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의용.여성소방대 연합회에서 전남 고흥군과 소록도 일원으로 고흥의용소방대의 협조 하에 선진지 견학을 다녀왔다.
말로만 듣던 소록도를 처음 가 보았다.
고흥군 문화관광 해설사의 설명을 들어 가며 녹동항에서 배 타고 5분만에 도착한 섬은 여의도의 1.5배 크기였다.
소록도-작은 사슴의 섬, 이름 그대로 정갈하고 깨끗했으며 아름다웠다.
한폭의 맑은 수채화 처럼 공기조차 무어라 표현하면 좋을까 싶게 달큰 하였고 잘 다듬어진 정원수와 종이 하나 굴러 다니지 않는 길과 말소리조차 나직하게 만드는 고요함, 이것은 곳곳에 묻혀 있는 슬픈 너무 슬퍼 목이 메이는 이야기를 듣기 전의 풍경이었다.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섬 안으로 들어 갈수록 놀라움과 연민, 부끄러운 심정에 숙연해졌다.
수탄장-눈물과 탄식이 흐르던 장소 한센병(나병) 환자인 부모들과 미감아인 자식들이 섬의 양편에 나뉘어 살다가 한달에 한번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양쪽 5미터씩 떨어져서 눈으로 만나던 장소이다.
아이들은 바람을 등지고 부모들은 바람을 맞으며 혹시라도 바람에 균들이 옮을까봐 가슴 조이며 너희들은 병에 걸리지 말고 건강하게 살아라 하는 부모들의 애타는 심정과 병에 걸린 부모일망정 엄마 치마폭에 안기어서 따뜻한 젖가슴 한번 만지고픈 어린 자식들이 그리움의 눈물과 안타까움의 탄식이 흐르던 곳이다.
감금실과 검시실- 일제 시대에 법정전염병인 환자를 격리 수용하며 생긴 섬 안에서 자행된 일본인들의 탄압과 학대가 잘 보이는 곳이었다.
불모의 섬을 수용소로 조성하면서 강제 노역과 인간 이하의 학대를 하던 곳이다. 말을 듣지 않던가 꼬투리가 잡히면 감금실에(형무소보다 더 못한 시설) 가두어 놓고 갖은 벌을 주다가 풀어 줄 때는 어김 없이 단종수술(정관수술)을 해서 내보내던 곳이었다 .
아직도 남아 있는 수술대 위의 팔다리, 복부를 누르던 나무막대기들은 열악하고 끔찍했던 수술장면이 떠오르게 했다.
환자들의 기도 중에 빠지지 않고 하던 것 중 한가지는 휴일에 죽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휴일에는 의사들이 쉬느라 검시를 안했단다.
검사실에 가보니 그 기도가 절로 나올 것 같았다 병을 연구한다는 명목 하에 죽은 자는 해부대위에 올려져 낱낱이 파 혀쳐져서 장기들과 목, 태아들이 포르말린액에 담긴채 진열장에 전시 되어지고 나머지는 섬 자체에 있던 화장장에서 태워졌다.
물론 육지에 있던 가족들은 보지도 못한다. 아직도 남아 있는 해부대 상판에 피가 흐르도록 패여진 곳과 그것을 모으는 장치와 꼭지들과 천장에서 늘어뜨려진 백열전등의 전선들은 슬프다 못해 가슴이 옥죄어 오게 아팠다.
생활자료관-여러가지 사진들과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던 곳으로 그분들의 형편에 맞게 고쳐져 사용된 생활도구들이 인상적이었다.
더욱 감동인 것은 그곳에 전문안내를 하시는 60세는 넘어 보이시는 여성분이었다.
한센병에 걸리어서 변형된 손으로 일일이 짚어가며 열정적으로 한가지라도 더 알려 주시려는 모습은 경건해 보이고 아름답기조차 하였다 .
이외에도 곳곳이 보고 느낄 곳 이었다.
되돌아 나오면서 내 자신을 돌아 본다.
내가 가진 많은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가지려고 바둥거리는 시간들이 부끄러워지며 살아 있다는 한가지를 위하여 처절하게 살아가신 그 분들께 고개를 못 들겠다.
어떤 이들은 삶의 생기를 느끼려면 새벽시장에 나가 보라고 한다.
삶에 권태를 느끼거나 제어할 수 없는 욕심에 마음이 휘청 되면 소록도에 가보라.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겸손한 마음으로 주어진 삶의 시간을 온몸으로 살아내신 분들이 그곳에 있다.
아주 가까운 곳에 소록도는 있었다.
내가 타인의 삶에 무관심과 끊임 없는 탐욕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그곳에 늘 있었다.
차창 밖의 고흥의 들녘은 파릇한 마늘들로 뒤덮여 있었고 따뜻한 봄볕에 아지랑이가 오르는 듯 눈물이 고여서 그래서 아름다운 섬, 소록도에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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