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신 아부지, 어무이께 제 살아온 지난 날을 편지로 써 봅미더. 책 한 권을 쓴다캐도 못다한 이야기, 그 나머지는 우짜꼬예?
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 입력 : 2023년 03월 0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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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부지, 얼굴도 모리는 아부지이신데 가만히 불러보모 금방이라도 대답해 주실 것 같심미더. 제가 다섯 살 때 돌아가셨으니 저는 아부지 얼굴도 몰라예. 그래도 제 맘 속에는 늘 아부지가 다듬돌처럼, 지게 작대기처럼 자리를 지키고 계심미더. 음력 오월 초하루를 제가 우찌 잊을낌미꺼? 날은 따뜻해 오고, 모내기 한다꼬 억수로 바쁜 철이지만 아부지 제사는 꼭닥시리 뫼실라꼬 옴마가 엥가이 챙기싯다 아임미꺼. 텃밭에 매실나무 두 그루캉 돌복숭아는 신내를 풍김서 익어가고, 무논에 개구리는 밤이 되모 더 울어제끼더마는 짜들시리 올챙이를 까고, 모판에는 모들이 포리리 떨디끼 커갔지예. 에북 자란 쑥을 낫으로 쓱싹쓱싹 베어서 간초롬하게 개리고, 나머지는 소죽솥에 넣으모 향이 억수로 좋았어예. 쑥떡은 제상에 올리는 기 아이라캐도 우짜다가 떡방앗간에 가는김에 세삔으로 눌러 뺀 납딱한 쑥떡을 제사 챙기러 오는 친척들과 농갈라 무모 맛이 참 좋았심미더. 아부지 제사때는 날이 따뜻하고 철이 좋았지예. 보리 타작도 했고 밀타작도 해서 국시도 항그석 뽑아놓으모, 가을까지 때꺼리 걱정은 안해도 되었심미더.
어무이. 아부지 돌아가싰을 때 옴마가 제우(겨우) 마흔 넘었던가베예. 생각하모 억장이 무너짐미더. 요새 나이로 치모 새파란 새댁 아임미꺼예. 그 나이에 아가 다섯 딸린 과부가 되어 을매나 고생을 했을지 안 봐도 훠~언 하네예. 같은 여자로서 어무이 한 많았을 그 인생이 서럽고 눈물겹습미더. 그래도 오빠가 계셔서 집안의 대를 이었고, 언니 셋은 이리저리 살림을 도왔고 농사일도 거들었으니, 덕분에 막내이로 태어난 지는 대흥초등학교를 마칫심미더. 제가 책보따리를 허리춤에 매고 마당에 서서 “핵조 다녀오긋심미더” 하고 인사를 드리면, 둘째 언니가 흉을 보더라꼬예. “니는 학생이 되갖꼬 핵조가 뭐꼬? 학교라 캐야지. 잘 다녀오겠습니다. 이래야지.” 그런 말 함시로 함박꽃맨치로 웃던 언니들이 떠오르네예. 밤이 되면 웃목에서 질쌈하던 모습이 눈에 훤함미더. 가늘게 찢은 삼껍질을 오른쪽 허벅지에 대고 비빈다꼬 이야들 물팍(무릎)은 버얼겋게 달아 올랐고, 졸린 눈을 비비며 베틀을 철컥철컥 돌리던 소리도 엊그제맨치로 들리네예. 제가 막내이라꼬 언니들이 예뻐해 주싯지예. 세 분 언니는 아직 살아계시는데 부산과 거류면에서 지내시고, 큰언니는 저하고 같은 마암면에 삼미더. 올해 구순이 되셨는데 을매나 짱짱하신지, 저랑은 자주 만나기도 하고 통화도 수시로 하는데 우짤때는 큰언니가 옴마 같기도 함미더. 제가 시집 오고 두어 해 지나서 어무이가 돌아가싯다 아임미꺼예. 참 서분해서 마이 울었심미더. 자식들도 점차 살림이 일어나서 아랫목이 따땃해지고, 어무이께 용돈도 에북 찔러 드릴 수 있었는데 좀더 복록을 누리시지, 뭣이 급해서 그리 빨리 시상(세상)을 떠나셨는지예? 아부지 보고지버서 환갑 겨우 넘기고는 훨훨 떠나셨는가예?
아부지. 옴마 제우(제사)는 시월 초아흐레 임미더. 가을이 에북 깊어가고 단풍이 들 때쯤 임미더. 가을걷이 끝내고 곳간에는 나락 푸대가 켜켜로 쌓이고, 서숙(조)이며 수수며, 참깨며 고매를 거둔 뒤라서 물(먹을)게 만장 겉었심미더.
아부지 제우 때는 농번기가 닥쳐서 더러 빼묵고 못갔을 때도 있었지마는 어무이 제우는 안 빼묵고 꼭 챙깄심미더. 시부모님도 제가 친정 간다쿠모 있는 거 없는 거 바리바리 싸 주시데예. 이서방캉 둘이서 이고지고 오빠네 가서 친정붙이(식구)들 만내모 억수로 반갑고 좋았어예. 오빠와 올케가 웡캉(원래) 부지런코 살림을 단디 살아서 더 그랬심미더. 열심히 살아온 뒤끝은 있더란 말이 오빠네를 두고 하는 말인가 싶어서 맘이 흡족했심미더. 두 분 제우를 합치고 저는 마이 울었심미더. 아부지캉 옴마는 그 먼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나서 좋던가예? 일찍 떠나신 아부지 얼굴은 청년으로 남아 있었을끼고, 옴마는 할망구가 되었어도 생전의 인연으로 단박에 알아보싰는가예? 두 분이 손잡고 오월 초하루 제삿밥 드시러 오싰을 때 자식들 늙어가는 것도 보시고, 손주들 자라는 것도 보싰으이 맘이 흡족하싯지예?
아부지,. 제가 스무한 살 되던 해, 마암면 신리에 살던 여주이씨 가문 장남한테 시집 와서 시부모님 봉양 잘 했고 2남 2녀를 낳아 잘 키았어예. 일도 억수로 했고, 살림도 에북 일궜어예. 시아부지 86세에, 시모님은 82세에 돌아가실 때까지 제가 잘 모시고 편키 보내드렸다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네예. 시어른께 사랑받고 치사 받으며 살았다는 고백을 꼭 하고 지버예. 두 분은 밖에 나가시모 메느리 치사(칭찬)를 그리 하셨다카데예. “우리 메누리는 참 부지런코 매짜(야무지다)서 버릴게 한 개도 없는 사람이오. 우리가 뭔 복이 많아서 저런 메누리를 맞았는지 모리긋소.” 이런 말씀을 자주 하셨다꼬, 장산에 사는 큰언니가 자랑을 하더라꼬예. 이런 소리 들을때마다 저는 뒤돌아서서 울었심미더. 아부지 얼굴도 모르고 자랐기에, 본데없이 컸다고 숭(흉) 잡힐까봐서 옴마가 엄하게 키았거든예. 예의범절도 잘 갈찼고, 의복이며 음식이며 넘(남)한테 안 빠지게 입히고 멕일라꼬 애쓰신거 제가 다 알거든예. 그리 키알라꼬 어무이가 을매나 욕을 봤긋심미꺼. 혼자 몸으로 자슥 다섯을 키아고 시집 장개 보내는거 아무나 하는 일이 아이지예. 우리 어무이 겉은 사람이나 하긋지예. 우리 어무이가 참 대단한 여성이라꼬 생각함미더.
어무이. 제가 시집 온께네, 초가 삼칸에 시부모님캉 시누와 시동생이 항꾸네 살았어예. 첫아(큰딸)를 낳고 이서방이 군대에 갓심미더. 제대하고는 이불보따리를 싸들고 부산으로 가자카데예. 지는 뭣도 모리고 이서방 따라 갔더마는 쌀집에 취직을 하데예. 배달도 하고 경리도 봄서 한 달이 지나모 월급을 갖다 주더라꼬예. 자식 키암서 이서방 조석 챙기는 것만 항께네 수월하더라꼬예. 그래도 명색이 장남인데 시부모님을 안 뫼시는 기 말이 되던가예? 제가 이서방을 쫄라 봇짐을 싸서 다시 마암면 신리로 돌아왔심미더. 그 때부터 허리를 쫄라매고 억수로 일을 했심미더. 이서방이 우떤 사람임미꺼. 을매나을매나 부지런코 뚝심있고 차돌겉이 단단한 사람입디꺼? 나름대로 용기있고 남에게 뒤지지 않는 사람이라서 정부 보조를 좀 받고 큰 농기계를 샀어예. 그거를 끌고 온 동네 논이며 밭을 갈아주고, 벼도 베고 품삯 받는 일을 마이도 했어예. 저도 뒤따라 다니며 논일도 거들고 뒷손 가는 일도 처리하고 쿵짝이 잘 맞는 부부였지예.
어무이. 시집 와서 배운 거 중에 안즉도 손맛을 안 잊은게 술담는깁미더. 시아버님도 즐기셨고, 이서방도 막걸리를 참 좋아했으니, 제가 수십 년 술을 담갔어예. 예전에는 밀을 뽀사고 누룩을 밟았고 고두밥을 쪄서 담아야 했지예. 암만 바빠도 날을 잡아서 그 일을 제대로 할라꼬 맘을 묵었심미더. 여름에는 사나흘이면 되었지만 겨울에는 일주일 넘게 술독을 간수해야 제대로 술이 익데예. 초창기에는 동동주를 뜨고, 난중에는 막걸리를 체에 걸렀어예. 따따무리한 아랫목에 뽀끌뽀끌, 톡탁톡탁, 핑 피웅, 술 익는 소리가 참 정겹십디더. 시큼털털하면서도 달달한 내음이 온 집안에 가득차면, 그것이 사람 사는 냄새같십디더. 하루종일 논일에 밭일에 지친 이서방이 갈증이 나서 집에 들어섰을 때, 한 사발 걸러주는 막걸리를 목울대에 넘기는 모습을 보믄, 제가 마시는 것보다 더 좋았심미더. 아들이 이캅디더. “우리 옴마는 주모여, 아부지한테만 날마다 공짜 술, 최고로 맛있는 술을 담궈 주는 억수로 맘씨 좋은 규수주막 이삔 아짐씨여!” 그런 날 해거름녘의 노을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아시지예? 하긴, 어무이는 아부지한테 그런 이삔 짓 해 보기는 하셨을라꼬예? 넘들처럼 검은머리 파뿌리 되도록 함께 살지 못한 어무이께 이런 말씀이 가당키나 할랑가예?
아부지. 막내 점련이는 시집와서 할 짓 다했어예. 인자(이제)는 후회도 미련도 없심미더. 맏이 노릇도 잘 했고, 시부모님 돌아가실 때까지 삼시 세끼 따신 밥 해 드림서 모싯고, 시동생 시누이 혼인시켰고, 아들 둘, 딸 둘도 건강히 잘 키워서 혼인까지 시킸심미더. 제각기 둘씩 자식을 낳았으니 손주도 여덟이나 됨미더. 제 새끼들 키울때는 힘이 좀 들긴 했심미더예. 새벽밥 지어 도시락 몇 개씩 싸고나면 허리가 휘청거려도 맘이 흡족했심미더. 자슥들 입에 밥 들어가는거 하고 마른 논에 물들어가는 것보담 더 신나는 일이 어딧을라꼬예? 제 자슥 넷은 모두 가까운 고등학교에 댕깃심미더. 자전거를 타기도 하고, 걸어댕기기도 했지만서두 교복 입은 아아들이 가로수 지나 마을 입구로 들어오는거 보기만 해도 길이 훠~언했다 아임미꺼예. 세상에 자슥꽃보다 이삔 꽃이 오데 있을라꼬예. 아부지는 그 이삔 꽃들 지긋이, 오래토록 몬 보고 돌아가싰으니 얼마나 서분했으꼬예.
어무이, 지는예. 행복한 인생을 살았다꼬 자부함미더. 제가 젤 잘 한 기, 마암면 신리 출신 이서방 만나서 시부모님 잘 뫼셨고, 제 자슥 넷 낳아서 모두 잘 기른깁미더. 제 자슥 자랑해 봐야 팔불출 소리 들을끼지만 그래도 에미 눈에는 제 새끼가 최고로 보인다 아이던가예? 초등학교 교사인 큰 딸과, 포항제철에 댕기는 큰아들캉, 에코프로라는 회사의 임원인 둘째 아들도 자랑시럽지만서두 저는 둘째 딸 자랑은 꼭 하고지버예. 둘째는 이우지(이웃) 배둔에 삼미더. 옌말에도 안 있던가예? 먼데 있는 친척보다 이웃 사촌이 낫다꼬예. 그란데 이웃에 사는 딸은 을매나 꼭닥시러블라꼬예. 수시로 음식도 맹글어 오고, 병원도 델고 가고, 목욕탕이며 미장원이며 챙기는기 연세(부드러운 태도와 모습) 같아예. 사우(사위)도 을매나 정깊고 착하고 순한지, 제가 업어주고 싶어예. 그래도 장모된 입장에서 그런 말을 우찌 하끼든가예? 우짜든지 이웃에 사는 둘째 딸이 요래조래 신경을 마이 쓰고 자주 들다보고, 어메한테 뭣이 필요한지 잘 챙기삿네예. 그래서 마을 회관에서 날마다 만내는 친구들이 불버(부러워) 합미더. 우스개 소리로, 딸 없는 어멈은 오데서 남의 딸이라도 한 명 주워오고 싶다 캐샇네예.
아부지, 제가 삼 년 전에 발을 헛디뎌 구불어졌는데, 그 길로 몇 달을 병원에 입원했다 아임미꺼예. 평생 쉬지 않고 살다가 병원 침대에 드러누버 있으니 심심코 여러버서(거북해서) 입에 침이 마르더라꼬예. 그 때부터 휴대폰으로 세상 공부를 마이 했네예. 우문현답, 사노라면, 알쓸신잡…배울 게 많더라꼬예. 책을 읽고 글을 쓰야지만 공부하는기 아이고, 텔레비전 프로에도, 유튜브에도 보고 들을 끼 얼마나 많던지예. 새 세상을 봤심미더예. 그래서 좋은 내용이 나오모 칭구들캉 이우지 아는 사람들한테 카톡으로 마이 보내줌미더.
‘혼자만 잘 살면 무슨 재민겨?’ 이런 책 제목처럼 저도 이웃들과 항꾸네 잘 살고지버예. 뒤돌아보이 제 인생도 바람처럼 휙, 지나가삣네예. 젊은 시절엔 하루가 질(길)고도 질더마는 팔십을 눈 앞에 보이 하루가 휘뜩, 화살처럼 지나감미더. 여한없이 살았노라 고백하고 지버예.
이서방은 아직도 농사일에 바쁨미더. 일 좀 고마하고 편키 살자꼬 암만 얘기해도 안 움직이모 몸이 더 아푸다카네예. 하긴, 건강하게 잘 꼼작이다가 어느 날 자는 잠결에 떠나모 그기 최고지예. 그래도 살아있는 날꺼정 웃으면서 재미있고 꼬솜하게 살아볼람미더. 오늘은 우째 자슥 넷이 모두 안부 전화를 했데예. 제발 일하지 말고, 약 잘 잡숫고, 하루에 한 시간씩 걷고, 잘 주무시고, 필요한거 있으모 말씀하시라 카네예. 할 말이 억수로 많거마는 오늘은 이만 줄일게예.
꽃샘바람이 살살 불어오는 마암면에서 막내이 점련 올림. |
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  입력 : 2023년 03월 0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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