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사 출신 신화수 스님(1896~?)에 대한 선양사업이 추진된다. 신화수 스님은 불교계 독립운동을 대표하는 인물이지만 동지들에 비해 정보가 적어 정작 고성에서는 업적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한국불교종단협의회(회장 원행 스님)는 지난 5일 종단협 회의실에서 근대사회 발전에 기여한 불교인물 홍보사업을 설명하는 간담회를 개최하고 이같이 논의했다. 이번 간담회에서는 동국대 황상준 교수의 ‘옥천사 신화수 스님의 항일운동에 대한 소고’를 비롯해 박노영의 생애와 자취,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 참여 불교 신도 김상언, 박봉석의 불교 활동과 역사인식, 한성준을 중심으로 승무 전승의 역사, 나혜석과 불교 등의 주제에 대한 연구위원들의 1차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황상준 동국대 문화학술원 교수는 “신화수 스님은 경남 고성에 있는 옥천사 출신의 일제 강점기 스님이었다”라면서 “1919년 한용운의 지시 하에 만세운동의 핵심 역할을 담당했던 오택언 스님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우편으로 전달받는다. 그래서 이를 통도사 스님들에게 안전하게 전달함으로써 불교계 독립운동의 중심점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신화수 스님이 옥천사에서 수행하던 시절부터 옥천사는 독립지사들의 은거지였다. 고성에서 처음 시도된 쌀시장터 대한독립만세운동을 이끌었던 이주현, 변상태도 옥천사를 은거지로 삼아 활약했다. 신화수 스님은 한봉진 스님과 함께 독립운동가들에게 숙식을 제공했다. 신화수 스님은 독립운동가들을 돕는 일에 그치지 않고 조직적이고 적극적인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각오와 함께 승복을 벗고 농사꾼으로 위장한 신화수 스님은 2차 독립만세운동을 모의했으나 고향 친구의 밀고로 체포됐다. 신화수 스님은 김상옥 의사를 비롯해 뜻을 같이 하는 지사들과 혁신단을 꾸렸다. 그리고 혁신공보를 발행하며 독립정신 고취에 앞장섰다. 1920년 8월 미국 국회의원들의 조선방문을 앞두고 환영식장에서 사이토 조선총독을 비롯한 일본고관들을 한 번에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김상옥은 상해임시정부로 몸을 피했다. 다시 경성으로 잠입한 김상옥 의사가 독립지사들의 고문으로 악명높던 종로경찰서를 폭파했다. 신화수 스님은 당시 김 의사에게 군자금 1천 원을 제공한 혐의로 체포돼 모진 고문을 당했다. 신화수 스님은 통도사 스님들에게 독립선언서를 전달해 양산 신평장터 만세운동의 결정적 역할을 하기도 했다. 국내 첫 항일무장단체인 대한광복단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마지막 체포와 재판을 치른 1923년 이후 1930년대부터 광복 직후까지 스님의 행적은 묘연하다. 1946년에 이르러 신화수 스님은 외국의 내정간섭과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사회민주당 결당식 직후 당무국장(훈교국장)으로 선출됐다. 한국불교종단협의회는 독립운동, 문화예술 등 5개 분야에서 한국의 근대화를 이끌었던 12명의 불교인을 선정, 서구 중심의 근대화과정에서 잊혀졌던 신화수 스님을 비롯한 불교계 인물들의 연구와 홍보 등 선양사업을 적극 추진할 계획이다.