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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천 년을 거슬러 문화의 꽃을 다시 피우는 역사도시 고성 4.] 5천 년 전 인류의 소리를 품은 고인돌유적

고창 화순 강화 연속유산
희귀성 역사성 특수성 인정
2000년 11월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고창 전북 고인돌 63% 넘는 1천665기
화순 596기 밀집, 280톤 이르는 고인돌 규모

최민화 기자 / 입력 : 2022년 06월 24일
▣ 글 싣는 순서
① 역사와 문화의 가치, 세계문화유산도시 고성
② 자연과 사색, 깨달음이 있는 한국의 서원
③ 과거부터 미래까지 생태환경의 지속가능성, 한국의 갯벌
④ 5천 년 전 인류의 소리를 품은 고인돌유적
⑤ 천 년의 하늘이 들려주는 신라의 역사와 문화 이야기, 경주
⑥ 다시 피어나는 역사의 숨결, 백제역사유적지구
⑦ 수백 년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한국의 역사마을, 하회와 양동
⑧ 살아있는 불교 정신이 꽃피운 위대한 문화유산
⑨ 600년 조선왕조의 역사가 잠들다, 조선왕릉
⑩ 조선의 정신을 깨우는 종묘와 종묘제례악
⑪ 민초 설움 풀어주고 마음을 어루만지는 광대들
⑫ 춤에 담은 한반도의 정신과 가치, 처용무와 강강술래
⑬ 정조의 원대한 꿈이 깃든 성곽의 도시, 수원 화성
⑭ 우연의 순간이 빚어낸 아름다움,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
⑮ 바다에서 삶을 일구는 제주의 해녀문화와 칠머리당영등굿

고인돌. 말 그대로 아래에 돌을 두 개 이상 괴어 만든 거석유적이다. 기원전 1천년 신석기시대나 청동시시대 시신이나 유골의 무덤방이다. 간혹 공동묘지에 묻기 전 시신을 수습하는 제단으로 쓰이기도 했다.
받침돌은 그렇다 치고, 볕이 잘 들면서 아래를 굽어볼 수 있는 위치까지 거대한 덮개돌을 옮겨야했으니 고인돌 하나를 만들려면 수많은 인력과 기술이 동원돼야 했을 것이다. 그러니 고인돌은 선사시대 재력과 권력을 모두 가진 부족의 우두머리나 지배계급의 무덤이었을 것이다. 때문에 고인돌은 사람들이 주로 거주하던 지대에서 올려다볼 수 있는 언덕이나 구릉에 있는 경우가 많다.
고성에도 고인돌이 많다.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양식인 고인돌(지석묘)이 학림리 지석묘, 오방리 지석묘 등 경남도 지정문화재 3개소 18기와 비지정문화재 55개소 118기가 있다. 상리보건진료소 진입로에는 고인돌공원이 조성돼있다.
안타까운 것은 50~60년대 마동호(간사지) 공사 당시 역사의식이 부족했던 탓인지 공사용 석재로 고인돌의 덮개돌을 사용하면서 사라진 고인돌이 많다는 점이다.

↑↑ 고창 고인돌 유적지의 1코스 탐방로. 모로모로 탐방열차가 정지하는 곳이다.
ⓒ 고성신문
# 탁월한 가치 인정받은 고창 화순 강화 고인돌
고인돌이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지역도 있다. 전라북도 고창과 화순, 인천광역시 강화군의 고인돌유적은 2000년 11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이 세 지역의 고인돌 유적은 기원전 1000년 이전 장례와 제례를 위해 만들어졌다. 당시에는 활자도 그림도 남은 기록이 없어 고인돌은 선사시대의 기술이나 사회상, 생활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은 인류의 보편적이고 뛰어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고창과 화순, 강화의 고인돌 유적은 2000년 12월, 인류를 위해 보호받을 가치가 있다는 ‘탁월한 세계적 가치’를 지닌 문화유산으로 공인됐다.
고인돌유적은 선사시대 장례 기념물로, 당시의 문화가 집약된 청동기시대 대표적인 유적으로 세계유산적 가치(OUV)를 갖고 있다. 고창과 화순, 강화의 고인돌은 희귀성과 역사성, 특수성 등 여러 측면에서 ‘아주 독특하거나 지극히 희귀하거나, 오래된 유산’으로 평가됐다.

고창과 화순, 강화의 고인돌 유적은 한 지역에 수백 기의 고인돌이 밀집해 분포한다. 이들 지역 고인돌의 다양한 형태와 유형은 거석문화 발전의 역사를 보여준다. 또한 고인돌을 조성하기 위해 바위를 채취한 채석장은 우리나라 고인돌의 기원과 성격, 고인돌의 변천사를 규명하는 중요한 자료일뿐 아니라 세계유산의 완전성도 보여준다.
세 지역의 고인돌유적은 원형이 잘 유지되고 있다. 물론 거대한 규모의 석조 유적이라 변형이 힘들다는 점은 장기보존의 측면에서 매우 유리하다. 이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의 진정성에 중요한 요건이 됐다.
전북 고창 죽림리 고인돌 군은 기원전 7세기경부터 존재했고 기원전 3세기경 조성이 중단됐다. 화순은 고창보다 약간 늦은 기원전 5~6세기경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강화 고인돌군은 조성연대를 추정할 자료는 충분하지 않으나, 고창이나 화순보다 더 빨리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한반도가 포함되는 동아시아는 고인돌의 모양에 따라 북방식(탁자식), 남방식(바둑판식) 고인돌이 발견된다. 네 개의 굄돌을 석곽이나 석관 가장자리에 세운 후 큰 덮개돌을 위에 올리는 것은 북방식으로, 한강 이북으로 갈수록 그 형태는 뚜렷해진다. 바둑판식이라 불리는 남방식 고인돌은 땅 밑에 석벽이나 적석벽 무덤방을 만든 후 땅 위에 돌무지를 놓고 덮개돌을 올리는 방식이다. 간혹 땅에 묻힌 돌 위에 바로 덮개돌을 올리는 변형된 바둑판식도 발견된다.

# 다양한 형태의 고인돌박물관, 고창
고창군은 작은 하천들이 서해로 흐르는 지역으로, 평야와 산악지형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런 지역은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모여살았다. 고창 역시 마찬가지다. 덕분에 선사시대 이후의 수많은 문화유적들이 발견되는 지역이다.
2008~2009년 조사로 고창 부곡리 증산 구석기시대 유적도 조사됐다. 이 지역에서는 석영암 계통의 석재가 확인되고 석기 제작소가 확인되기도 했다. 또한 격지편, 망치 등은 물론 석기제작도구까지 발견돼 고창은 이미 구석기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하며 문화를 형성해온 것으로 보인다.
고창고인돌유적지는 입구부터 거대한 고인돌 모형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박물관 입장권을 사면서 물으니 족히 1㎞는 걸어가야 고인돌을 볼 수 있다고 한다. 5월인데도 유달리 더운 날이라 그런가, 매표소 바로 앞 꼬마열차에 눈이 간다. 고창군 캐릭터인 모로모로가 반기는 탐방열차다. 냉큼 탑승권을 사서 올랐더니 이내 고인돌 유적지를 향해 출발한다. 모로모로 열차는 고인돌유적지를 한 바퀴 돌면서 코스별로 간단히 설명을 들을 수 있다. 1코스와 3코스에서 하차해 고인돌과 선사시대 마을을 둘러보고 체험할 수 있다.

열차를 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멀리 언덕 위로 고인돌들이 점점이 눈에 들어온다. 가까워질수록 거대한 고인돌에 압도된다. 아무리 채석장이 가깝다고 하지만 저 큰 돌을 기중기 같은 장비도 없던 시절에 도대체 어떻게 저렇게 옮길 수 있었을까 싶다.
우리나라 고인돌은 3만 기 이상이다. 그 중 고창이 포함된 전남, 전북지역 등 한반도 서남해안 지역에 밀집돼있다. 고창에는 전북 고인돌의 63%가 넘는 1천665기의 고인돌이 발견돼 단일 구역으로는 한국에서 가장 밀집돼있는 지역이다. 현재까지 고창 지역 고인돌은 185개 군집에 1천600기 이상이 확인됐다.

고창 고인돌은 죽림리, 상갑리, 도산리 일대에 군집을 이후고 있다. 성틀봉과 중봉에 산의 등고선 방향으로 위치해있는데 바로 앞에는 고창천이 흐르니, 어찌 보면 명당자리이긴 하다.
고인돌 모양은 굉장히 다양하다. 짧은 다리가 흙 속에 숨어있고, 큰 덮개돌만 눈에 띄는 전형적인 남방식 고인돌이 대다수이긴 하지만 간혹 다리가 꽤 긴 고인돌도 종종 눈에 띈다. 1코스의 송림 사이에는 연구가 진행 중인 고인돌도 있어 함께 열차를 타고 온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고창 고인돌 유적지는 그야말로 고인돌박물관이다. 고창에서는 바둑판식 고인돌은 물론 탁자식, 지상석곽식, 개석식까지 다양한 형태의 고인돌이 모여있다. 지상석곽식은 탁자식과 바둑판식의 중간형태로, 땅 위로 석관이 드러난 고인돌도 군데군데 분포하고 있다. 지상석곽식은 고창에서만 볼 수 있다.
고창의 고인돌은 1965년 국립박물관이 상갑리 고인돌 3기의 조사를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조사가 진행됐다. 1983년 아산댐 공사 중 용계리와 운곡리에서 22기의 고인돌이 발견됐다. 1992년에는 학술연구 목적으로 죽림리 2지구 3군 16기의 고인돌이 조사된 데 이어 1999년 서해안 고속도로 건설 당시 죽림리와 예지리의 고인돌도 조사됐다.

이 거대한 돌덩어리들도 태풍으로 쓰러진 적이 있다. 2003년 태풍 루사가 불어닥치면서 죽림리 2419호 고인돌이 넘어져버렸다. 2433호는 갑자기 많은 물이 흘러내려 넘어질 수 있어 재해고인돌로 발굴조사하기도 했다. 2004년에는 고창-담양간 고속도로가 지나는 부곡리에서 20여 기의 고인돌이 발굴됐다.
고창고인돌박물관 황지애 학예사는 “고창의 고인돌은 높지 않은 언덕에 위치해 일상생활을 위한 주거지와 매장지를 분리하고, 자연재해의 영향이 없는 곳을 택해 조성됐다”면서 “선사시대 기술로 돌을 옮기는 과정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채석장이 가까운 곳에 조성된 특성을 보인다”고 설명했다.

또한 “고창의 고인돌은 다양한 형식의 고인돌이 한 지역에 대거 분포하며, 고인돌 축조과정을 알 수 있는 채석장의 존재 등 동북아시아 고인돌 변천사를 규명하는데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면서 “세계유산위원회가 이를 인정해 등재기준 제3항 ‘독특하거나 아주 오래된 것’을 적용해 세계유산적 가치를 인정받았다”고 말했다.
학예사의 설명처럼 고창의 고인돌은 대부분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언덕 남쪽 15~50m 높이에 자리하고 있다. 고인돌유적지에서 볼 수 있는 442기 고인들들의 덮개돌 모양은 다양하다.
모로모로열차는 1코스와 3코스를 지나 모로모로마을 앞에 잠시 정차한다. 같은 열차를 탔던 아이들은 우르르 달려가 움집을 들여다보고, 모로모로 캐릭터와 사진을 찍느라 분주하다. 그야말로 체험과 놀이, 학습이 동시에 가능한 현장이다.

↑↑ 화순 고인돌 유적지는 차를 타고 둘러볼 수 있도록 조성돼 있다.
ⓒ 고성신문
# 고인돌마다 숨은 이야기를 찾는 재미, 화순
화순고인돌유적은 마치 사파리처럼 차를 타고도 둘러볼 수 있도록 전체 공원에 도로가 조성돼있다. 도곡면 효산리와 춘양면 대신리를 잇는 보검재 계곡 약 5㎞에 고인돌이 산재해있으니 천천히 한 바퀴 돌아보려면 걸어서는 힘들기도 하겠다.
고인돌은 영산강의 지류인 지석천 주변 평야와 이어진 보검재(188.5m)의 45~120m 사이에 분포해있다. 보검재는 보성과 나주를 오가는 일종의 교통 요지였다. 벌교와 보성 사람들은 1일과 6일 남평장이 서면 보검재를 넘어 오가곤 했다. 낮은 산인데도 산세는 꽤 깊었던지, 원앙리 사람이 보검재에서 호랑이를 잡았다는 기록도 있다.
 
이 지역은 앞으로 넓은 평야가 있고 강이 있어 사람들이 모여살기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화순의 고인돌은 고창보다는 다소 늦은 청동기 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화순의 고인돌은 좁은 지역 내에 596기가 집중분포돼있다. 특이한 것은 덮개돌 무게가 100톤이 넘는 고인돌은 물론이고 가장 큰 고인돌은 덮개돌이 280톤에 이른다는 점이다. 주변 자연환경도 거의 그대로 보존돼있고, 이 거대한 덮개돌이 있었던 채석장이 주변에서 발견돼 화순 고인돌의 축조과정을 쉽게 알 수 있다.
화순 고인돌유적은 1995년 목포대 이영문 교수가 처음 발견했다. 보검재는 그리 높거나 산세가 험한 곳도 아닌데 발견 당시 고인돌은 소나무숲 사이에 묻혀 거의 대부분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지석천과는 불과 2㎞ 떨어져있는 계곡에 주로 분포해있고, 보검재 아래 마을 안과 주변 평지, 구릉에도 많은 고인돌이 존재한다.
화순의 고인돌은 괴바위 고인돌군이 47기, 관청바위 고인돌군은 190기, 달바위 고인돌군 40기, 핑매바위 고인돌군 133기, 감태바위 고인돌군 140기, 대신리 발굴지 46기 등 거점별로 나뉘어 이름이 붙어있다. 화순 고인돌들은 옛날 이야기들도 숨어있어 역사와 함께 스토리텔링의 재미까지 느낄 수 있다.

괴바위라는 이름만 듣고는 이상한 형상의 바위라는 줄 알았더니 ‘고양이’ 바위다. 해발 65m에 자리한 괴바위는 고임돌 5개가 길이 530㎝, 폭 360㎝, 두께 300㎝의 거대한 덮개돌을 이고 있다. 지형적으로 고양이자리인데, 괴바위 고인돌 앞 성곡마을 뒷산 풍산 홍씨 선산이 쥐 형국이라 한다. 그런데 괴바위와 쥐무덤 앞에 계곡이 흘러 고양이가 쥐를 향해 달려들지 못하니 풍산 홍씨 선산의 묏자리가 좋다는 이야기가 있다.
괴바위처럼 약간 높은 위치에 조성한 거대한 고인돌들은 매장을 위한 무덤이라기보다 제단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190기의 고인돌이 밀집한 관청바위 지구는 관청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고인돌들은 화순 고인돌유적지에서 가장 큰 군집이다.
산 중턱 소나무 숲 사이로 둥그런 모양인데 위는 평평한 형태의 특이한 고인돌도 보인다. 내려갈 수는 없지만 길섶에서도 그 특이한 모양이 금세 눈에 띄는 달바위다. 보검재를 넘어 보성과 나주를 오가던 이들이 바위의 모양새가 마치 보름달 같아 달바위라 불렀다고 한다. 월곡저수지에서 보검재 방향으로 이어지는 달바위 지구에는 40여 기의 고인돌이 발견됐다.
 
길이 556㎝, 폭 396㎝, 높이 198㎝에 이르는 달바위 고인돌은 고임돌 6개가 덮개돌을 받치고 있는 전형적인 바둑판식 고인돌이다. 달바위는 무덤의 역할보다는 혈연집단의 묘역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정상을 지나면 이번에는 입이 떡 벌어질만큼 거대한 고인돌을 만난다. 얼핏 봐선 고인돌인지 바위인지 알 수도 없고, 고인돌인 것을 알아도 도대체가 이 거대한 바위를 채석장에서 여기까지 어떻게 옮겼는지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이름 또한 지역색이 가득한 ‘핑매바위’다.
 
덮개돌 앞에는 ‘驪興閔氏世葬山 己巳三月日有司閔丙龍(여흥민씨세장산 기사삼월일유사민병룡)’이라는 글자가 새겨져있다. 덮개돌 위에는 직경 40㎝ 정도의 구멍이 있다. ‘핑매’는 돌을 주워 던진다는 의미라는데, 이 바위에 얽힌 전설도 재미있다.
옛날 옛적 운주골에서 천불천탑을 모은다는 소문을 들은 마고 할머니가 치마폭에 돌을 싸 운주골로 가던 중 치마폭이 툭 터져버렸다. 돌을 가져갈 재간이 없던 할머니는 그 자리에 돌을 던져버리고, 급한 소변을 해결했다. 핑매바위 위 구멍이 그 흔적이라고 한다. 이 구멍에다 돌을 던져 구멍에 들어가면 아들을 낳고, 안 들어가면 딸을 낳는다는 이야기와 처녀총각이 왼손으로 돌을 던져 구멍에 돌이 들어가면 그 해에 혼인하고 안 들어가면 못한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그래서 이름이 핑매바위다.

핑매바위 아래에는 나무로 만든 궤짝이 있었다고 한다. 궤짝 안에는 장군이 입을 법한 옷 따위가 들어있었다고 해서 장군바위로 부르기도 한다.
화순 고인돌 유적에서는 모두 네 곳의 채석장이 확인된다. 보검재에서 춘양면 지동마을로 가는 길에는 고인돌의 덮개돌을 만들었던 채석장도 볼 수 있다. 길이 6m에 높이 2.5m 정도가 드러나있다. 채석장의 암벽 표면에는 50~60㎝ 정도로 결이 나있다. 이 때문에 채석하기 용이했을 것이다. 채석장 위에는 바위를 떼어내려던 흔적도 남아있다. 채석장 주변에는 고인돌의 덮개돌로 사용하려 했던지 바위들이 쪼개진 상태로 분리돼있다. 아마도 덮개돌로 쓰기 위해 옮기기 편하게 해둔 것 아닐까 추정하고 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채석장에서 떼어낸 바위들을 바로 아래로 옮겨 고인돌을 축조한 과정을 알 수 있다.
2012년 태풍 볼라벤이 화순을 지나면서 23호와 24호가 훼손됐다. 당시 발굴조사를 진행한 결과 23호는 개석식으로, 덮개돌 아래에 길이 133㎝, 너비 46㎝, 깊이 40㎝의 무덤방을 만들어둔 형태였다. 무덤방에서는 간돌검이 출토됐다. 화순 고인돌과 함께 세계유산에 등재된 고창, 강화지역에서는 간돌검이 발견되지 않았다.

↑↑ 인천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의 북방식 고인돌(자료제공=강화군청)
ⓒ 고성신문
# 고대 한반도의 역사를 엿볼 수 있는 강화
강화도는 고대 한반도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지역으로, 우리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단군왕검이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는 마니산 참성단, 단군의 세 아들이 지은 삼랑성, 선사시대 역사와 문화, 생활모습을 알 수 있는 고인돌까지 다양한 유적이 남아있다.
강화도에 남아있는 청동기시대 고인돌은 고천리, 교산리, 부근리, 삼거리, 오상리 등에 120기 정도가 남아있다. 고천리와 교산리는 고려산 산마루와 산속에 위치해있고, 삼거리와 부근리, 오상리는 평지에 있다. 이는 축조시기, 생활기반에 따른 차이로 짐작된다.

강화군청 문화관광과 윤승희 팀장은 “유네스코 세계유산 지정 당시 강화의 고인돌은 고창이나 화순보다 산중턱에 위치한 경우가 더 많았고, 외형적으로는 바닥에 붙은 개석식 평지형, 다리가 있는 북방식이 혼재돼있다는 점에서 다양성을 인정받았다”면서 “석분의 형태는 북쪽으로 갈수록 바닥에서 덮개돌이 멀어지는 모습을 보이는데 강화의 고인돌은 고창, 화순 등 남쪽 지역의 고인돌보다 북방식의 특징을 더 명확히 드러낸다”고 설명했다.
이어 “강화의 고인돌은 평지에 단독으로 있는 경우도 눈에 띄지만 고려산의 7부 능선에 조성된 고인돌도 있는 등 산지에 조성된 사례가 더 많다”면서 “아쉬운 것은 지역, 지형에 따른 분포의 차이 등을 해석할 만큼 발굴되거나 특징적 유물이 출토되지 않아 현재까지는 유의미한 차이가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이라고 덧붙였다.

연속유산인 고창, 화순, 강화 고인돌은 문화재보호법에 의해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돼있다. 이에 따라 고인돌유적지는 물론 보호구역경계 500m 이내 지역은 역사문화환경보존지역이고, 이 지역 내에서는 모든 건설행위의 사전심의가 의무화돼있다.
세 지역에서는 고인돌박물관이나 연구를 위한 시설 등을 설치해두고 방문객들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 전문가의 주기적인 정밀모니터링도 진행 중이다.

이들 세 지역의 고인돌 유적은 한 지역에 수백 기가 모여 세계 어느 나라보다 밀도가 높은 고인돌군이다. 이는 채석과 운반, 건설방식은 물론 동북아시아 고인돌 형태의 변화상에 대한 중요한 증거이자 자료가 되기도 한다. 동시에 역사와 문화적 가치, 선사시대 이전 인류의 생활상을 추측해볼 수 있는 체험학습의 장이자 관광자원으로서 가치도 가진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라는 이름을 단 것은 세계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는 증명이기도 하다.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최민화 기자 / 입력 : 2022년 06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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