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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초 설움 풀어주고 마음을 어루만지는 광대들, 줄타기와 남사당

2천 년을 거슬러 문화의 꽃을 다시 피우는 역사도시 고성
사회 풍자, 해학, 자유와 평등을 담은 대표 광대놀음
남사당놀이 2009년 줄타기놀이 2011년 유네스코 등재

최민화 기자 / 입력 : 2022년 10월 14일
↑↑ 인천남사당놀이보존회의 남사당놀이공연(2011년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
ⓒ 고성신문
↑↑ 김대균 명인이 이끄는 줄타기보존회의 2019년 당항포관광지 공연모습(2009년 유네스코 등재)
ⓒ 고성신문
▣ 글 싣는 순서
① 역사와 문화의 가치, 세계문화유산도시 고성
② 자연과 사색, 깨달음이 있는 한국의 서원
③ 과거부터 미래까지 생태환경의 지속가능성, 한국의 갯벌
④ 5천 년 전 인류의 소리를 품은 고인돌유적
⑤ 천 년의 하늘이 들려주는 신라의 역사와 문화 이야기, 경주
⑥ 다시 피어나는 역사의 숨결, 백제역사유적지구
⑦ 수백 년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한국의 역사마을, 하회와 양동
⑧ 살아있는 불교 정신이 꽃피운 위대한 문화유산
⑨ 600년 조선왕조의 역사가 잠들다, 조선왕릉
⑩ 조선의 정신을 깨우는 종묘와 종묘제례악
⑪ 민초 설움 풀어주고 마음을 어루만지는 광대들
⑫ 춤에 담은 한반도의 정신과 가치, 처용무와 강강술래
⑬ 정조의 원대한 꿈이 깃든 성곽의 도시, 수원 화성
⑭ 우연의 순간이 빚어낸 아름다움,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
⑮ 바다에서 삶을 일구는 제주의 해녀문화와 칠머리당영등굿


줄이 궁궐의 하늘을 가르고 있다. 줄의 끝에는 맹인이 된 광대가 아슬하게 서 있다. 그는 어릴 적 광대패의 장단에 눈이 멀었고 광대일 적에는 어느 광대와 짝맞춰 노는 신명에 눈에 멀었으며 한양 저잣거리 구경꾼들의 엽전 몇 닢에 눈이 멀었고 궁에 와서는 어느 잡놈이 저와 짝 맞춰 놀던 광대 마음을 훔쳐 가는 걸 못 보고 살던 광대다. 눈이 멀고 나니 그 모든 게 훤히 보였다. 그런데 바로 옆에서, 제가 탈 줄로 이끄는 이가 그 광대인 줄은 꿈에도 모른다.
목소리를 알아들었다. 휘청이다 이내 가느다란 줄 위로 발을 내디딘다.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냐?”
“아,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지.”
꽹과리 소리가 흥이 넘친다. 광대패는 멀리 언덕을 돌아 사라진다.
영화 ‘왕의 남자’ 막바지 장면이다. 이 영화는 남사당패의 이야기다. 이들이 보여주는 남사당놀이(2009년)와 줄타기(2011년)는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 평등과 자유의 가치 담은 유희, 남사당놀이
영화 ‘왕의 남자’에서 이야기를 이끌던 광대패는 남사당놀이패다. 남자들로 구성된 유랑광대극 남사당놀이는 서민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음악과 극, 기예 등을 중심으로 정치, 계급사회에 대한 풍자와 현실사회의 해학을 담은 재담이 어우러지는 종합예술이다. 민중들의 속을 뻥 뚫어주니 서민들에게는 최고의 예인들이었으나 양반들에게는 천시받고 박대당했다. 그러니 남사당패는 유랑예인집단이었다.
남사당놀이는 기록이 매우 부족해 그 기원이나 역사를 명확히 알 수 없다. 남은 기록들도 천시받은 남사당놀이였으므로 부정적인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일부에서는 남사당패가 우리 민족의 수렵과 유목, 농경사회까지 과정을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떠돌이 예인집단으로, 떠도는 과정에서 전문 예인집단으로 발전했다고 보기도 한다.
남사당놀이는 풍물과 줄타기, 연극, 버나 등 그야말로 전문 예인집단이 선보이는 종합예술이다. 남사당놀이판이 벌어지면 꽹과리와 징, 장구, 북 등의 타악기가 흥을 돋운다. 마당씻이, 옴탈잡이, 샌님잡이, 먹중잡이 등으로 구성되는 덧뵈기는 사회의 여러 계층을 그린다. 어름은 줄타기, 덜미에서는 50여 개의 인형들이 등장해 연극을 선보이며 곡예와 재담, 음악이 어우러지는 살판, 나무 막대 끝에 둥그런 접시를 돌리는 버나까지 남사당놀이는 다양한 민속공연이 이어진다.
놀이 형태를 보면 고성오광대와 비슷한 구석이 많다. 남사당패의 가면극과 꼭두각시놀음에는 양반인 주인과 저항하는 하인이 등장하는데 이는 고성오광대의 2과장 말뚝이 대목과 비슷하다. 늙은 부부와 첩의 이야기는 5과장인 제밀주과장, 속세의 쾌락에 빠져 파계하는 승려는 4과장 승무와 아주 닮았다.

남사당패는 40~50명의 남자연희자들이 우두머리인 ‘꼭두쇠’를 줄심으로 곰뱅이쇠(기획), 뜬쇠(무대관리), 가열(연행), 삐리(초입), 저승패(늙은단원)과 잔심부름꾼, 등짐꾼 등으로 역할이 나눠져 있었다. 이들은 엄격한 위계질서를 가지고 있었고 도제방식으로 기예를 전수했다.

1930년대까지는 심선옥패, 안성 복만이패, 원육덕패, 이원보패 등 꽤 많은 남사당패가 활동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전통예술이 그랬듯 남사당놀이 역시 일제강점기에는 그 명맥이 끊어질 위기를 맞았다. 해방 후 1960년대 들어 남형우와 양도일, 최성구, 송창선 등이 민속극회 남사당을 재조직하면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남사당패는 서울을 근거지로 한다. 그러나 경기도 안성 인근에서 주로 전파됐고, 유랑예인집단이라는 특성과 함께 각 지역에 남아있는 민중놀이나 탈놀이판의 형태를 보면 지역의 경계를 두고 활동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남사당패는 사람들이 누구나 드나들 수 있고 어느 방향에서건 볼 수 있는 공터에서 공연했다. 놀이패는 공연하려는 마을에 도착하면 먼저 마을의 평화와 풍요, 안녕을 비는 의식과 함께 음악을 연주하며 흥을 끌어올렸다. 이어 음악, 극, 춤, 곡예가 이어지며 현실의 한계에서 억압받는 서민들의 한을 풀어주고 자유와 평등을 바탕으로 민중의 사기를 북돋았다. 모든 마당극이 그렇듯 연희꾼들은 관중들의 반응을 유도하고 공연 중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소통하는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관객을 공연에 끌어들인다.

남사당놀이는 유희로서 역할은 물론 사회적 메시지 전달자이기도 했다. 남성 중심의 봉건사회에서 여성과 하층민은 박대받고 억압받았다. 이 설움을 탈춤과 꼭두각시놀음이 풀어줬다. 단지 즐거움뿐 아니라 힘없는 이들의 목소리를 풍자로 대변하며 현실을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이는 결국 평등과 자유의 이상이었다.
1964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남사당놀이는 예술적 가치는 물론 인간평등과 자유의 가치를 담았다는 점과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다는 점 등을 들어 2009년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대표목록으로 등재됐다.

# 관객과 소통하며 완성하는 종합예술, 줄타기
얼음 위를 조심조심 걷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라 해서 ‘어름’이라고도 부르는 줄타기는 두 명의 연희꾼이 무대를 꾸민다. 요즘 와서는 그 경계가 허물어졌지만 광대패와 줄타기는 구분됐다. 광대들이 관가나 양반가에 불려 다니며 연희하던 것과는 달리 줄타기는 서민 취향의 재담, 재주를 선보이는 연희다.
 
줄타기는 줄광대인 어름산이가 줄을 타고 어릿광대인 매호씨가 재담을 주고 받는다. 3m 높이의 작수목에 오른 어름산이는 가느다란 줄 위에 발을 내디디며 땅에 있는 매호씨와 재치와 익살이 담긴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핀잔과 칭찬, 풍자와 해학이 오간다. 요즘으로 치면 일종의 스탠딩코미디다.

줄판이 벌어지면 그 동네 사람들에게 덕담을 전하기도 하고 지역 특색이 가득한 재담이 오간다. 처음에는 말장난마냥 시작해도 나중에는 줄을 타는 어려움과 인생살이의 어려움이 한 가지가 되기도 한다.

줄광대 어름산이는 줄타기뿐 아니라 소리와 춤, 악기까지 다룬다. 줄 위에서 그 기량은 유감없이 선보인다. 줄 위를 쭉 걷나 싶다가도 다리를 접었다 펴고 때로는 줄 위에 앉았다 서고, 부채 하나 들고 휘적대며 아슬아슬한 기예와 재담이 이어진다. 줄 한 가닥과 광대 둘은 세상 온갖 시름을 풀어낸다.

외줄 위에서 쓸 수 있는 기술이라 해봐야 거기서 거기일 것 같지만 줄광대는 43가지의 기예 동작을 쓴다. 두 발로 줄 위에 섰다가 뛰어서 가랑이 사이로 줄 위에 앉았다가 반동을 줘 다시 줄 위에 오르는 ‘쌍홍잽이’는 관객들의 가슴을 철렁하게 했다가 환호를 끌어내는 대표 동작이다. ‘외홍잽이’는 ​한 발로는 줄을 딛고 한 발은 줄 아래로 내려 앉았다가 몸을 튀겨 일어서는 동작, 앵금뛰기는 한 발만으로 전진하는 기술이다.

줄광대의 기술만으로 줄타기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줄광대와 재담을 주고 받는 어릿광대는 물론 기술에 적절하게 맞는 장단을 연주하는 악사들의 역할도 중요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판의 흥을 더하는 관객들의 역할이다.
알려지기로는 삼국시대 팔관회에서 시작됐다고 하지만 줄타기가 문헌에 처음 등장한 것은 고려시대다.
 
이규보의 시문집 ‘동국이상국집’에는 줄타기를 “비단 장벽에 안개가 끼어 있고 채색 산에는 구름이 자욱한데, 솟대타기와 줄타기는 장안이 온통 구경하고, 북소리와 현악 소리는 팔가에 늘어서서 모두 듣는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고려시대에는 연등회와 팔관회가 대표적인 국가 행사이자 의식이었다. 이 행사에서 줄타기 공연이 선보였다. 중국사신을 맞는 자리에서 줄타기를 했던 그림도 전한다.

일제강점기 명맥이 끊길 뻔했던 줄타기는 1976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8호로 지정돼 보존·전수돼 오다가 2011년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유네스코는 관객과 끊임없이 소통하며 완성되는 공연성에 주목했다.

줄타기놀이 광대들이 많던 시절에는 줄광대와 어릿광대들의 역할이 구분돼있었다. 물론 두 광대 모두 소리와 춤, 악기까지 뛰어난 예술적 기량을 가지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지금 줄타기 광대들은 두 역할이 모두 가능하다.
다른 나라의 줄타기는 단순히 줄 위를 걷는 정도다. 그러나 우리의 줄타기는 종합예술이다. 광대가 줄을 타는 동안 아래의 어릿광대는 끊임없이 말을 걸며 재담을 주고받고, 꽹과리와 징, 장구, 북, 태평소는 줄 아래에서 광대의 재간에 맞는 갖가지 장단으로 흥을 돋운다. 연극적이고 음악적인 면을 모두 갖추고 있다. 뿐만 아니라 관객과의 소통은 줄타기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다. 이 모든 것이 어우러진 줄타기의 예술적 가치를 높인다.

줄타기보존회는 1991년 설립됐다. 20여 명의 회원들을 이끄는 이는 중요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인 김대균 명인이다. 그는 비영리단체인 보존회를 이끌면서 줄타기를 알리고 있다. 보존회는 과천정부청사 인근에 있어 도심으로부터 접근성도 좋다. 줄타기전수교육장에서는 한여름과 한겨울을 제외한 계절이면 매월 전통줄타기공연이 열린다. 이때 김대균 명인의 해설이 곁들여지면서 흥과 멋을 더한다.

“줄타기는 관객과 함께 소통하고 호흡하며 한국 전통문화의 정체성을 보여줍니다. 관객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한 놀이예요. 줄타기의 현란한 기술, 음악과 함께 사회적 문제나 권력에 대한 풍자, 개인사나 소망까지 한 가지 주제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이야기를 통해 무대를 완성합니다.”

김대균 명인은 아홉 살 때부터 줄을 탔다. 줄타기 초대 예능보유자이자 스승인 김영철 명인이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위기가 닥치기도 했다. 그러나 스승과 제자는 함께 그 난관을 이겼다. 줄타기 광대로서 김대균 명인은 개인적으로도 대단한 성취감을 맛봤다. 그리고 동시에 아픈 스승을 대신해 꿈을 이뤄낸 것이기도 했다. 그렇게 걸어온 줄타기 명인의 길은 유네스코 무형유산으로 이어졌다. 김대균 명인은 공연뿐 아니라 후계자를 기르는 일에도 열심이다. 줄판에서 걸판지게 노는 광대들의 맥이 그렇게 이어지고 있다.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최민화 기자 / 입력 : 2022년 10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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