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싣는 순서
① 역사와 문화의 가치, 세계문화유산도시 고성
② 자연과 사색, 깨달음이 있는 한국의 서원
③ 과거부터 미래까지 생태환경의 지속가능성, 한국의 갯벌
④ 5천 년 전 인류의 소리를 품은 고인돌유적
⑤ 천 년의 하늘이 들려주는 신라의 역사와 문화 이야기, 경주
⑥ 다시 피어나는 역사의 숨결, 백제역사유적지구
⑦ 수백 년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한국의 역사마을, 하회와 양동
⑧ 살아있는 불교 정신이 꽃피운 위대한 문화유산
⑨ 600년 조선왕조의 역사가 잠들다, 조선왕릉
⑩ 조선의 정신을 깨우는 종묘와 종묘제례악
⑪ 민초 설움 풀어주고 마음을 어루만지는 광대들
⑫ 춤에 담은 한반도의 정신과 가치, 처용무와 강강술래
⑬ 정조의 원대한 꿈이 깃든 성곽의 도시, 수원 화성
⑭ 우연의 순간이 빚어낸 아름다움,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
⑮ 바다에서 삶을 일구는 제주의 해녀문화와 칠머리당영등굿
|
 |
|
↑↑ 서울시 종로구에 위치한 종묘 영녕전. 종묘는 199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
ⓒ 고성신문 |
|
“전하, 이 나라 종묘사직을 바로 세우셔야 하옵니다!” “어찌 종묘사직을 버리려 하시옵니까?” 사극에서 왕과 신하가 등장하는 장면에서 심심찮게 들리는 대사이다. 여기서 등장하는 ‘종묘사직’은 조선의 왕과 왕비의 위패를 모신 종묘, 백성의 복을 비는 땅의 신 사(社)와 곡식의 신인 직(稷)을 함께 일컫는 말이다. 다시 말해 종묘와 사직이 흔들리거나 사라지는 것은 나라가 영 잘못된 길로 간다는 뜻이다. 그러니 종묘사직을 지키는 일은 조선에 있어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이 중 종묘는 199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종묘에서 봉행되는 종묘제례와 제례 시 연주하는 종묘제례악은 2001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 조선의 유교 정신 담은 문화유산, 종묘
유교 예법에 따르면 나라의 도읍에는 왕이 머무는 곳, 조상에게 제를 올리는 종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이 필요했다. 유교 경전인 ‘주례(周禮)’에는 ‘궁궐의 왼쪽에는 종묘, 오른쪽엔 사직단을 두어야 한다’고 돼 있다. 종묘는 경복궁보다 먼저 지어 조선의 왕을 모신 유교사당이다. 태조는 1394년 8월 한양으로 천도한 후 그해 12월 종묘를 짓기로 했다. 처음에는 ‘태묘(太廟)’라 불렀다. 태묘에는 태조의 4대조 신주를 이전 수도였던 개성에서 종묘로 옮겨와 보관했다. 세종 원년인 1491년에는 태묘 서쪽에 별모인 영녕전을 지어 조선 2대 왕 정종의 신위를 모셨다. 1547년 네 개의 묘실을 증축했지만 임진왜란 당시 종묘는 모두 파괴되고 말았다. 후에 즉위한 광해군은 1608년 종묘를 복구했다. 1667년에는 영녕전, 1778년과 1836년에는 정전을 증축했다. 수 차례 증축을 거친 종묘 영녕전의 묘실은 현재 16실, 정전은 19실로 늘어났다. 왕은 나라와 백성의 안위를 기원하며 문무백관과 함께 제를 올렸다. 그러니 종묘는 왕실의 상징성과 정통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종묘 정전은 정면이 길고 건물 앞마당과 일체를 이룬다. 이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예외적인 건축물이다. 유교 문화의 조상숭배, 제사 의례를 바탕으로 왕실이 주도해 엄격한 형식에 따라 지어진 건물은 복구와 증축을 거치면서도 조선 시대의 원형을 지금까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종묘제례 시 음악과 춤이 함께하는 종묘제례악도 마찬가지다. 종묘의 건축과 관리는 물론 제례봉행절차 등은 왕실의 공식기록으로 남아있어 향후에도 원형의 보존이 가능하다.
|
 |
|
↑↑ 종묘대제 중 종묘제례악보존회의 일무 공연 모습 |
ⓒ 고성신문 |
|
# 효를 실천하고 질서 바로 세우는 종묘제례
정전에서는 매년 종묘제례(종묘대제)가 봉행된다. 조선왕조가 사라진 지금도 종묘제례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종묘제례는 국가 제사로, 임금이 제관이 돼 친히 받들었다. 유교사회의 의례 중 으뜸은 길례였고, 이는 효 실천의 근본이었다. 국가의 근본이 유교였던 조선시대 당시에는 조상을 모시는 일이 당연한 인간의 도리였다. 해방 후 한동안 폐지되기도 했던 종묘제례는 1969년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이 주관해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봉행한다. 종묘제례는 유교적 절차에 의한 왕실의례이다. 효를 실천하고 이를 통해 민족공동체의 유대감과 질서를 바로 세운다. 문화적 측면에서도 조형미가 뛰어난 건축공간에서 장엄하고 아름다우며 품격 있게 진행되는 종묘제례는 자연과 정신이 어울린 종합예술의 정수이자 시공간을 초월해 이어져 오는 정신적 문화유산이다. 종묘제례악은 음악과 노래, 춤이 함께 구성된다. 편종과 편경 등의 타악기가 주선율을 만들면 당피리와 대금, 해금, 아쟁과 같은 현악기가 선율의 장식을 더한다. 여기에다 장구와 징, 태평소, 절고, 진고 등이 가락을 더욱 풍성하게 하고 노래가 덧입혀지면서 중후하고 화려해진다. 조선 세종 때 만들어진 종묘제례악은 중국식 아악과 우리 음악인 향악, 송나라 때부터 전해진 당악이 합쳐졌다. 세종대왕은 예악의 기틀을 세우고, 정치나 사회, 경제, 문화 등 국가경영의 바탕으로 백성을 교화하고 통치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종묘제례악은 1964년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됐고, 이로부터 9년 후 종묘제례가 중요무형문화재 제56호로 지정됐다. 종묘제례악과 종묘제례는 2001년 5월 당시 명칭 유네스코 세계인류구전 및 무형문화유산걸작으로 선정됐다. 이어 2008년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에 통합되었다.
|
 |
|
↑↑ 종묘제례악보존회의 제례악 연주 모습 |
ⓒ 고성신문 |
|
|
 |
|
↑↑ 조선 세종 때 만들어진 종묘제례악은 음악과 노래, 춤이 함께 구성된 일종의 종합예술이다. |
ⓒ 고성신문 |
|
# 조선왕조의 정신, 종묘 보존을 위한 노력
종묘는 전체 영역과 정전, 영녕전 등의 건물이 문화재보호법에 의거해 국가지정문화재로 보존 관리된다. 문화재보호법과 서울시 종로구 조례에 따라 문화재 및 보호구역 경계로부터 100m 이내 지역은 역사문화환경보존지역으로 지정돼 보호된다. 역사문화환경보존지역 내의 모든 건설행위는 사전심의가 의무화돼있다. 서울시 도시계획과와 도시교통과, 문화재과도 종묘 주변지역을 관리한다. 서울시는 기본경관계획과 지구단위계획을 수립해두고 주변 지역에 대해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종묘의 보존과 관리는 문화재청이 책임진다. 문화재청에서는 종묘 건물과 시설물의 보수와 정비, 발굴, 예산지원 등을 총괄하고 있다. 종묘관리소에서는 25명 내외의 직원들을 배치해 종묘를 관리하는 것은 물론 상시 모니터링과 주기적인 전문가 정밀 모니터링하고 있다. 종묘와 종묘제례, 종묘제례악은 조선의 역사이자 문화이며 나라의 근간을 지탱해온 정신이다. 전통의 제례와 절차를 이어가는 것은 왕실의 후손인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이지만 그 정신을 이어가는 것은 대한민국이고 바로 ‘우리’이다.
[인터뷰] 양명석 (사)국가무형문화재종묘제례악보존회 부회장
“우리 민족의 충효사상이 가장 큰 토양”
|
 |
|
↑↑ 양명석 (사)국가무형문화재종묘제례악보존회 부회장 |
ⓒ 고성신문 |
|
전수교육, 종묘제례 봉행
고궁음악회로 일반인에게 성큼
가감없이 원형 보존 노력
전문인력 충원 시급
종묘제례악은 해방 이후 제례 자체가 중단되며 자칫 잃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지키고자 하는 이들의 노력이 이어졌다. 덕분에 종묘제례악은 세계적으로 현존하는 유일한 유교제례의식음악으로, 유네스코 등재에 앞서 대한민국 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됐다. 종묘제례악은 결국 여러 악기가 함께 해야만 음악을 이룰 수 있다. 이에 따라 2001년 종묘제례악보존회를 임의단체로 설립한 후 같은 해 종묘제례와 함께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효를 바탕으로 한 왕실의 유교문화는 중국이나 베트남에도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왕조의 몰락, 세계대전, 내란, 공산화와 그에 따른 문화혁명을 거친 문화말살정책 등등의 다양한 사건을 겪으며 멸절됐지요. 대한민국의 종묘제례악은 1464년 제례악으로 지정된 이후 수많은 전쟁이나 여러 환난 속에도 끊임없이 600여 년을 이어왔고 전 세계적으로 유일하게 남은 유교 왕실의식과 의식음악입니다.” 종묘제례악 보존회는 2017년도 임의단체에서 사단법인으로 전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문화재 지정 당시에는 개인 종목으로, 이왕직 아악부 출신 악사와 국악사 양성소 출신 젊은 악사 등 총 20명의 예능보유자를 지정했다. ’보유자는 30세를 넘어야 한다’는 새로 시행된 문화재보호법에 의해 국악사양성소를 갓 졸업한 11명은 보유자 자격이 해제돼 9명만 남았다. 1980년대 들어 전수조교(현 전승교육사)를 추가지정해 예능전수교육을 해오다 2012년도까지 4명의 전수조교가 추가 지정돼 명맥을 이을 수 있었다. 2008년 예능보유자들이 모두 작고한 후 행정당국의 명쾌한 입장표명없이 수년 동안 예능보유자가 없는 단체로 전승교육사 8명의 노력으로 많은 이수자들을 배출했다. 이후 사단법인 종묘제례악보존회로 단체를 법인화한 후 현재는 고령의 명예보유자와 전승교육사 각 3명과 보존회원들이 종묘제례악을 이어가고 있다. 종묘제례악보존회는 매달 전수교육과 합주교육, 춘·추계 종묘대제(종묘제례) 봉행, 고궁에서 우리 음악 듣기 등 다양한 공연을 선보이며 조선왕실의 음악을 감상할 기회를 제공한다. “종묘제례는 사직과 더불어 조선왕조를 떠받쳐온 양대 기둥입니다. 유교적 사상에 입각해 본인의 안위보다 조상들을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우리 민족의 충효사상이 현재까지 전통음악이 전승될 수 있도록 한 큰 토양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종묘제례악보존회는 전수교육에서 이전 예능보유자들이 가르치던 그대로 변형과 가감 없이 원형 그대로 전수하는 것에 가장 심혈을 기울인다. 어려움도 있다. 예능보유자가 15년 가까이 지정되지 않고 전승교육사가 부족한 현실은 종묘제례악을 지키는 일에 숱한 역경을 만든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종묘제례악보존회는 전문인력 충원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젊은 세대가 유교적 사상을 표현하는 세계 유일의 향악인 제례악으로써의 가치를 인식하고 음악체득에 정진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분야(종묘제례의식)의 전형(典型)에 걸맞게 궁현(宮懸)의 악기편성으로 황제국가의 예로 종묘대제를 봉행하는 시기가 빨리 도래하기를 염원합니다.”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