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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에 빈대가 많아서


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입력 : 2022년 11월 04일
ⓒ 고성신문
‘빈대’는 이름만으로도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주는 벌레이다. 생긴 모습도 흉측스럽거니와 전염병을 옮기는 매개체 역할을 하다 보니 사람들에게 부정적 이
지가 강하다. 특히 먹잇감에 달라붙으면 여간해서 떨어지지 않는 특성 때문에 남에게 빌붙어 사는 사람을 빈대에 비유하기도 한다. 숙주에 은밀하게 숨어 있을 수 있게 진화한 납작하고 평편한 모습에 빗대어 ‘빈대코’, ‘빈대떡’ 같은 합성어가 나왔고,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운다’라는 속담도 생겼다.

하긴 빈대는 태생적 정체성부터가 긍정적이지 않다. 빈대는 수명장자로부터 몸을 물려받은 해충이다. 수명장자는 제주도 지역에서 전승되는 창세 신화 ‘천지왕본풀이’에 나오는 인물로, 자신의 힘을 믿고 온갖 악행을 저지르다가 소별왕에게 죽임을 당했다. 죽은 수명장자의 뼈와 살을 바람에 날려 보냈는데, 거기에서 태어난 벌레 중의 한 무리가 빈대이다. 그러다 보니 수명장자의 사악한 본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어 사람들에게 대접받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스님들과 사이가 좋지 않은데, 절의 존망에 빈대가 관련된 경우가 많기 때문으로 보인다.

오래전, 고성 영현면 영부 마을 백란골에 큰 절이 하나 있었다. 어느 날 스님이 아침 공양을 위해 부엌에 갔다가 솥 안에서 나는 달그락 소리를 들었다. 혹시 쥐라도 들어갔나 싶어 솥뚜껑을 열어 본 스님은 깜짝 놀랐다. 전날까지만 해도 분명히 빈 솥이었는데 쌀이 한가득 들어 있었다. 곳간이 빈 것을 알고 누군가 몰래 시주를 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스님은 쌀을 퍼내어 독에 옮겨 담았다. 그런데 모두 퍼내고 나니 한 솥 가득 다시 쌀이 차오르는 것이었다. 괴이하여 솥 안을 살펴보니 바닥에 조그만 구멍이 나 있고 그 속에서 쌀이 계속 나오고 있었다. 말 그대로 끝없이 재물이 나오는 화수분이었다.

이에 욕심이 생긴 스님은 쌀을 조금이라도 더 나오게 하려고 주걱으로 쌀이 나오는 구멍을 후벼 팠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갑자기 구멍에서 쌀 대신 빈대가 꾸역꾸역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 일이 있었던 얼마 후에 절에 이상한 질병이 나돌아 스님들이 죽거나 떠나면서 결국은 절은 폐허가 되고 말았다.
백란골의 절이 망한 것이 빈대 때문인지, 아니면 스님의 욕심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재미있는 것은 그와 유사한 사례가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다는 것이다. 고성에만 해도 대가면 양화리에 절터 흔적만 남아 있는 ‘법천사’와, 연화산 기슭에 있었다는 ‘통일사’가 빈대 때문에 폐사의 절차를 밟았다는 비슷한 전설을 남기고 있다.

폐사까지는 아니지만, 빈대와 관련하여 가장 널리 알려진 전설은 경기도 인천 강화도에 있는 전등사(傳燈寺)일 것이다. 불교가 우리나라에 처음 전래한 시기인 서기 381년 소수림왕 때 아도화상이 창건하여 약 1,600여 년을 이어온 고찰로, 불교 신도를 비롯하여 관광객이 많이 찾는 명소이다 보니 전설마저 극적이다.

전등사의 원래 이름은 ‘진종사’였으나, 고려 충렬왕의 비(妃) 정화궁주가 절에 대장경과 옥으로 만든 등을 시주하면서 ‘전등사’로 바뀌었다. 전등사는 ‘등불처럼 불법을 밝히는 사찰’이란 뜻이지만, 이름에 불 화(火)자가 들어 있는 탓인지 불행하게도 화재와 인연이 깊다. 조선 선조와 광해군 때 일어난 큰불로 두 번이나 불타버렸고, 1621년에 중창하여 본모습을 되찾았지만, 이후에도 원인 모를 크고 작은 화재가 연이어 일어났다. 그래서 그럴까? 전등사는 지금도 오후 9시가 넘으면 화재를 방지하기 위하여 경내의 모든 불을 끈다고 한다. 그런데 전등사 화재와 관련하여 전해오는 흥미로운 구전 설화가 남아 있다. 절에 빈대가 들끓어 사람들이 불을 질렀다는 것이다.

이처럼 절과 관련된 전설을 찾아보면 유독 빈대와 관련된 이야기가 많다. 한 마디로 ‘절에 빈대가 있으면 망한다’라는 것이다. 절과 빈대는 어떤 관계일까? 방역이 제대로 되지 않아 벌레가 들끓던 시절에는 민가를 비롯하여 사람 사는 곳이면 어디든 빈대가 있었을 텐데, 빈대 때문에 서원이나 교회를 불태웠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은 없다. 그런데도 유난스럽게 절에만 빈대 전설이 남아 있다. 그것도 전국 곳곳에 퍼져 있는 것을 보면 한 지역에 국한되지 않는 국가적인 원인이 있었음을 유추해 볼 수 있지만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다. 다만 유사한 전설이 조선시대 때 집중적으로 만들어진 것을 보면 ‘숭유억불’ 정책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고려말 불교의 폐해를 겪은 조선은 500년 내내 불교를 탄압하였다. 새로운 절을 짓지 못하게 하고, 승려의 도심 출입을 제한하기도 하였다. 일부 사대부들은 산천 유람을 할 때 스님들을 거마꾼으로 부리기도 하고, 심지어 절 안에서 고기와 술을 먹고 마시는 행패를 부리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스님들의 생활은 탁발 시주로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궁핍해졌다. 그런 과정에서 권력에 빌붙어 생계를 유지하는 스님도 일부 있었지만, 많은 스님이 절을 떠나게 되면서 폐사가 늘어나게 되었다. 탄압하는 세력을 노골적으로 지칭하지 못하고 대신 빈대 핑계를 댔던 것이다.

그런데 하고많은 벌레 중에 하필이면 빈대를 핑계 댔을까? 그것은 빈대의 특성과 관련이 있다. 수명장자라는 같은 부모 밑에서 태어났으면서도, 휘휘 손 저으면 도망가는 모기나 파리와 다르게 빈대는 한 번 몸에 붙으면 여간해서 떼내기 힘들다. 마치 자신이 숙주와 한 몸인 것처럼 붙어 있다가 더 이상 먹이를 얻을 수 없을 정도가 되어야 떨어진다. 권력에 빌붙어 살던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그랬다. 스님을 무시하는 정도를 넘어, 불상을 부수기도 하고, 값비싼 물품을 뺏어가기를 서슴지 않았다. 

심지어 절터가 명당자리라며 폐사시키고 그 자리에 서원을 짓거나 묫자리로 쓰는 일도 있었다. 말 그대로 무도막심한 수명장자의 모습을 재현한 것이다. 그들의 횡포가 얼마나 심했으면 절집의 기반을 흔들어 무너뜨렸다는 뜻에서 ‘빈대 기둥’ 이야기까지 나온다. 이처럼 일탈한 사람들의 욕심과 횡포가 이런 안타깝고도 우스꽝스러운 전설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나 한순간의 우스갯소리로 웃고 넘기기에는 전설이 주는 교훈이 크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빈대처럼 권력의 옆에 붙어 이득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이 득실거리기 때문이다. 빈대는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큰 권력에는 큰 빈대가, 작은 권력에는 작은 빈대가 득실거린다. 빈대는 남의 눈과 말을 의식하지 않는다. 심지어 자신이 가질 이득이 적다고 남을 음해하기까지 한다. 만족을 알고 자제를 할 줄 알아야 하건만 갖고자 하는 욕심이 하늘을 찌를 듯하다. 이득을 두고 서로 갖겠다고 탐내고 싸우는 빈대의 욕심이 숙주를 병들게 하고, 마침내 쓰러지게 한다. 숙주가 죽으면 기생충도 없다는 것을 모르는 듯하다.

백란골 큰 절의 경우처럼, 빈대 때문에 폐사한 전설에는 수행의 길을 벗어난 스님이 꼭 등장한다. 무리한 욕심을 내거나 불제자로서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면 빈대가 나타나고, 결국은 빈대의 등쌀에 이기지 못하여 절을 버리거나 불을 지른다는 구조이다. 그러나 전해오는 이야기만으로는 진실을 온전히 알 수가 없다. 권력자의 눈과 귀를 가리기 위해서 비유나 풍자로 진실을 숨기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전등사 화재의 경우에도 스님이 아닌 사대부들이 불을 지르고 스님들에게 죄를 덮어씌웠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 사정이 있어 그냥 절을 떠나는 스님은 있을지 몰라도, 조석으로 모시던 부처님을 절집에 그대로 두고 불을 지르는 스님은 상상하기 힘들다. 그리고 설사 스님이 불을 질렀다고 하더라도 스님만의 탓이 아니다. 스님을 타락시킨 사회나 그들을 탄압한 사람이 진짜 빈대였고 방화범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사족처럼 한 마디 더 보탠다면, 사림(士林)의 횡포 속에서 겨우 살아남은 절들도 결국은 화마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권력에 빌붙은 빈대들이 욕심에 눈멀어 헐뜯고 싸우는 동안 왜구와 오랑캐가 침입하여 불을 질렀기 때문인데, 빈대가 많으면 꼴 보기 싫다고 이웃 사람들까지 나서서 집에 불을 지르는 법이다. 나라 꼴이 가관인 요즘, 하찮은 벌레 이야기이지만 빈대 전설이 남기는 의미를 잘 새겨야 할 것이다.
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입력 : 2022년 11월 0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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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담한지미술관
글 잘 읽었습니다, 빈대로 망했다는 절이 하도 많아서 저 나름대로 살펴본 결과 빈대로 망했다는 절은 거의 종이부역에 시달렸던 사실이 있습니다, 즉, 억불숭유의 시대적 상황속에서 대대로 종이 뜨는 기술이 있고 실제로 사찰에 종이가 요긴하였기 때문에 어느절이나 흔하게 종이를 떠왔는데, 나라의 부역을 당하고 지방 호족들에게 종이부역을 심하게 당하면서 당시 탐관오리들이 많아 할당양을 떠서 바쳐도 중간에서 이놈저놈이 빼먹고 다시 곤장을 맞고 또 떠서 바쳐야 하는등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래서 젊은 스님들은 다 도망가고 뜨다만 닥섬유와 찌꺼기들에서 보온성이 있으니 자연히 빈대가 성하게 되었고 절을 지키던 노스님들마저 진짜 빈대들과 인간빈대들에 견디다 못해 절을 버리고 떠나게 되니 그 절이 빈대가 기둥곳곳마다 빽빽하여 결국 불을 지를 수 밖에 없었던 사연입니다, 빈대로 망했다는 절의 역사는 오래 되었다하더라도 망한 시기는 대부분 조선중기 이후의 절들인 점도 이 사실을 뒷받침 한다고 사료됩니다,
09/07 06:34   삭제
백대기
좋은 글 아주 감사 합니다
고성군 거류면 거류산에도 절터가 있음
빈대 대문에 절을 태워다는 이야기가 구전되고 있음.
11/10 10:26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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