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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성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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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불교계 독립운동의 중심이었던 백초월 스님을 기리는 다례재가 열렸다. 옥천사(주지 마가 스님)는 지난 29일 백초월 스님의 순국 79주기 기일을 맞 영오면 성곡리 금산마을에서 추모 다례재를 봉행했다. 이날 다례재에는 스님의 증손자 백외식 씨를 비롯해 이상근 군수, 최을석 고성군의회 의장과 군의원, 허동원 도의원, 정영환 옥천사 신도회장, 이동희 경남서부보훈지청장과 문화단체장, 지역민 등 1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백초월 스님 행장 소개, 추모사, 봉행사, 추도사 순으로 진행됐다. 마가 스님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불교계 독립운동의 중심에 서서 일제에 항거한 백초월 스님은 고성의 자랑스러운 역사이자 근대사 복원의 시작이며 옥천사와 고성이 독립운동의 중심지였다는 것을 보여준다”면서 “오늘 이 다례재가 고성군민에게 자긍심과 자부심을 전하고, 백초월 스님의 높은 정신을 기리며 편안한 안식을 비는 자리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상근 군수는 추모사를 통해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신 독립운동가 백초월 스님은 고성군 영오면 금산마을에서 태어난, 우리 고성의 자랑스러운 영웅이다”며 “오늘 79주기 추모 다례재를 통해 스님의 의로운 삶과 숭고한 정신을 깊이 새겨 우리 고성이 번영으로 나아가는 계기를 되기를 소망한다”고 전했다. 1878년 영오면 성곡리에서 태어난 백초월 스님은 14살에 지리산 영원사로 출가했다. 만해 한용운 스님이 백초월 스님을 민족대표 33인에 포함시키려 했다는 증언이 있는 것으로 볼 때 1919년 이전 이미 스님은 불교계 독립운동을 이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백초월 스님은 3.1독립운동 1주년을 기념해 일본에서 만세운동을 추진하다가 일제에 피체된 후 풀려났다. 이후 스님은 미치광이 노릇을 하며 일제의 눈을 피해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1939년에는 일제의 군용열차에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사건으로 다시 피체, 1943년에는 독립운동 자금 모금으로 다시 투옥된 후 1944년 옥중에서 순국했다. 2009년 5월 서울시 은평구 진관사의 칠성각 보수공사 중 독립운동 당시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태극기와 1919년 6월에서 12월 사이 발행된 독립신문, 각 사찰에서 군자금을 모금해 상해 임시정부와 만주 독립군에 보낸 독립자금 관련 서류들이 발견됐다. 특히 진관사 태극기는 일장기의 붉은 원을 도려내 흰 광목천에 덧붙여 박음질한 후 다시 푸른 염료로 물들여 태극을 만들어 항일과 극일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한편 옥천사는 백초월 스님이 수시로 왕래하며 독립자금을 모으고 후학을 양성하며 젊은 스님들에게 항일 의지를 심어주던 곳이다. 옥천사는 백초월 스님 외에도 신화수, 한봉진 등 불교계 독립운동가들의 은거지이자 불교계 항일운동의 중심지였다. 이에 옥천사는 백초월 스님을 비롯해 백석기·이청담·박문성·박민오·이종천·신화수·우태선·한봉진·변상태 등 옥천사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펼친 인물들의 선양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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