일
- Copyrights ⓒ고성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트위터페이스북밴드카카오스토리네이버블로그
이름 비밀번호
개인정보 유출, 권리침해, 욕설 및 특정지역 정치적 견해를 비하하는 내용을 게시할 경우 이용약관 및 관련 법률에 의해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포토뉴스
가장 많이 본 뉴스
만평
상호: 고성신문 / 주소: [52943]경남 고성군 고성읍 성내로123-12 JB빌딩 3층 / 사업자등록증 : 612-81-34689 / 발행인 : 백찬문 / 편집인 : 황수경
mail: gosnews@hanmail.net / Tel: 055-674-8377 / Fax : 055-674-8376 / 정기간행물 등록번호 : 경남, 다01163 / 등록일 : 1997. 11. 10
Copyright ⓒ 고성신문 All Rights Reserved. 본지는 신문 윤리강령 및 그 실요강을 준함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백찬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