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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남 부여군의 정림사지 |
ⓒ 고성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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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북 익산시의 미륵사지 |
ⓒ 고성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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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8년 건국된 백제는 660년 멸망했다. 한반도 초기 삼국 중 하나로 700년동안 존속했던 백제는 중국의 건축기술과 불교문화를 수용해 독자적인 문화를 만들어냈다. 이어 활발한 교역으로 백제의 문화를 왜(일본)에 전파하기에 이르렀다.
백제역사유적지구는 5~7세기 고대 동아시아 국가간 교류와 건축기술의 발전, 불교의 확산을 보여주는 유적이다.
# 재도전 끝에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2015년 7월 4일 오후 3시. 독일의 본 세계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제39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의에서 새로운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탄생했다. 충남 공주시와 부여군, 전북 익산시에 퍼져있는 백제역사유적지구를 한데 묶은 연속유산으로, 유네스코의 까다로운 문턱을 넘은 것이다.
백제역사유적지구는 공주의 공산성과 송산리 고분군 등 2곳, 부여의 관북리 유적·부소산성과 능산리 고분군, 정림사지와 부여 나성 등 4곳, 익산의 왕궁리 유적과 미륵사지 2곳 등 모두 8곳이다.
대상지역인 공주시와 부여군, 익산시를 비롯해 충청남도와 전라북도 등 5개 지자체는 2011년 문화재청과 백제역사유적지구 유네스코 세계유산등재를 위한 협력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이어 이듬해인 2012년에는 학계를 중심으로 한 추진위가 꾸려졌고, 추진위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자문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 한국위원회와 지속해 접촉을 시도했다. 국내에서도 백제는 다른 역사에 비해 비교적 알려진 것이 적다. 그러니 백제의 역사를 소개하는 것부터 난관이었다. 그러니 등재 확정까지는 그야말로 피가 마르는 심정이었다.
백제유적은 이미 1994년부터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도전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무령왕릉과 공산성이 있는 공주시, 부소산성이 있는 부여군 등 각 지자체들이 따로 등재를 추진했다. 같은 역사유적을 가진 지역들이 따로따로 추진하니 유네스코의 설득은 쉽지 않았다. 근거를 마련하는 과정도, 행정적인 절차도 복잡하고 힘든 과정이었다.
세계유산은 창의성, 다른 문화권과의 교류, 독보성, 경관, 자연의 효율적 이용, 인류 역사상 중요 사건과의 연관성 등 여섯 가지의 등재 기준이 있다. 이 중 최소 한 가지는 충족해야 등재가 가능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탁월하고 보편적인 가치’다. 각 지자체는 손을 잡았다. 공주, 부여, 익산의 백제 유적은 다시 도전했다. 다른 문화권과의 교류, 독보성에서 합격이었다. 유네스코는 ‘한국 유적에서 나타나는 백제만의 독특한 건축기술과 백제가 일본에 불교와 유교문화를 전파한 점’을 높이 평가했다.
# 64년 웅진 시대 연 충남 공주
475년 고구려의 침략을 받은 백제는 수도를 한성에서 웅진, 현재의 공주로 옮기면서 64년간의 웅진 시대를 연다.
공산성(사적 제12호)은 급경사의 공산과 북쪽의 금강을 활용해 축조된 천연요새다. 동쪽의 일부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석성이다. 공산성은 성벽축조 판축기법과 벽주건물지는 중국, 왜와 교류를 통한 백제 토목건축기술 발전과 전파경로 등을 확인하는 중요하는 자료다.
성벽과 연못, 나무창고, 저장구덩이 등이 있는 것으로 봐 성곽 안쪽에는 왕궁 등 주요시설들이 배치됐을 것으로 보인다. 토기, 기와, 무기, 목기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됐다. 이 중 ‘정관19년’이라고 적힌 옷칠 갑옷이 출토되기도 했다.
공산성은 백제가 사비(부여)로 천도한 후 5방성 가운데 북방성이었다. 660년에는 의자왕이 사비에서 공산성으로 피신해 나당연합군과 대치하다가 항복했다. 공산성은 백제가 멸망한 후에도 통일신라시대 웅천주의 치소, 조선시대에는 충청감영과 중군영 등 수백 년간 지방의 거점이자 방어성으로 활용됐다.
백제 제25대 무령왕과 왕비의 무덤인 무령왕릉은 삼국시대 고분 중 무덤주인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왕릉이다. 무령왕릉은 조성된 모습이 그대로 유지돼 학계를 놀라게 했고, 백제사는 물론 한반도 고대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됐다.
무령왕릉은 출입이 불가능하지만 바로 옆 왕릉원전시관에 실제 크기로 재현된 무령왕릉과 5, 6호분을 볼 수 있다. 1~5호분은 돌로 만든 굴식돌방무덤, 6호분과 무령왕릉은 중국에서 유행하던 양식인 벽돌무덤이다. 무령왕릉은 연꽃문양의 벽돌이, 6호분에는 사신도가 벽면을 장식하고 있다.
무령왕릉에서는 무덤의 주인을 알리는 묘지석과 금제관식, 도자기, 유리구슬 등을 비롯해 모두 4천600점의 유물이 출토됐다. 백제가 중국과 교류하며 전해진 무덤의 양식 뿐 아니라 중국의 영향을 받은 석수와 도자기, 일본산 금송으로 제작한 목관, 태국과 인도 등에서 건너온 장신구까지 발견되면서 백제의 넓은 국제교류를 증명했다.
# 백제 왕조와 운명을 같이 한 부여
웅진은 고구려의 위협을 방어하기에는 좋은 위치였다. 그러나 좁은 면적 탓에 수도로서 한계가 있었다. 새로운 수도의 필요성에 따라 백제 성왕은 538년웅진 남쪽에 위치한 사비(현재의 부여)로 천도했다. 사비에서는 123년의 백제문화를 꽃피웠다.
외곽방어시설인 부여 나성은 사비를 방어하기 위해 축조한 8㎞ 길이의 성곽이다. 부소산성에서 시작된 성은 사비의 북쪽과 동쪽을 감싸고, 서쪽과 남쪽은 금강이 있어 사방을 방어할 수 있었다. 부여나성은 온전하게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동아시아 도성으로 큰 가치를 갖고 있다.
부여의 중심부에 있는 정림사지는 국보 제9호인 5층석탑과 강당 일부, 보물 제108호 고려시대 좌불상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정림사지는 1942년 주변지역을 공원으로 만들기 위해 발굴이 시작됐다. 당시 이미 모든 것이 사라지고 지금의 모습이었던 정림사지는 평제탑(平濟塔)이라고 불리며 행사장이나 장터 등으로 사용됐다. 발굴조사를 거쳐 백제시대 조성된 후 고려시대까지 이어진 사찰 ‘정림사’가 있었던 것이 밝혀졌다.
정림사지 5층 석탑은 석탑이면서도 목탑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탑에는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기록이 새겨져있다. 금당터에서는 붉게 탄 흙층이 발견됐다. 정림사는 백제 왕조의 운명과 함께 해왔던 것이다.
# 백제 중흥 꿈꾼 무왕의 도시 익산
백제의 제30대 왕이었던 무왕은 수도를 금마저(익산)으로 천도하고자 했다. 아직까지는 수도로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왕궁에 물자를 공급하는 시설이나 관청 등 행정기능을 할 수 있는 시설, 근무자들의 거주지 등은 발견되지 않아 아직까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보통 고대국가의 수도에 위치하는 궁성과 종묘, 왕릉, 산성 등이 익산에 산재한 것으로 보자면 비록 천도하지는 못했으나 천도 시도가 있었고, 최소한 제2의 수도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정이 있다.
사적 제150호 미륵사지는 우리나라 불교 건축을 대표하는 문화유적이다. 미륵사지 유적은 미륵이 나타나 세상을 구원한다는 미륵신앙을 바탕으로 한 3탑 3금당의 가람 구조를 보인다. 이는 중국과 일본에서도 전례가 없는 백제의 독특한 건축양식이다. 현재는 국보 제11호 미륵사지 석탑, 보물 제236호 미륵사지 당간지주와 가람터 등만 남아있다. 동탑에서는 복원을 위한 해체 도중 사리장엄구가 발견됐다. 석탑이지만 목탑의 특징을 가진 동탑과 서탑은 2000년대 들어 완전히 해체해 복원한 상태다.
왕궁리 유적은 굉장히 흥미롭다. 얼핏 보면 중국이나 일본의 정원 같기도 한 모습이 군데군데 보인다. 그러나 계단식 후원인 화계는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구조의 정원이다. 처음 무왕이 건립했을 당시에는 궁궐이었다가 후에 사찰로 바뀌었다. 이런 이유로 무왕의 천도설은 물론 안승의 보덕국 수도설, 견훤의 후백제 도읍설이 함께 전해진다.
왕궁리 유적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화장실 유적이다. ‘호자’라고 하는 소변기는 물론 길이 10.8m, 폭 1.8m, 깊이 3.4m에 달하는 대형 화장실이 왕궁리 유적에서 발견됐다. 화장실 유적에서는 변을 본 후 뒤를 닦던 나무막대나 참외씨 등이 발견됐다. 이는 당시 궁궐이이었던 왕궁리 유적에서 많은 사람이 동시에 생활했다는 점을 확인시켜 준다.
공주와 부여, 익산 등 백제역사유적지구 세 지역은 지난 2018년부터 ‘백제문화유산주간’을 함께 운영하고 있다. 백제문화유산주간은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은 물론 공연과 전시로 백제의 역사와 문화를 더 쉽고 즐겁에 이해하고 나누는 문화향유의 장이 되고 있다.
행사뿐 아니라 세 지역의 국립박물관은 협력을 통해 각 지역의 박물관을 방문해 인증샷을 찍으면 상품을 지급하는 이벤트도 함께 진행하는 등 백제역사유적지구를 함께 홍보하고 있다. 각개전투보다 연합전을 택한 백제역사유적지구 세 지자체의 동행을 가야문화권 지역들도 눈여겨봐야 한다.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